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란 사람을 불러 모으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 맛을 찾아 먼 길 마다하지 않으며 기꺼이 줄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마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서울 성북동 ‘성너머집’은 지난 35년간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꼬불꼬불한 길 끝자락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던 소문난 맛집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지자체 지역 공원화 사업 때문에 성북동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멀리 불광동 북한산 아래로 옮겨 앉았다. 이전한 곳은 예전처럼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제 도로변의 평범한 식당이지만 내공의 맛은 여전해서 그곳에서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평일 점심시간대를 점령하던 넥타이부대 대신 연인과 가족 단위 손님들이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고, 주말이면 등산객과 멀리서 기꺼이 찾아오는 단골손님들로 어느새 북적인다.
북한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등산객들의 막걸리 안주메뉴로 해물파전이 하나 추가되긴 했지만, 이 집은 닭 하나로 승부를 거는 닭요리 전문점이다. 닭볶음탕과 삼계탕 두 가지가 있는데, 닭볶음탕이 특히 유명하다. 닭볶음탕은 닭 마릿수가 아니라 원하는 사람 수대로 주문을 받는다.
상큼한 샐러드로 입맛을 돋우고 총각김치랑 통배추김치를 가위로 잘라 먹기 좋게 준비하다 보면 금세 커다란 뚝배기에 설설 끓는 닭볶음탕이 나온다. 걸쭉한 국물 속에는 먹음직스러운 닭고기들과 통감자가 푸짐하게 들어 있다. 큼직한 닭고기가 얼마나 잘 삶아졌는지 가슴살마저도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신기할 정도다. 특히 통통한 다리와 닭날개 살은 쫀득하면서 야들야들한 맛이 끝내준다.
40분간 감자가 포슬하게 익으면
▲ 성너머집 대표 박금미씨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통감자는 1인분에 1개씩 돌아간다. 감자를 꺼내어 숟가락으로 반을 자르면 파삭하게 부서지며 군침을 돌게 만든다. 급한 마음에 입에 바로 넣으면 사르르 녹지만, 입천장이 델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국물이 빨개서 엄청 매워 보이지만 막상 맛을 보면 지나치게 맵지 않고 적당히 칼칼하다. 무엇보다 달지 않아 좋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깔끔한 맛이랄까. 한마디로 자극적인 매운맛과 단맛으로 무장한 여느 집 닭볶음탕과는 비교 불가다. 칼칼하고 진한 이 국물을 고기와 감자에 꼭 끼얹어주면서 먹어야 제맛을 즐길 수 있다.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 맛도 환상!
성너머집이 처음부터 닭볶음탕으로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 초에 문을 연 뒤 십여 년간은 해장국 한 가지만 팔았다. 찾기 힘든 곳인 데다가 접근성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창업주 강금안(78)씨의 솜씨는 입소문을 탔다. 주인장의 손맛에 감탄하던 단골손님들은 해장국도 맛있지만 좀 더 푸짐한 음식에 도전해보라고 성화였다. 직원 한 명 없이 강씨 부부가 모든 일을 도맡아 했기에 여러 가지 메뉴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강씨는 결국 해장국을 접고 닭볶음탕과 삼계탕으로 메뉴를 변경했다. 해장국을 끓이던 가마솥에 장작불로 정성껏 익혀낸 닭볶음탕은 대박을 터뜨려, 인근 직장인뿐만 아니라 여러 유명 인사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미리 준비한 음식이 동나면 더 이상 만들지 않고 문을 일찍 닫기 때문에 애써 왔다가 발길을 돌리는 손님도 부지기수였다.
“재료가 나쁘면 손님들이 단박에 알아봐요.”
이 집 닭볶음탕의 꾸준한 명성은 언제나 질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정성에서 비롯된다. 닭은 제대로 자란 국산 어미닭을 매일같이 오랜 단골집에서 가져온다. 8조각으로 토막 낸 신선한 닭을 솥에 안치고 고춧가루와 표고버섯, 양파, 생강과 마늘 등으로 양념해 끓인다. 흔히들 사용하는 고추장은 전혀 넣지 않는다. 대신 빛깔과 향이 좋고 매운맛에 깊이가 있는 정읍산 고춧가루를 사용해 매콤한 맛을 낸다. 햇빛에 직접 말린 표고버섯은 감칠맛을 은근히 돋우고, 양파를 통으로 넣어 끓인 후 믹서에 곱게 갈아 다시 부어 넣기에 국물이 걸쭉해지면서 자연의 달큰한 맛이 난다.
닭볶음탕은 한 번에 넉넉히 많은 양을 조리해야 맛있다. 이 집은 수십 마리의 닭과 양념을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익힌 다음 뚝배기에 담아 다시 한 번 살짝 끓여 손님상에 낸다. 약 40분이면 가마솥 안에서 닭고기가 가장 맛있게 익고 통감자가 으깨지지 않으면서도 포슬하게 익는다고 한다. 가마솥은 무거운 뚜껑 때문에 수증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때문에 내부의 높은 압력과 고온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어 음식이 맛있게 익는다. 닭볶음탕 맛을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해 수십 년간 쓰던 가마솥을 그대로 들고 이전했다. 물론 성북동 시절의 장작불은 들고올 수 없었다. 여건상 가스불로 조리하지만 워낙 화력을 강하게 조절해 장작불과 같은 맛을 낸다고 한다.
한여름엔 닭볶음탕 못지않게 몸보신용 삼계탕도 제법 팔린다. 대개 삼계탕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약병아리보다 20% 정도 더 큰 중닭을 사용해 양이 넉넉하다. 찹쌀, 대추, 인삼, 마늘을 배 속에 넣고 소금, 양파, 생강으로 양념해 가마솥에 1시간 동안 끓여낸다. 다른 한약재를 넣지 않기 때문에 뽀얗게 우러난 국물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며 닭고기 육질 또한 흐물거리지 않고 쫄깃하다. 국산 배추와 고춧가루로 손맛이 느껴지게 담아낸 김치가 삼계탕의 맛을 더해준다.
강씨는 10년 전부터 함께 일해온 조카 윤일섭·박금미씨 부부에게 대를 물려주었다. 윤씨 부부는 손님들이 친아들, 며느리라고 착각할 정도로 이모 강씨를 따르며 가게 일을 돌보아 왔다. 나이 들면서 음식 만드는 일이 힘에 부치던 강씨는 단골손님들 때문에 가게를 접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멀리 진주에 살던 조카 윤씨 부부를 설득해 서울로 불러들였다. 마침 솜씨가 좋아 음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박금미씨는 주방에서 강씨와 함께 일하면서 이 집 음식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이제 박씨는 손님상에 나가는 모든 음식을 혼자서 척척 만들어낸다. 새롭게 추가한 해물파전도 잘한다는 집을 찾아가 비법을 배워올 정도로 열성이다. 남편 윤씨도 평일에는 혼자서 서빙과 카운터를 도맡을 정도로 가게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매일 새벽 6시 반에 출근해 닭볶음탕과 삼계탕을 준비해놓고 연중무휴로 손님을 맞는 윤씨 부부. 이들은 새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일절 광고를 하지 않고 있다. 가격도 여전히 1인분에 1만1000원. 착한 가격에 푸짐한 양, 변함없는 맛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 내외 밥 먹고 살면 되지요.” 부부의 순박한 미소가 꾸미지 않은 이 집 음식을 꼭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