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상과 한국 정치학
- 평화통일의 이념에 대해
許 景 日*1)
Ⅰ. 孤雲과 水雲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며 남과 싸우기를 싫어하는 것은 韓민족의 널리 알려진 특성이었다. 고조선의 역사는(신화가 아니다) 공자가 살고 싶어 하던 나라였다. 중국 춘추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던 공자(BC. 551-479)는 “나는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누추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공자는 “그곳에는 군자가 사는데 무슨 누추함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1)
이것은 당시의 고조선은 군자가 사는 나라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백규가 맹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금으로 1/20을 징수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고 물으니까 맹자(BC. 372-249)가 대답하기를 그대의 방법은 낙나라(동이의 나라)의 제도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만이 고조선을 뺏은 것은 BC. 194년이였다. 그러면 맹자 때에는 고조선이 아직 남아있던 때였다. 또 중국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1/10을 징수하였다. 그러므로 백규는 1/20징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말끝마다 인의를 주장하면서도 동이(조선)의 제도임을 내세워서 반대하였다.
이 대목에서만은 맹자답지 않다.2) 산해경(저자미담)에는 “군자국에서는 옷을 입고 머리에는 관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니며 짐승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는다.” 또 그들은 서로 사양하며 싸우지 않는다. 큰 범 두 마리를 그 곁에 두어서 지키게 한다3) 조선은 列陽 동해의 북 남산에 있다. 동해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며 도덕을 중하게 여긴다.4) 이와 같은 기록들은 조선사람들이 정장을 갖추고 사냥하기를 좋아하며 남과 싸우지 않으며 도덕을 존중했다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군자의 나라 등은 고조선 이외에는 조선이라고 이름한 나라가 없다. 또 “군자의 나라”라고 평을 들은 나라도 없었다.
한민족이 동이족의 이름으로 중국대륙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그때의 일이었다. 주의 제후인 송공이 동이족을 복속하고저 하여 역시 주의 제후국인 증나라 왕인 鄫子를 次睢의 社 제사에 제물로 쓰게 하였다. 子魚라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옛날에는 육축도 서로 제물로 쓰지 못하였는데(곧 소의 조상제사에는 소는 제물로 쓰지 못하였다.) 하물며 사람을 감히 제물로 살까보냐 제사는 사람이 복을 받기 위함이며 민은 신의 주인이거늘 사람을 제물로 쓰면 그 제사를 누가 받아 먹겠는가”라고 하였다.4)
아마도 이 같은 잔인한 처사를 당한 동이족의 제후들은 대부분 복족당했거나 밀려나고 말았을 것이다.
黃梅泉은 崔孤雲의 유언을 전하고 있다. “최고운이 유언하기를 나의 30대 후손가운데 성자가 날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최수운이 바로 그 유언에 해당한다5)고 하였다.
고운 최치원도 고허촌장 소벌공의 후예이라 그 부친은 肩逸이며 서기(857)에 태어났다.6) 고운은 “사람들이 모두 하늘이 하늘인줄은 알면서도 자기 자신이 한울인 줄은 알지 못한다.”7) 이 말은 고운이 얼마나 시천주에 가까이 이르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 고운의 親筆詩라고 전하며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전재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孤雲親筆詩
신선이 옥침을 베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
일만 골짝이엔 우레소리 울리고 일천봉우리엔 비 맞은 초목 새로워
산승은 세울을 잊고 나뭇잎으로 봄을 기억하네
비뒤의 댓빛이 고아 자리를 흰구름 사이로 옮기고
적막해 나를 잊었는데 솔바람이 베개 위에 스치네
봄에는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엔 낙엽이 하늘을 덮었는데
“지극한 도는 문자를 여의고 원래 눈앞에 있다네”
시냇물 처음 나는 곳 솔바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소쩍새 소리 귀에 들리니 그윽한 흥취 알 수 있으리
산중의 흥취 말은 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 이 기틀을 알리
무심코 달빛 보며 묵묵히 앉아 기틀을 잊었네
소나무 위엔 담쟁이 넝쿨 얽히고 시내 가운데는 흰달이 흐르네
절벽위엔 폭포소리 웅장하고 온 골짜기엔 눈이 날리는 듯하네8)
이 시의 첫머리에 “신선이 옥침을 베니 순식간에 천년이 되었네”하는 대목에서는 놀랍고도 기이함을 느낀다. 30대라는 기간은 약 1000년 동안이며 고운과 수운사이에는 100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운의 탄생이 서기로 서기 857년이며 수운의 탄생이 또한 서기 1824년이다.
“지극한 도는 문자를 여의고 원래는 눈앞에 있다네”
천년을 사이에 둔 고운과 수운은 어떻게 이렇게 같은 마음일까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였다.(서기1443) 그 동기는 백성들이 모두 당하고 있는 문맹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뜻이 너무 높고 갸륵해서 감히 올려다 볼 수가 없다. 백성들은 먹는 문제만이 문제인 줄로 알던 때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쉬운 글자를 가지고 의사전달이 가능하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으니 더욱이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우며 그 조직이 과학적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혼자서도 스스로 깨우칠 수가 있다. 수운의 동학창도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수운은 일찍이 없던 새 사상인 시천주 사상을 수행하며 연수하며 발전시키며 보습시키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동학이 등장하는 그 당시의 조선왕조는 영조 재위 51년 정조 재위 20년간 도합 70여 년간은 희망이 보이던 시대였다.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수그러뜨리고 烙형을 폐지하였다. 동국문헌비고를 편찬케 하였으며 세계적인 문화재로 인정받는 수원성을 완성하였다. 정조붕어 의문사건을 제쳐두면은 그런대로 중흥의 빛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북지방에서 홍경대란이 일어나고(1811) 헌종(재위 5년) 철종(재위 5년) 때에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였으며 농민들의 민란이 일어났다. 진주민란(1862)을 선두로 하여 민란은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원인은 3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에 있었다. 삼정문란의 원인은 지방아전들의 세습제를 꼽을 수 있다. 지방아전들은 여러 백 년 동안 세습하였기 때문에 천하는 바로 아전들의 천하가 되어있었다. 여기에 지방행정을 책임질 외관관리들은 서울에서 파견되는 제도였다. 거기에 지방행정관의 임명권자인 중앙의 고급 관리들까지 매관매직을 하는 부패상에 이르렀다. 심하면 발령 받은 지방관이 부임도 하기 전에 그의 후임이 발령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잘못된 제도는 결부제도였다. 전세부과의 단위가 토지면적이 아니라 소출이었다. 대개 한 80석 가량의 소출을 내는 토지를 “한결”이라고 하였다. 같은 한결이라도 비옥한 땅은 좁고 메마른 땅은 넓다. 전정의 모든 문단은 주로 결부제도에서 나왔다.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하여 삼정이 정청을 설치하였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럼으로 농민들은 불법적인 수탈을 당하며 굶주리는 비참한 생태에 놓여 있었다.
당시의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흔히 반상제도였다. 양반과 상인제도였다. 양반은 문반 무반을 양반이라고 하였다. 양반중에서도 문반이 숭상되었다. 그 밑에 천인 노비가 있었다. 노비는 매매되었다. 그러나 상속받은 노비는 매매가 금지 되었다. 외거노비는 재산소유가 인정되었다. 외거노비(주인과 따로 사는 노비)의 재산은 그 자손에게 상속되었으며 부자녀 노비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9)
Ⅱ. 수운의 탄생과 구도
수운의 부친은 근암공 최옥이며 모친은 청주 한씨이다. 시조는 신라 첫왕 박혁거세의 아버지인 고허 촌장 소벌공이다. 신라는 고조선이 기울자 왕족들이 그 유민들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경주 일대의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 그 일이 알천양산촌이요, 그 이가 돌산 고허촌이요, 그 삼이 취산 진지촌이요, 그 사가 무산대수촌이요, 그 오가 금산가리촌이요 그 육이 명활산고야촌이다. 이것을 진한 육부라고 한다.10)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 봄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그때 양산부는 양부가 되고 성은 李씨가 되었다. 고허부는 (촌장 소벌공) 사량부가 되고 성은 崔가 되었다. 이 사람이 경주최씨의 시조이며 동시에 수운의 시조이다. 대수부는 점량부가 되고 성은 孫씨가 되었다. 한기부는 본피부가 되고 성은 鄭씨가 되었다. 가리부는 한기부가 되고 성은 裵씨가 되었다. 명활부는 습비부가 되고 성은 薛씨가 되었다.
이 육촌의 촌장들이 중심이 되어 신라를 일으켜 세웠다. 이 육촌 촌장중에서도 최씨성을 받은 고허부 촌장을 “소벌공”이라고 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소벌공의 “소벌”은 지금의 서울이라는 뜻이다. “소벌공”이라고 하는 것은 곧 “서울공”이라는 말과 같다.11)
신라가 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우고도 국호를 “서야벌”이라고 한 것은 국호를 서울이라고 한 것과 같다. 신라가 국호를 新羅라고 고친 것은 제22대 지증왕 3년이 되어서였다. 경주 최씨의 시조 고허촌장 소벌공의 후예인 수운은 단기 4157년(서기 1824) 10월 24일 경주에서 태어났다. 수운이 태어나던 날에는 구미산이 크게 울었다. 이것은 성인탄생의 조짐이었다.
열살 안팎에 허다한 만권시서를 모두 통달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수운은 背誦을 시작하면 마치 책을 앞에 놓고 읽는 사람보다 더 잘 읽어서 보는 사람마다 모두 혀를 내둘렀다. 근암공은 만득자 수운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 하였다. 수운은 두 눈을 감은 듯이 아래만 보며 단정히 앉은 모습은 그림같이 수려하였다.
근암공은 영남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대학자였다. 장서로도 근암공 앞에 설 학자가 없었다. 수운은 이 지음 들어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이는 때가 많았다. 수운은 마음을 정한 듯 형수에게 청을 하였다. 내용은 “외지에 한번 나가서 세상구경과 인심 풍속을 알아보고 싶으니 근암공의 허락을 받아 주십사”하는 간청이었다. 며칠 후에 근암공의 허락이 내렸다. 근암공은 생각하였다. “아마도 저의 모가 생각나서겠지 어린 것이…” 수운은 사무치도록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어머니는 수운이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어머니는 말이 적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눈으로 말씀 하는 분이었다. 별같이 반짝이던 눈을 반만 뜨고 그 아름다운 미소를 숨긴 채 수운을 쳐다볼 때면 수운은 “내가 무엇을 실수했을까”하고 되돌아보곤 하였다. 어머니의 그 눈은 나무라는 눈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 큰 눈을 있는 대로 다 뜨고 넘치도록 미소 지을 때에는 무엇인가를 크게 만족해 하는 모양 같았으며 어머니가 넘치는 미소뿐만이 아니라 두 손까지 내밀며 수운의 두 손을 마주잡을 때에는 아낌없이 칭찬하는 모습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 그 미소 짓는 모습 두 손을 내밀며 활짝 웃는 그 모습이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수운은 사랑채에서 서가로 꽉 들어찬 책을 보면서 “무슨 책을 읽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리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려서 별채로 갔다. 별채도 사면이 서가로 꽉 차 있었다. 근암공은 책 한권을 건네면서 “너 이 책 몇 번 보았느냐” “한두 번 보았습니다.” “그래도 한 번 더 읽고 떠나거라” 책을 보니 고운의 저서였다.
수운이 길을 떠나는 날이다. 수운은 식전에 어머니 묘소부터 찾아뵈었다. 수운은 두 손을 벌려서 어머니의 봉분을 감싸 안을 듯한 자세로 “어머니 제 손이 인제 제법 컸지요 어머니 손도 좀 보여 주셔요” 수운의 눈에는 수정 같은 눈물이 봉분 위에 뚝뚝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수운은 사랑채에 들러서 길 떠나는 인사로 큰절을 올렸다. 사랑채 섬돌 밑에 내려선 수운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는 듯 하였다. 잠깐 서서 정면을 멀리까지 정시하고 나서 첫발을 내딛었다. 내 나이 십사세라 전정이 만리로다. 방방곡곡 찾아들어 인심풍속 살펴보니 세상이 말이 아니었다. 몇 사람만 모여 앉으면 “내 옳고 네 그르지” 시비 분분하는 말이 일일시시 그뿐이었다. 수운은 임금이 임금 구실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구실을 못하는 탓이로다. 긴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수운은 명산 대천 다 밟으며 빈촌 부촌을 가리지 않고 두루 살폈다.
어떤 곳의 촌노는 나라가 흔들리는데 어쩔것이냐고 주객이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하기도 하였다. 어떤 젊은이는 굶고 사는 백성 보았느냐 몇 년 못 가서 백성이다. 굶어 죽을 것이라며 애매한 땅을 치는 이도 있었다. 수운은 그곳을 지나서 고개를 드니 구름을 이고 섰는 금강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수운은 흉중에 품은 회포를 일시에 타파하고 금강산 상상봉을 향하여 허위허위 오르고 있었다. 상상봉에 다다르니 구름은 자리를 사양하고 하늘 밑에 떠있었고 천하명산 금강은 길손을 취하게 하였다. 지다 남은 단풍과 입을 꽊 다문 개골산의 진경만으로도 이렇게 취하여 전신이 노곤해지고 말았다.
어느 사이에 홀연히 잠이드니 꿈에 우의를 입은 한 도사가 효유해서 하는 말이 “잠자기는 무삼일꼬 근심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 구경하소.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것이니 너는 또한 선분 있어 아니 잊고 찾아올까” 잠을 놀라 살펴보니 불견 기처 되었더라 꿈의 장면은 너무나 생생하였다. 하얀 깃옷을 입은 도사의 모습 그가 앉았던 암반 그 느릿느릿한 말소리는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수운은 한참만에야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것이니” 도사의 말을 되뇌이고 또 되뇌이면서 용담정을 향하였다.
용담정에 도착하니 기미년(서기1859) 10월이었다. 구미 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좌우 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한대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 듯 하였다. 수운은 만감이 뒤섞였으나 모두 떨쳐버리고 구도에만 정성들이리라고 굳은 맹서를 하였다. 내가 구하는 도를 얻을 때까지는 다시는 구미산 밖에 나가지 아니 하리라 중한 맹세를 하였다. 자호와 이름도 다시 지었다. 호는 水雲 이름은 濟愚로 고쳤다.
수운은 용담정의 정갈한 방을 비우고 “도장”으로 하였다. 수운은 도장에서 일체 나오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무엇을 외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지만 자세히는 들을 수가 없었다.
Ⅲ. 수운의 대각-득도
수운은 드디어 역사적인 대각 득도에 성공하였다. 그때는 단기4193년(서기1860) 경신년 4월 초 5일 수운이 37세 되던 때였다. 4월 5일은 또 맏조카의 생일이었다. 생일집에 도착하자 몸에 이상한 증세가 일어나서 곧 용담정으로 돌아왔다. 내실에 들어서자 오싹 추위를 느끼며 떨렸다. 무슨 병인지 증세를 알 수 없으며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즈음에 홀연히 어떤 신선의 말이 들렸다.
그 상황이 유래가 없고 특이하였다. 그러므로 수운이 직접 기록한 경전을 중심으로 그 실제 상황이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부분을 추려서 먼저 제공하려고 한다.
-포덕문-
수운은 신선의 말을 듣고 놀래어 일어나 물은 즉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고 하거늘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수운이 연유를 물은즉 대답하기를 내가 또한 그 동안 아무 공이 없었음으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한울님을 위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니 의삼하지 말라 나에게 ① 영부(선약)이 있으니 이 영부를 받아서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② 주문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천하에 덕을 펴리라 하였다. 내가 또한 그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 영부를 받아서 써서 물에 타서 마셔본즉 병이 낳았는지라 그것이 선약임을 알았다. 병자마다 이 영부를 써본즉 어떤 이는 차도가 있고 어떤 이는 차도가 없음으로 그 연유를 살펴본즉 정성들이고 도 정성 드려서 한울님을 위한사람은 매번 병의 차도가 있고 도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으니 이는 영부를 받은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아니겠는가.
-안심가-
개벽시 국초일을 만지장서 내리시고 십이제국 다 버리고 아국운수 먼저 하네 그럭저럭 창황일색 정신 수습 되었더라
그럭저럭 잠등달야 백지펴라 분부하네 창황실색 할길없어 백지 펴고 문을 드니 생전 못본 물형부가 종이 위에 완연터라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터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물구물공하였어라 네가 다시 그려내어 그릇안 살라두고 냉수일매 떠다가서 일장탄복 하였어라 이말씀 들은 후에 바삐 한 장 그려내어 물에 타서 먹어보니 무성무취 맛이 없고 무자미지 특심이라
- 교훈가 -
천운이 순환하사 ③ 무왕불복 하시나니 ④ 억조창생 많은 사람 ⑤ 동귀일체 하는줄을 사십평생 알았던가 무극한 이내도는 내아니 가르쳐도 운수 있는 그 사람은 차차 받아다가 차차 차차 가르치니 나 없어도 다행일세 나는 도시 밀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 열세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 기의 하였어라 너이 역시 사람이면 생각고 생각 할까
- 용담가 -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사월 초 5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 여각 득도로
- 권학가 -
홀연히 생각하니 ⑥ 시운이 둘렀던가 만고 없는 무극 대도 이 세상에 창건하니 이도 역시 시운이라 일일 시시 먹는 음식 성경이자 지켜내어 ⑦ 한울님을 공경하면 자아시 있던 신병 물약자 효 아닐던가
- 도수심 -
내 역시 이 세상에 무극대도 닦아내어 오는 사람 효유해서 ⑧ 37사 전해 주니 무위이화 아닐던가
- 흥비가 -
⑨ 이글 보고 저글보고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 기연 살펴내어 부야흥야 비해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울속에 무궁한 내 아니가
위의 서술 중 ① 등 숫자를 O으로 둘러싼 부분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靈符는 위에서 “선악”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이가 “기도” 또는 수련 도중 한울님과 일심한 한마음의 경지에 이르면 영부가 내린다. 보통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부영부”하고 준비를 요구하면 누구든지 백지를 제공한다. 그러면 백지 위에 내린 영부를 받는다.
② 呪文은 강령주문 “지기금지 원위대강” 8자와 본주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13자 이 주문은 뜻보다는 정성이다.
③ 无往不復은 주역에서는 그 효수가 6효이며 맨 위의 효는 다시 제일 하효로 내려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천지교제의 상징으로 본다. 泰卦, 復卦, 물불가 終盡 “물은 종진해서는 아니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역과는 상관이 없고 “천운이 순환하사 무왕불복 하시나니” 곧 천의 운행이 무왕불복 하기 때문에 物도 무왕불복 하는 것이 천리로 보는 것이다.
④ 億兆 蒼生 ⑤ 同歸一體 억조창생은 한 나라의 국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온인류를 뜻하는 말이다.
⑥ 時運은 피할 수 있는 시운이 있고 피할 수 없는 시운이 있다.
⑦ 한울님을 공경하면 어릴 때부터 앓던 지병도 약 없이 스스로 고칠 수 있다고 한 말이다.
⑧ 37자(주문)를 전해주면 무위이화 곧 저절로 나을수 있다는 뜻이다.
⑨ “무궁한 나”는 무왕불복과 관련된다 흥비가의 끝말은 인간은 “무궁한 나”라고 말한 것이다.
논한문에서 보면 한울님이 수운에게 말하기를 “너는 이제 무궁무궁한 이르렀으니 잘 닦고 연마하고 그 글을 지어서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포덕을 하면 너를 장생하게 하여 천하에 밝게 빛나게 하리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한울님께서 스승님의 대각 득도를 인정한 것이며 또 대각득도를 선언 한 것이다 선천 오만년 동안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하는 천인일처 천물 일체를 대각하며 이 우주 곧 한울의 도를 밝힌 이는 수운 대신사가 처음이다 사람뿐이니라 숨을 쉬는 일체의 온 생명은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임을 깨닫고 샛길 새도를 제시한 것이다. 한울님과 일체의 온 개체 생명체는 생사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한울님을 공경하는 것이 곧 나를 공경하는 것이며 한울님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다. 수은은 천인일체 천물일체를 깨닫고 대우주 대자연의 하늘도를 얻은 경신년 4월 초 5일을 기하여 개벽시 국초일이라고 하여 후천개벽을 선언하였다.
고운 최치원은 수운의 후천개벽을 천년전에 예견하고 부도 불원인 인무이국(夫道 不遠人 人無異國)이라고 하였다.(고운집 권두에 실었다)
Ⅳ. 동학의 기본 이념
동학의 근본은 천도이다. 천도는 우주운행의 원리이며 만물생성의 정상이법이며 천지조화의 오묘한 이법이다. 천도는 모든 생명의 삶의 형상이며 그 이법이 대우주를 주재하는 주체이다.
주역 건괘에서는 건은 천이다. 천은 천의 형체이며 건은 천의 성정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형체는 유형하며 성정은 무형하다 그러니까 천은 유형함도 무형함도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동학의 개요를 동경대전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한울님에게서 직접 천도를 받고 천도를 크게 깨달은 수운대신사는 동경대전에서 천도와 천리를 힘써 밝혔다. 그는 다음의 단 스물한자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영세불망 만사지”로서 천도 천리를 닦고 행하며 수련하는 도법의 차례를 요약하였다. 그것이 주문이다. 주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① 至- 지기의 지는 지극한 것이 지이다.
② 氣- 지기의 기는 순수한 영기가 성하고 맑아서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고 명령하지 않는 일이 없으나 그러나 물형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 하나 보기 어려우니 이 또한 우주전체의 큰 원기이다.
③ 今至- 금지는 천도에 입도하여 지기가 나에게 가까이 와 닿는 것을 깨닿는 것이다.
④ 願爲- 원위는 청하고 비는 뜻이다.
⑤ 大降- 대강은 지기와 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⑥ 侍- 시는 안에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지기와 화하여 온 세상사람이 저마다 옮기지 못할 것을 깨닫는 것이다.
⑦ 主- 주는 곧 천주이다. 한울님을 높이 우러러서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
⑧ 造化- 조화는 한울님께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⑨ 定- 정은 한울님의 덕에 합치되고 한울님 마음을 내마음으로 정하는 것이다.
至氣- 지기는 지극할지 기운기자로서 한울님의 지극한 정기 한울님 자체 생명의 정수, 생명의 기이다. 만유생명은 이 지기로 말미암아서만 살아갈 수가 있다.
금지- 금지는 이제금자 이를지자로서 한울님의지기가 지금 나에게 이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願爲大降- 한울님의 지기가 많이 내리기를 바라며 청하는 것이다.
侍天主- 시천주는 모실시자 한울천자 높일주자로서 한울님을 내몸에 모셨다는 것이다.
造化- 조화는 만유생명의 삶자체이다. 조화의 조는 지을조 나갈조자로서 물리적인 것이며 사람 몫의 조화이다. 조화의 화는 변화될 화자로서 무위이화이며 한울 몫의 조화이다.
定- 정은 완성이며 안정이다. 그러니까 조화정은 한울님과 사람이 함께라야만 곧 시천주라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永世不忘- 영세불망은 긴영 인간세 아니불 잊을망자로서 한평생을 두고 한울님과 천도천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萬事知- 만사지는 깨쳐져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주문을 다시 옮겨보면 “지기가 지금 이르니이다. 많이 내리소서 한울님을 모셨으니 조화정이소서 평생 잊지 않으리니 만사지이소서” 주문은 풀이할 수 없는 것이다. 억지로 옮겨본다면 이에 가까울 것이다.
이 주문은 한울님께서 수운 대신사에게 직접 내려주신 것이다. 동경대권 포덕문에는 “나(한울님)의 영부를 받아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나의 주문을 받아서 사람에게 가르쳐서 나(한울님)를 위하면 너수운대신사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고 하였다. 용담유사에서는 “가슴에 불사약을 간직하였으니 스물한자”라고 하였다. 스물한자는 곧 주문이다. 주문을 불사약이라고 한 것이다. 사람은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의 몸은 한울님의 집이다.
노자는 천하는 신기이다. 아무나 차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몸이야 말로 신기이다. 이 신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수운대신사는 그의 저서 동경대전 포덕문에서 봄․가을이 갈아들고 네 철이 성하고 쇠하며 옮기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은 이 또한 한울님(천주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환하게 밝혀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주를 주재하는 한울님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증거는 한울님 조화의 자취이다. 그럼으로 용담유사에서는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가까이 모신 것을 모르고 멀리서 한울님을 찾는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위의 포덕문에서 보면 천도에는 변화하는 가변의 이법이 있다. 그 증거는 봄․가을이 갈아들고 일년 네철이 성하고 쇠하는 것이다. 또 천도에는 불변의 이법이 있다. 그 증거는 봄․여름․가을․겨울 네 철의 차례가 옮기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이다.
논학문에서는 천도는 형상이 없는 것 같으나 자취가 있고 지리는 넓고 큰 것 같으나 방위가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아홉별이 있어서 구주(아홉고을)와 응하고 땅에는 팔방이 있어서 팔괘와 응하며 또 가득차고 비고 서로 갈아드는 수리가 있으나 움직이고 고요하고 바뀌는 이치는 없어서 음(무)과 양(유)이 서로 조화가 되어 백천만물이 그 속에서 태어나지만 오직 사람만이 가장 신령하다. 그러므로 천지인삼재의 이치가 정해지고 오행의수가 나왔다. 오행이란 무엇인가 한울은 오행의 기강이 되고 땅은 오행의 바탕이 되고 사람은 오행의 기가 된다. 여기서 천지인 삼재의 수를 볼 수 있다. 여기까지를 요약해보면 천도는 형체가 없는 것 같으나 자취가 있다. 이것은 천도는 무형과 유형을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다. 구성은 구주와 응하고 팔방은 팔괘와 응함은 천지가 서로 응함이며 천지가 상응하기 때문에 음양이 서로 조화가 되어서 만물이 화생하게 된다. 만물중에서 사람이 가장 신령하다. 그러므로 천지인 삼재의 이치가 정해지고 오행의 이수가 나왔다. 오행이란 무엇인가. 한울은 오행의기강이 되고 당은 오행의 바탕이 되고 사람은 오행의 기가 된다. 천지인 삼재의수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수덕문에서는 원형이정은 천도의 네 가지 떳떳한 큰 덕이다.
불연기연장에서는 불연과 기연의 사례를 들고나서 “불연은 그렇지 않은 까닭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연이라고 말하지 못하며 또 기연은 그런 까닭을 알기 때문에 기연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꼭 그렇다고 기필하기 어려운 것은 불연이며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기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먼 근원을 탐구하여 견주어 보면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연이 되고 간단히 조물자에게 맡기면 기연의 이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용담유사 흥비가에 보면 “불연기연 살펴나어 부야 흥야 비해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울속에 무궁한 내아닌가”라고 하였다. 또 수덕문에서는 “가슴속에 불사약을 간직하였으니 그 모양은 궁을모양이다. 입으로는 장생 곧 오래사는 주문을 외우니 스물한자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면 사람은 현생만이 아니라 그 삶이 한울과 함께 무궁하다고 하였다. 사람의 생사는 잠을 자고 깨는 것과 같으며 또는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사람은 그 생명자체 생명본질에 있어서 무궁하며 형상이 바뀌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만을 살펴보고 천도동학의 요점을 정리하여 보면
① 侍天主 곧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② 宇宙에는 우주와 천도를 주재하는 한울님이 존재한다.
③ 천도에는 봄․가을이 갈아들고 일년 네 철이 성하고 쇠하는 등 가변의 이법이 있다. 또 일년 네 철이 성하고 쇠하며 그 차례가 옮기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불변의 이법이 있다.
④ 천도는 형체가 없는 것 같으나 자취가 있다. 이것은 천도는 무형과 유형을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다.
⑤ 九星은 九州와 응하고 八方은 八卦와 응함은 천지가 서로 응함이며 천지가 상응하기 때문에 음과 양이 서로 조화가 되어서 만물이 화생하게 된다. 하늘과 땅이, 유(양)와 무(음)가 서로 응한다. 서로 응해야만 만물이 화생할 수 있다. 한울은 홀로 한울일 수 없으며 땅도 홀로는 땅일 수가 없다. 사람도 또한 사람만으로는 사람일수가 없다. 천지의 으뜸가는 큰 덕인 원형이정을 통한 만물의 화육에는 한울과 땅이 서로 상응해야 하며 사람은 더욱 잠시도 한울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가 없다. 한울의 생기인 지기를 숨쉬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지인은 나누면 셋이 되지만 아루르면 하나이다. 천지인뿐만 아니라 만물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한울이며 물물천 사사천인 것이다.
⑥ 만물중에서 사람이 최령자이다. 그러므로 천지인 삼재의 수가 나왔다.
⑦ 五行이란 무엇인가. 오행은 물, 불, 나무, 쇠, 흙이 다섯가지 물체로서 대칭 한 것이며 이것들은 상생하기도 하며 상극이기도 하다. 한울과 땅 사람은 오행의 기강이며 바탕이며 기이다.
⑧ 천도는 원형이정의 떳떳한 천지의 네 덕을 갖추고 있다.
元- 원은 으뜸가는 선원자로서 모든 선의 으뜸이다. 천지생생의덕이 원형이정이다.
亨- 은 형통할형자로서 한울이 만사 만리와 형통한다. 한울은 아무리 작은 존재와도 통한다.
利- 이는 이로울이자로서 한울이 온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貞- 정은 바를정 또는 곧을정자로서 한울이 바르고 굳건하여 확고부동하게 천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⑨ 불연기연장에는 만리만사를 불연과 기연으로 나누었다. 불연은 부정이며 기연은 긍정이다. 불연기연은 탐구․천착의 한 방법이며 한 보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부정에서 긍정에 이르고 긍정에서 다시 부정에 다다르는 탐구의 과정을 또는 탐구의 방법을 제시하여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⑩ 사람의 삶은 한울과 함께 무궁하다. 동경대전의 뼈대는 이상 10개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
Ⅴ. 동학의 평화통일이념
앞에서 살펴본 동학사상의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한국 정치학의 최대 과제라 할 수 있는 민족통일이념을 동학에서 유추해 보고자 한다. 대략 동학사상에서 오늘의 통일이념과 결부 하여 평화통일의 이념이 될 만한 것으로 다음의 셋을 추려 보았다.
① 시천주 事人如天의 이념
② 相應의이념
③ 元亨利貞의 이념이다.
남북한은 6.25 동란을 이미 겪었다. 남북은 서로 믿지를 못하며 적대관계같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내려면 서로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베풀고 또 베풀어서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길밖에는 평화통일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평화통일을 유일한 통일방법으로 밀고 나가려면 동학에서 찾아본 평화통일이념을 깊이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1. 侍天主 事人如天의 理念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한울님을 모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을 섬기듯이 해야 한다. 이러한 시천주 사인여천의 이념이야말로 평화통일의 이념이 될 수 있다. 먼저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야 하기 때문이다. 평화통일은 한민족이 다 함께 살기 위한 방법이다. 사람을 살리고자 함은 한울의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어느 제후가 맹자에게 묻기를 누가 천하를 통일할 것 같습니까.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 죽이기를 싫어하며 사람을 죽이지 않은 사람이 천하를 통일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남북의 지도자는 지도자 사이에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민족 모두의 살길을 찾고자 하는 참마음을 지니고 그것이 샘물이 넘쳐 솟아나듯 밖으로까지 내어 솟아야 할 것이다. 민간인은 민간인대로 핏줄의 뜨거운 정을 가지고 모든 면에서 따사로움을 전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남북지도자는 지도자 사이에서 사인여천하고 민간인은 민간인사이에서 참마음으로 사인여천하면 영하 일천도의 두터운 어름이라도 녹일 수가 있을 것이다. 북한이 남한의 통일정책에 감동을 느끼게끔 하고 특히 민간인은 더욱 남한 지도자들 밑에서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일으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남한사회를 부러워하며 마치 동독인이 그 굳었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듯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치우는 때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을 섬기듯이 하는 높은 도덕과 사인여천의 이념을 행동으로 보여 줌으로써만이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익을 앞에 놓고는 서로 다투게 되고 위험 앞에서는 서로 뭉치게 되는 것이 상례이다. 지금 남한과 북한은 유례없는 위기를 앞에 두고 마주 서있다. 칠천오백만 한민족의 대의를 잊고 남과 북의 지역간에 무력충돌이라도 일어나는 날이면 남북이 함께 쓰러지는 비극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이제라도 남북의 지도자들이 민족전체의 사는 길을 열기 위하여 마음을 합하고 손을 맞잡고 평화통일을 이루어 낸다면 한민족 앞에는 번영과 영광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싸우거나 화하는 것이 실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이다. 몇 사람의 마음가짐의 차이이다. 두 갈래의 길 가운데서 하나는 모두 죽음의 길이요, 하나는 모두 번영과 모두 영광의 길이다. 어찌 번영과 영광의 길을 두고 죽음의 길로 갈 수 가 있는가. 번영과 영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2. 相應의 理念
한울과 땅이 서로 응해야만 만물이 화생한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만 살 수 있는 절박한 때에 서로 응하지 않고 서로 등지고 외면만 한다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다. 평화통일은 어느 한 쪽에 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남과 북 둘이 서로 응해야만 가능하다. 상대가 응해오도록 하는 방법은 상호교류를 앞세워야 할 것이다. 운동경기의 교류, 관광인의 교류, 연극, 음악 등 예술인의 교류 등 일부는 이미 경험하기도 하였다. 교류 중에서도 영향력이 큰 교류는 종교인의 교류라고 생각한다. 특히 기독교 불교 천도교인의 교류를 확대하면 북한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또 중요한 교류는 일천만 이산가족의 교류이다. 일천만 이산가족이 남북을 오고 가게 되면 대동강의 어름을 녹이고 민간인들의 마음도 녹일 수가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길을 먼저 터야 한다. 상응의 길을 트지 않고 어떻게 평화 통일의 길이 열리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남북한 동포들의 마음의 간격을 좁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남한동포들은 토요일 오후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돌아올 수 있는데도 설날이나 한가위 때에는 민족 대이동의 현상이 벌어진다. 50년이 넘도록 서로 생사조차 모르는 이산가족의 만남의 길을 터야 한다.
만남의 길은 상응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상응의 길은 평화통일의 길을 트게 될 것이다. 평화통일의 열쇠와 남북상응의 빗장은 남북지도자들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현재 인구는 북한의 두 배가 넘고 경작면적도 남한이 넓다. 공업생산력은 월등할 것이며 국민소득에 있어서도 북한의 몇 배나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좀 나은 쪽에서 못한 쪽에 대하여 너그럽게 포용하려는 마음가짐과 정책이 필요할 것이다. 서로 상대의 제의에 응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3. 元亨利貞의 이념
원형이정은 한울님과 땅님이 만물에게 베푸는 큰 덕이다. “원”은 조건 없이 베푸는 일이며 “형”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에게 통하도록 베푸는 것이다. “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산짐승 물고기 흙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로움이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정”은 원형이정의 이념을 조금도 변치 말고 붙잡고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울과 땅이 사람과 짐승이 감동할 것이다. 남북이 정녕 평화통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원형이정의 이념에 따라서 돕고 주고 또 베풀어서 북한의 지도자와 민간인을 감동시켜야 할 것이다. 원형이정의 이념은 특히 민간인을 상대로 하면 약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종교인들과 이산가족의 교류는 이 원형이정의 이념을 펴는데 큰 몫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이산가족은 평화통일의 수레를 모는 윤활유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들의 교류는 남북겨레의 마음을 묶는 끈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 집이 혼인을 하게 되어도 서로 예단을 보내는 것이 예의이다. 50년이 넘도록 따로 살다가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려고 하는데 원형이정의 큰 덕을 베풀지 않고 어떻게 한 나라를 이룰 수 있으며 어떻게 한마음으로 화합할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는 또 경제인들의 교류가 앞서야 할 것이다. 주의할 점은 남죽 경제교류에 지나친 경제 논리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즉, 벌기 위한 교류보다는 베풀기 위한 교류가 앞서야 할 것이다.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사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남한이 북한에 대하여 베풀어야 한다는 짐을 진 것이다. 이것이 한울의 이치이다. 물론 이제 어느 정도의 남북교류가 시작된 이상 부분적으로는 국민적 합의라는 원칙이 서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장의 북한 경제를 지원하는 면에서는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경제논리는 자칫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하지 안함만 못할 수도 있다.
한편 남북당국자 또는 민간인이 만났을 때 서로 상대의 제의를 불연으로만 보면 상응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상대가 제의해 오면 일단은 기연으로 보려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정성은 천도 자체이고 한울에 정성 드리는 것은 사람의 행할 바이다. 한울에 정성 드리듯 남북한이 서로 상대에게 정성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당면한 고통과 손실을 덜기 위하여 또 한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남북의 평화통일은 기어코 이루어 내어야 할 것이다. 남한이 북한에 베푸는 것이 결코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같은 핏줄에게 베푸는 것이며 형제에게 베푸는 것이며 나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다. 미래의 세계를 여는 길은 보살핌의 길밖에는 없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통일한국을 여는 길은 원형이정의 이념을 펴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Ⅵ. 동학정치사상의 역할을 기대하며
선인들 가운데 대덕필수명(大德必須命)이라고 말한 분이 있었다. 우리의 상고 2000년간은 적덕의 시대였다. 백두산에는 그때에 쌓은 덕이 오늘까지도 남아서 온수 냉수를 끊임없이 흘려 보내고 있다. 천지가 그 상징이다. 중고시대 약천년간(삼국시대)은 형제간에 다투고 겨루는 시대였다. 숭문에 너무 치우쳐서 강역을 회복하지 못했다. 고려조선 천년간에는 덕을 쌓지는 못해서도 덕을 잃지는 아니 하였다고 생각된다. 세종대왕의 수명과 수운의 수명이 그것이다. 세종대왕이 왕이었기 때문에 한글창제의 기적이 있었고 수운이 천명을 받아서 후천개벽의 “시천주”라고 하는 새 사상의 씨를 뿌렸다고 생각한다. 이 새사상은 세계를 평화의 세계로 동귀일체 시킬 것이다.
오늘의 동학은 비록 과거의 웅대한 세를 계승하지는 못했으나 김지하의 지적처럼 옹치격(雍齒格)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자부한다. 옹치는 모퉁이의 못난 돌이기는 하지만 그 돌로 인하여 담벼락이 지탱되니 그 어찌 가치를 절하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오늘 많은 혼란과 전도의 시대에 휩싸여 있다 해도 옹치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동학사상과 같은 민족이념이 있기에 우리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정치학의 역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정치학이야말로 계층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를 화해시키고, 분열된 사회를 통합시키며 갈등의 이념적 대립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대표적 기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북분단의 극복과 최근의 남남갈등 역시 모두 수운의 구도자적 자세와 애국애민의식을 회복한다면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동학은 평화통일의 이념이자 국민 통합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출처: 민족통일학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