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와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는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며 떠나갔다. 구름이 천막 위에서 물러가자, 미르얌이 악성 피부병에 걸려 눈처럼 하얗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론이 몸을 돌려 미르얌을 보자, 과연 그 여자는 악성 피부병에 걸려 있었다." (7~10) 민수기 12장 7절에서 '모세' 앞에 '나의 종'에 해당하는 '아브띠'(abdi; my servant)를 첨가시켜 말씀하신 것은 모세와 다른 예언자들을 비교하고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모세는 다른 일반 에언자들처럼 한번도 환시나 꿈, 수수게끼를 통하여 받는 일방적인 계시에만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주님 앞에 특별한 존재이며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으로 번역된 '네에만'(neeman; faithful)은 '신실하다', '견고하다', '믿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 '확실성'과 '신실함'이란 뜻을 지닌 '아만' (aman)의 수동형 분사이다. 이 동사는 분사형으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그 신실함과 충성됨이 변함없이 지속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늘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이행하여 하느님께로부터 확고하게 인정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분사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민수기 12장 8절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입과 입을 마주하여'에 해당하는 '페 엘 페'(phe el phe; mouth to mouth)에서 '입'을 뜻하는 '페'(phe)가 '~에', '~쪽에'라는 뜻의 전치사 '엘'(el; to)에 의해 연속으로 연결된 형태로서 '입과 입을 맞대고'라는 뜻이다. 보통 대면하여 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얼굴'을 뜻하는 '파님'(phanim)을 사용해서 '파님 엘 파님'(phanim el phanim)이라는 문구가 사용된다(탈출33,11; 신명 34,10). 그런데 여기서는 '얼굴' 대신에 '입'을 뜻하는 '페'(phe)가 사용되어 그 친밀감을 더욱 강조할 뿐만 아니라 모세가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로 하느님의 말씀만을 '입에서 입으로' 정확하게 전했음을 주님께서 친히 보증하고 계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느님과의 친밀성이나 말씀의 권위에 있어서 모세와 견줄 만한 예언자들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환시와 수수께끼로'에 해당하는 '베히도트'(behidoth; in dark speeches; in riddles)는 전치사 '뻬'(be)와 '수수께끼', '어려운 문제', '비밀 말'이란 뜻을 가진 '히다'(hida)의 복수형이 결합된 것이다. '어려운 문제'나 '수수께끼' 같은 것은 창세기의 요셉처럼(창세41,12) 그 꿈이나 어려운 비유적 내용을 잘 해몽할 사람이 있어야만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모세에게는 그러한 간접적인 계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는 자라는 점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독보적인 지위를 가진 인물임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에 해당하는 '우테무나트 예흐와 얍비트' (uthemunath yehwa yabbit; he sees the similitude of the LORD)에서 '모습'으로 번역된 '테무나트'(themunath)는 '닮음', '형태'라는 뜻을 지닌 명사 '테무나'(themuna)의 연계형으로 '하느님의 형상', '하느님의 형상을 모방한 우상' 그리고 온갖 거짓된 형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속에서 임하신 하느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신명4,12). 하지만 모세는 비록 하느님의 얼굴은 못보았지만 하느님의 등, 즉 자취는 보았다(탈출33,22.23).
그러니까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란 주님께서 사람이나 천사로 나타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광에 둘러싸인 하느님의 실제 현존과 임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볼 수 있다'에 해당하는 '얍비트'(yabbit)는 '바라보다', '앙망하다', '살피다'는 뜻을 지닌 '나바트'(nabat)의 사역형이다. 구약에서 '나바트'는 단 한 차례 강조형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역형으로 사용된 동사로서 적대적인 응시로부터 주의깊고 지속적이고 호의적인 응시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주목하는 모든 행동 일체를 묘사하지만, '보다'라는 뜻을 가진 일반적인 동사 '라아'(raa)와는 달리 '마음과 뜻을 다하여 바라본다'는 개념을 강하게 지닌 동사이다. 즉 유일한 도움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삶을 영위하기 위해 눈을 오로지 주님께만 고정하고 그 은총을 좋아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모세가 하느님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주목하여 보면서 계시를 받고 주님과 친교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모세와 일반 예언자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계시를 받을 때의 서로 다른, 정보 전달 방법에서 오는 계시 내용의 분명성 정도에만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계시 전달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과의 전인격적인 관계성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하는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 예언자들은 '꿈'이나 '환시'를 통해서 주님을 알았지만, 모세는 '입과 입', '용모', '하느님의 형상을 주목함'을 통해 주님과 의사 소통을 했기 때문이다. 한편, '구름이 천막 위에 물러나자'에 해당하는 '싸르 메알 하오헬'(sar meal haohel; when the cloud lifted from above the Tent)에서 '물러나자'로 번역된 '싸르' (sar)의 기본형인 '쑤르'(sur)는 '돌이키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 기둥이 천막에서 떠오르는 것을 묘사할 때는 항상 '올라가다'는 뜻을 지닌 동사 '알라'(alla)가 사용되었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름 기둥이 떠올라 사라지는 상황을 '알라'(alla)가 아닌 '쑤르'(sur) 동사로 묘사하여 이스라엘 진영의 출발을 지시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미르얌 또는 미르얌과 아론에게서 떠나신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구름 기둥이 물러나자 미리암은 곧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
강한 전염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의시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던 악성 피부병에 걸린 자는 이스라엘 회중 안에 머물 수 없었으므로(레위14,3.8) 미르얌은 진영 밖에 격리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회중을 떠나 진영 밖에 격리될 동안은 위험을 당해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실로 미르얌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또한 '위에'로 번역된 '메알'(meal)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알'(al)에 '~로 부터' 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이 접두되어 이루어진 단어로서 '~위에서부터 (분리하여)'라는 뜻이다. 이것은 동사 '수르'(sur)와 어울려서 '천막 위에서부터 구름이 분리되어돌이켜 떠나가는' 구름의 움직임을 잘 묘사하고 있다. 미르얌과 아론에 대하여 진노하신 하느님께서 떠나가시자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천막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떠나간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구름 기둥으로 천막을 덮음으로서 보여주셨던 주님의 자애와 자비하심과는 대조적으로 죄에 대한 진노하심을 보여 주시는 장면이다. 그리고 '악성 피부병에 걸려'에 해당하는 '메초라아트'(metsorath; she had leprosy)는 '피부병을 앓다', '나병을 앓다'는 뜻을 가진 '차라'(tsara)의 강조 수동형 분사이다. 그리고 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인 '차라아트'(tsaraath)는 나병에만 쓰이는 특별 용어가 아니라 광범위한 피부 질환을 가리키는 말이다(레위13,2). 여기서 '눈처럼' 하얗게 되었다는 것을 볼 때, 실제 매우 심각한 나병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살이 짓무르고 털이 하얗게 변하는 것 외에 나병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심리적인 수치심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이었다. 끝으로 아론이 악성 피부병에 걸리지 않고 미르얌만 걸린 것은 모세에 대한 비방을 미르얌이 주도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민수12,1), 아론은 부정함을 멀리해서 (레위21,10~15)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정결을 유지하도록 대사제로서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는 데 단절됨이 없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는 것이 좋다 (레위16,1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