대마도 19 - 조선통신사의 이면을 생각하다가 부산항과 국제시장을 떠올리다!
2024년 1월 27일 이즈하라 (嚴原 엄원) 지온(祈園) 호텔에서 일본 가정식으로 아침을 먹고 운하를 따라
항구로 가는데 운하 철책에는 유리판에 통신사 행열도 그림이 수십장이 새겨져 있으니 구경을 합니다.
태종때 부터 '통신사' 가 파견되었지만 보통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란 1607년 이후 에도 막부
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리키며 이때 '통신' 은 '국왕의 뜻을 전함' 이라는 의미로 일본
에서는 큰 구경거리로 인기를 모았으며 연도에는 글씨나 그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쇄도했습니다.
'일본국왕사' 에 맞추기 위해 후대에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라고 부르는데 정사, 부사,
종사관등의 삼사(三使) 와 수행원은 300명에서 500명에 이르며, 일본은 새로
도로를 만들고 도중의 번주들은 번의 재정이 흔들릴 정도로 정성을 다해 대접하니
1년 수입이 76만냥인 막부는 통신사 접대에 100만냥을 썼으니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됩니다.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 1607년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는
이야기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에 의해 오사카의 도요토미가에 알려지는데.....
국서에는 이에야스가 '일본국 국왕 전하' 라 표시되어 있다고 하니 이에 요도도노가 분노합니다.
10년 뒤 1617년, 오윤겸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쇼군 히데타다를 알현하는 장면이 나오며, 17년 뒤
정구립을 정사로 한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알현하는데.... 일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역을 맡은 배우의 한국어가 매우 매끄럽고 조선에 대한 고증도 꽤 잘되어 있습니다.
사모를 쓰는 방식이 칸무리 처럼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모양새인 것만 빼면 완벽하며,
정사 오윤겸의 동사상일록에 따르면 히데타다와 삼사(三使) 는 서로 술을 다섯잔
마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되어있는 반면 여기는 국서만 전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러닝타임이 짧다는 문제 등이 겹쳐서 의도적으로 내용은 생략되어 있고, 시청자에게 설명하기 위함인지
통신사가 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교토에서 에도로 돌아가는 기한을 늦추기까지
했던 히데타다가 사신의 목적이나 서한의 내용을 다소 의아한 어조로 새삼스럽게 측근에게 물어봅니다.
8대 쇼군 요시무네 20화에서도 조태억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쇼군을 알현하는 장면이 등장하니,
효게모노에서는 황윤길과 김성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마주하여 대화하고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대접하나 도기 기술에서 앞선 백자를 선물로 내놓으며 히데요시를 무안케 합니다.
그런데 숙종때인 1711년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된 통신사가 경악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일본에서 출판된《징비록》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이미 1695년 에도 막부의 주관 아래 간행돼 시중에서 팔리고 있었으니,
그런 반면에 조선에서는 징비록이 조정에 의해 간행되지도 않았고 필사본으로 돌려 읽었습니다.
1647년경 유성룡의 외손 조수익이 경상감사 시절 처음으로 간행후 1945년 해방까지 300년간 4종만 발간된
것으로 보며 한글판은 1960년에야 나오는데 일본은 1695년에 막부가 주관해 발간후 현재까지 30여종
이 발간되어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읽히는데 비해, 조선에서는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진 책이 되었습니다?
정보수집기관을 겸하던 왜관을 통해 《징비록》을 입수한 일본은 즉시 가치를 알아보았으니
조선과 명의 상황은 물론 자신들의 상황까지 상세히 기록된 《징비록》에 일본은
충격을 받았는데.... 특히 조선의 정치 체제와 군사제도는 물론, 붕당으로 갈라져
싸우는 습성까지 있는 그대로 담겨 있었으니 일본에서 조선 연구의 바이블로 각광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이즈하라항을 둘러보는데.... 해방후 이즈하라와 부산은 밀수로 맺어지지만 그전에
부산에는 왜관이 설치되어 매년 대마도에서 세견선이 오면 쌀과 콩을 실어주었고
또 부산 왜관에는 왜인들이 평소 수백명이 상주하면서 사적으로 조선인과 무역을 했습니다.
부산은 오늘날에는 부산 제2의 도시이지만 개화기에는 동래군 동평면에 속한 작은 어항인데,
이웃 고을인 초읍이나 동래는 평야지대 였으나..... 부산항은 산이 달려와 바다로
빠지는지라 평야가 거의 없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 에 의해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됩니다.
부산이 개항된 1876년 일본은 후지 마스키를 부산주재관으로 보내 동래부사 홍우창과 부산항 일본인
거류지계 조약을 맺었고 1878년 조선이 설치한 부산항 해관(세관) 이 조선인에게만
관세를 거둠에도 일본은 시위를 벌여 폐지시켰으며 소가죽과 방곡령에 거칠게 항의해 철폐 시킵니다.
반면에 지석영은 일본인에게서 종두법을 배워서는 조선인들에게 접종을 시작하면서
마마로 불리며 천형 이라고 여겨지던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895년에 부산항이 개항되자 부산항 경무관이던 박기종등이 발기인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도쿄
개성학교를 모방해 이름도 똑 같이 개성학교라 붙였으며..... 커리큘럼과 교과서 일체를 도쿄에서 가져
왔고 교장과 선생도 습자(한문) 선생 한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이니 수업은 일본어로 하였는데,
훗날 부산상고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교이며 십여년 전에는 다시 교명을 일본 처럼 개성고로 변경했습니다.
부산 개성고의 원형인 일본의 카이세이 (開成 개성) 고는 일본 고교생 중에 0.2% 만이 합격 한다는
도쿄대학 입시에서 2015년 기준으로 무려 34년 연속 최다 진학자 를 기록했으니, 그해 185명
이었는데 비해 2위는 츠쿠바대부속고 107명, 3위는 나다(灘)고 92명의 순인데 개성고는 재학생 중
도쿄대에 46% 합격율이니, 중고교가 연결된 개성중학교 입시는 도쿄대 입시보다 살벌 하다고 합니다?
개항후 옛 부산왜관 자리에 일본인 거류지 가 설치되고 토지를 매입하던 일본인들은 한국
정부에 매립을 권고하니..... 일본 돈과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1902년
부산항 북빈을 매립했으며, 1904년에는 경부선 철도가 일본인들에 의해 완성이 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지을 공간이 없자 일제는 다시 1907년에 북빈을 2차로 매립하여 그 땅에 부산역을
지었으며 영도 지역까지 매립하니.... 평야가 없어 인구가 적었던 부산포는 동평면에서 독립해
부산면이 되고 항구도시로 발전해 오히려 동래군을 흡수하게 되니 꼬리가 몸통을 삼켜버린 꼴입니다.
경부철도에 이어 부산역이 지어지자 부산~초량간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1910년 성지곡 수원지 수도 개설후
일제는 1912년에 부산항 1부두 이어 1913년 부산진을 매립하니 항만 도시가 그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매립은 계속되어 중앙동과 영도 남항동이 생기자 일제는 런던 템즈강의 타워브리지를
모방해 개폐교인 영도 다리 를 만들었으며 영도 다리 위에 전차 레일도
깔았는데 1934년 준공식날 6만명 (부산 인구 16만)이 몰리는등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 영도 다리는 6.25 전쟁이 발생한 이후에는 서로 헤어진 피란민들이 매월 초하루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라며 유명해졌으나... 교통량이 많아지고
영도에 상수도를 놓기 위해 1966년 중지했다가, 1980년에 새 다리를 놓았습니다.
부산은 해방 이후에도 대마도의 이즈하라와 긴밀하게 맺어지는데... 1960년을 전후한 10여년간
부산은 "밀수의 천국" 이었으니, 시계와 카메라에 가방등을 밀수한 더분에 부산의
국제시장은 글자 그대로 엄청 규모가 커졌는데 대부분은 여기 이즈하라항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한국은 당시 공장과 기업이라고는 방직공장과 제분 및 제당공장에 정미소 외에는 없었으니 국세 수입중
가장 비중이 큰게 논에 부과하는 농지세였으며.... 한해 거두는 세금으로는 공무원과 군인 및
경찰 월급 줄 돈도 되지 못했으니 일본인들이 두고간 적산가옥이라 불렸던 집과 공장이며
토지와 논을 몰수해서 판 돈과 미국이 원조해준 식량과 옷등을 시장에 팔아서 나라를 운영할 때 입니다.
따라서 국내에 공장이라곤 없었으니 물자가 귀한지라 자연히 밀수가 판을 쳤는데, 일본과 국교
수립도 안된 시절이니 당연히 여권이나 비자도 없을때인데도 불구하고 여수나 부산항에서
모터를 단 빠른 밀수선이 150척이나 여기 이즈하라항에 왔고 역시 한국인들도 포함된
이즈하라의 상인들로 부터 상품을 구입해 부산항으로 실어나르면 부산 국제시장에 풀렸습니다.
부산항 얘기가 나온김에.....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배 이름까지 지어준 지남호는 부산항
에서 출항해 남태평양 사모아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처음 보는 고기라 이름을 몰랐다가
이승만 대통령에서 보고할 즈음에 진짜 고기라는 뜻으로 “참치” 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10만불을 벌어들였는데.... 규모로 보자면 사실상 "대한민국 최초의 수출" 이었습니다.
부산항에서 월남으로 가는 군인들이 배를 탔는데 베트남에 도착하니 총과 실탄이며 군화와 군복까지 100%
를 미군에게서 받았으니 국산은 몸뚱아리 뿐이었는데.... 미군 옷이 맞지 않아 달러로 받아 부산
에서 군복을 만드니 염색 기술이 형편없어 한번 옷을 빨면 물이 빠져 푸른 군복이 얼룩 군복으로 됐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점차 부산에서는 옷만드는 기술이 발전해 의류를 수출하는 단계까지 갔고, 국군은
매일 전투 수당을 미군에게서 달러로 받으니..... 국가에서는 이걸 원화를 주고 거두어 들여
"경제건설에 종자돈" 이 되었습니다. 물론 돈받고 하는 전투라 용병 소리를 들었으니, 몇년
전에 베트남 여행시 후에 전쟁 박물관에 가니 한국군을 a Puppet Army (괴뢰군) 라고 적혀 있더라만....
이즈하라항에서 이런저런 옛날일을 떠올려보고는 걸어서 호텔로 돌아오니 한글로 된 책들도 있는데 요리며
음식에 대해 설명한 것도 있고 대마도의 문화와 관광지에 대한 책들도 있어 읽다가 떠오르는게 있으니....
서영아 씨가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 쓴 글인 “日청년들의 해외기피” 라는 기사가 떠오르는데...
부제로는 ‘따뜻한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근 원숭이들.’ 입니다. “ 한 일본인 지인은 일본 내에만
머물려는 자국 청년들 을 이렇게 비유했다. 밖은 춥고 불편 하니 그저 따뜻한 물속에 앉아 있다는 것."
“일본 청년들 의 이런 특질은 최근 일본 내각부가 7개국 13∼29세 1000명씩 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은 조사대상국 중 가장 많은 65.7% 의 젊은이가 해외 유학을 희망한다
고 답했다. 다음이 65.4% 의 미국 이고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 순. 일본은 가장 적은 32.3% 였다.”
"일본 청년들의 ‘국내 지향’ 이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다. 해외 유학생 수 는 2004년 8만
3000여명으로 고점을 찍은 뒤 2015년 5만 5000여명 으로 떨어졌다. " 또한 일본인
들은 외국여행에도 적극적이지 않으니 여권을 가진 사람이 20% 대에 머문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해외 지사에 발령만 내면 그만둬 버린다. 어딜 가나 일손이 부족하니 아등바등 자리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고도 성장기인 1960, 70년대 남극이건 열대 정글이건, 세계 그 어떤
오지 에 가도 일본 ‘상사맨’ 들과 마주친다던 시절의 헝그리 정신은 모두 옛 얘기 가 된 듯 하다."
"이들은 흔히 ‘사토리(달관) 세대’ 라고 불리는 세대적 특성 이 있다. 1990년대 초반 버블붕괴기에 태어나
성장기간 내내 ‘잃어버린 20년’ 을 목격하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 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버렸다."
"집이나 차에 욕심이 없고 연애나 결혼도 멀리한 채 미니멀 라이프 를 지향한다.
국내에 있는게 편하고 안전하다 는 인식, 해외 학위 를 그리 높이 여기지 않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다. 고도성장과 대량소비 사회에 대한 반동도 작용한 듯 싶다."
" 한국 청년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해외로 나가고 싶어한다. 해외 유학을 원하는 사람 비율이 일본의
2배가 넘는것은 물론 해외 취업도 선호한다. 작년 해외 취업자 수는 5,783명으로 5년 만에
3.16배 로 늘었다" 국내에 취업을 할 일자리가 없어 외국으로 나가니.... 일본으로 많이 건너 갑나다!
"한국 청년들의 해외 지향 성향은 의욕 있는 청년들이 많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적극적
이고 영어 잘하는 한국 청년들은 일본 기업에서 대환영 을 받는다. 일본인이
기피하는 해외 지사 근무에 손을 번쩍 번쩍 들어 일본 인사 담당자들을 기쁘게 한다."
대마도는 전체 관광객 중에 한국인이 무려 70~ 80%를 차지하는지라 어디를 가도 한국어 표지판이 있으니
일본어를 전혀 못해도 여행에는 큰 지장이 없는 지역인데....당일치기 여행이라면 걸어서 갈수 있는
곳으로 한정하는게 좋으며 버스가 자주 없는지라 히타카츠에 내려 이즈하라에 갔다 히타카츠로
돌아와 페리를 타기는 무리이며 앞으로 부산에서 이즈하라항 까지 페리 노선이 부활하면 모르겠습니다.
대마도는 가장 저렴하게 벚꽃 여행을 할수 있는 곳이니.... 가을 단풍의 메카인 슈지는
봄이면 벚꽃 관광지로 변하며 또 하나는 상도와 하도를 연결하는
미쓰시마로 일본 전통 가옥을 따라 팝콘처럼 펑펑 터진 왕벚꽃을 볼수 있다고 합니다.
이즈하라에는 대형 마트가 여러곳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시내에 자리한 티아라 쇼핑몰은 가장 규모가
큰데다가 중심지에 위치하니.....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입구에는 큼지막하게
한국어로 안내문도 붙어잇는데 일본 본토에서 만나는 식료품과 생활용품이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