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세 번째-1)
(강진 영랑생가∼장흥 이청준생가, 2023년 4월 29일∼30일)
瓦也 정유순
어제 밤늦게 전라남도 장흥에 도착하여 새벽잠을 자고 조반을 마치자마자 영랑생가로 달려왔다. 원래 오늘 시작점은 도암면에 있는 강진 백련사 앞에서 시작하여야 하나 어쩔 수 없이 강진읍에 있는 영랑생가에서 시작한다. 강진군은 탐진강 하구와 강진만이 군의 중앙에 자리 잡아 서안으로는 신전면과 도암면이 자리하고, 동안으로는 칠량면·대구면·마량면이 위치한다. 그리고 양안의 위쪽으로 강진군청이 있는 강진읍이다.
<영랑생가>
강진읍 남성리에 있는 영랑생가는 영랑(永郞)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서정시로 조국의 독립을 걱정했던 지사이자 시인으로, 이곳에서 1948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45년 간 살았다. 소유권이 다른 사람으로 이전 되었던 것을 강진군청에서는 재매입하여 1985년에 복원해 놓았으며, 이 생가를 중요민속자료(제252호)로 지정하였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모란으로 꾸며 놓은 화원이 있고, 5칸 겹집의 안채와 좌측의 사랑채가 있다. 장독대 옆에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가 정겹게 서있다.
<영랑시비-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시비 -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 김윤식(金允植, 1903∼1950)은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4살의 나이로 혼인하였으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한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현 휘문고)에 입학하여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를 만나 문학적 안목을 키운다.
<영랑생가 안채>
1919년 3·1운동 때는 고향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0년에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 무렵 시인 박용철(朴龍喆)을 만난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하였다.
<시문학 제1호 기념비>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등 6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하였고, 해방 후에는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스포츠를 즐기며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정부는 2008년 영랑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
<영랑좌상>
후원으로 올라가면 ‘사계절 모란향기 머금은 세계모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에는 키가 2m가 넘고 수령이 350년쯤 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이 공원의 중앙에 자리한다. 이 모란은 대구광역시의 경주김씨 고택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한국의 모든 모란을 대표하는 의미로 ‘모란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모란은 목단(牧丹)이라고도 하며, 모란과 비슷한 작약(芍藥)은 모두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모란은 낙엽관목이고 작약은 다년생 풀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
<모란>
영랑생가를 둘러보고 길을 따라 탐진강 하구에 놓여있는 구 목리교를 건넌다. 탐진강(耽津江)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과 영암군 금정면의 경계에 있는 국사봉(國師峰, 613m)에서 발원하여 장흥군과 강진군을 흘러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전라남도의 3대 강의 하나로, 유역에는 용반평야·부산평야·장흥평야·강진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장흥군 유치면·부산면·장흥읍을 지나면서 유치천·제비내·부산천 등과 합류하여 강진군의 군동면·강진읍을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목리교>
탐진강은 길이 51.5㎞. 유역면적 862.5㎢. 일명 예양강(汭陽江)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탐진강은 수령천(遂寧川), 예강(汭江) 등으로 표시한 문헌도 확인된다. 지명유래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탐라국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고청(高淸) 등의 형제가 내조할 때 구십포(九十浦)에 상륙하였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탐라국의 ‘탐(耽)’자와 강진(康津)의 ‘진(津)’자를 합하여 탐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탐진강>
탐진강은 발원지에서 계곡을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흐르면서 다른 샛강들의 물을 받아들이면서 큰 몸짓으로 조용히 바다로 들어간다. 이렇게 흘러 들어가면서 강물은 하구(河口)에서 바닷물을 만나는데 이곳이 기수역(汽水域)이다. 이곳에서 바닷물은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민물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의 장이며,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탐진강 하구 - 기수역>
아울러 민물과 바다를 오가며 살아가는 생물들의 상호 적응하는 교육의 장이며 쉼터다. 먼 바다로 나가서 산란하는 뱀장어나 연안 바다에서 산란하는 참게 등은 바다로 나가기 전에 기수역에서 바다에 대한 적응을 하고, 숭어나 황어 황복·우어 등은 산란을 위해 민물로 들어오기 전에 기수역에서 민물에 대한 적응을 하면서 들어온다. 그래서 기수역은 해양생물과 민물생물의 교류의 장이며 생태계의 보고다.
<강진만 갯벌>
빗살무늬토기를 엎어 놓은 속 깊은 모양을 닮은 강진만은 자연 그대로의 생태공원이다. 갯벌에 갈대밭이 무성하게 조성되고 묵은 갈대는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들에 의해 스스로 몸을 낮추며 터를 내어주고, 그 옆으로는 숨구멍이 숭숭 뚫린 것은 칠게·짱둥어·갯지렁이 등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리라. 아울러 식물, 조류와 어류, 곤충, 양서류와 파충류 등 1,131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서식하는 건전한 생태공원이 형성된다.
<강진만 지도>
봄 가뭄으로 물이 부족하다는 남도에 내리는 빗방울은 마른 대지에 생명을 불어 넣는 단비다. 기왕에 오는 김에 해갈이 되도록 내렸으면 좋으련만 길을 걷는 나그네를 생각해서인지 오락가락만 한다. 갈대밭 위로 조성한 데크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큰고니가 날개 짓 하며 비상(飛翔)하는 조형물이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그 다리 입구에는 큰고니 가족들이 나들이 하는 조형물이 있다. 큰고니는 흔히 백조(白鳥)라고도 불리는데 일설에는 일본식 표기라는 이야기도 있다.
<백조(고니)다리>
<큰고니 조형물>
자연에 취해 한참을 걷다보니 칠량면을 지나친다. 칠량면(七良面)은 강진만 동쪽에 있는 곳으로 3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반계천(磻溪川) 등 여러 하천이 서부와 중앙 일대에 평야를 이루면서 강진만으로 유입한다. 고려 때부터 강진은 청자로 유명한 곳이지만, 칠량면은 조선 말경인 1800년 대 후반부터 옹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대중적인 그릇과 옹기를 만들어 도자기산업을 바꾼 곳이다. 칠량옹기는 주로 고온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단단하여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아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팔려나갔다고 한다.
<강진만과 칠량천의 합류>
그러다가 플라스틱 제품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옹기산업도 퇴색한다. 옹기 굽는 가마의 연기로 자욱했던 칠량의 옹기가마는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옹기 혁명을 이룬 봉황리(鳳凰里)에서 일부 명맥만 유지한다. 이후 양식업이 활발하게 일어나 바지락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으나, 1980년이 지나면서 북쪽에 위치한 송로리(松路里) 일대에는 간척지가 전개되면서 갯벌의 바지락도 생산이 급감하기 시작하였다.
<칠량면 봉황리 옹기가마>
칠량면 앞바다에는 무인도인 죽도(竹島)가 있는데 예전 이곳에서 생산한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었다. 죽도 일대는 낚시로도 유명한데 강진에 유배(流配)왔던 정약용도 이곳에서 자주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그리고 칠량천의 은어도 칠량면의 자랑거리다. 문화재로는 강진 염걸장군묘소(康津廉傑將軍墓所, 전남기념물 36), 강진 송정리 지석묘군(松汀里支石墓群, 전남기념물 66), 강진 삼흥리 도요지(三興里陶窯址, 전남기념물 81), 명주리 요지(明珠里窯址) 등이 있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강진만 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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