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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출생-사망 1452.4.15 ~ 1519.5.2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예술, 과학, 철학
출생지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빈치
주요저서 《회화론》
주요작품 《모나리자》《성 안나》《최후의 만찬》(1498)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다.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카타리나(Catarina)라는 이름을 가진 농사꾼의 딸이며 신분의 차이로 아버지와 결혼을 하지 못했으며 그가 태어날때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모나리자〉·〈동굴의 성모〉·〈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9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이렇게 그는 조각·건축·토목·수학·과학·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생애를 대개 5시기, 즉 제1차 피렌체 시대(1466~1482), 제1차 밀라노 시대(1482~1499), 제2차 피렌체 시대(1500~1506), 제2차 밀라노 시대(1506~1513), 로마·앙부아즈 시대(1513~1519)로 구분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상
미술은 기본이고, 건축, 미학, 음악, 요리, 수리학(水理學), 생물학, 해양학, 해부학, 지리학, 지도제작술, 기계 공학, 동물학, 지질학, 무기 제작, 수학, 항공학 등에 관심과 두각을 나타냈으며 자전거, 항공기(헬리콥터), 잠수함, 전차 등의 모델을 고안했던 만능인으로 알려져 있다.
1452년, 레오나르도는 빈치(Vinci)라는 마을에서 약2~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안키아노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사생아였다. 법률 공증인이었던 아버지는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에 피렌체로 이주하면서 다른 여성과 결혼했다. 친어머니와 헤어져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란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고,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베로키오의 공방에 맡겨졌다.
레오나르도는 외모가 준수했고, 당시로서는 희귀한 왼손잡이였으며, 관찰과 사색에 몰두하는 독특한 아이였다. 건축을 제외한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1470년, 도제 생활을 끝마칠 무렵, 레오나르도는 스승 베로키오와 함께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생애에 관해 최초의 기록을 남긴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베로키오는 십대 소년에 불과한 제자의 그림솜씨를 보고 붓을 꺾었다고 한다.
베로키오와 레오니르도 다 빈치<그리스도의 세례>1470~1472 우피치 미술관 소장
* 왼쪽 하단의 천사 부분이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베로키오는 제자의 솜씨에 충격을 받고 이후 작품 제작을 중단했는데, 레오나르도가1475년경에 배경 부분을 완성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카네이션을 든 성 모자상>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초의 그림. 뮌헨, 구 미술관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굴욕
1476년에 발생한 고소 사건으로 레오나르도는 궁지에 몰렸다. 피렌체에서는 시민들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법부에 수사를 의뢰할 수 있는 부키 델라 베리타(Buchi della Verita, 진실의 입)란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를 이용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익명의 고발자가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몇 명의 청년들을 동성애 혐의로 고발했다. 고발된 사람은 금세공사인 야코포 살타렐리와 바르톨로메 오 디 파스퀴노,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사돈인 리오나르도 데 토르나부오니(Lionardo de Tornabuoni)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동성애자'란 의미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동성연애자로 몰려 수치를 당하고, 로마로 파견될 예술가 명단에 오르지 못했던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부근의 스코페토에 있는 산 도나토 수도원의 제단화로 사용될 <동방박사의 경배>를 주문받았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유명한 그림은 당시에 궁핍했던 레오나르도의 슬픈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의뢰받으면서 작품에 사용할 물감과 기타 비용을 모두 본인이 부담할 뿐 아니라, 작품 대금을 헌납할 사람에게 수도원을 대신하여 지참금을 지불한다는 악조건까지 떠안고 계약을 맺은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방박사의 경배>
그 후부터 미완성으로 남기는 악순환을 반복하는데 레오나르도는 기발한 생각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많으나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는 버릇이 생긴것이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의 기마상> <앙기아리 전투> <성 안나와 성 모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등 대부분의 작품이 완성되지 못했다. 메디치 가문의 리더는 이런 이유 때문에 레오나르도를 내쳤다. 세심한 관찰과 상상력의 천재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는 실행력에서 2퍼센트가 부족했고, 메디치 가문의 리더는 그 부족한 2퍼센트의 실행력 때문에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5-8 최후의 만찬, 석고 위에 템페라, 460x856cm 밀라노, 산타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최후의_만찬
너무나도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을때 사도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놀란 사도들이 예수에게서 뒷걸음질치는 바람에 바로 뒤에 있는 창문을 배경으로 예수의 얼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다 빈치는 예수나 사도들 어느쪽도 머리 위에 후광을 그리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는 창밖에서 비쳐드는 햇빛이 예수의 후광을 대신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오른편에 고요히 앉아있지만, 성미 급한 베드로는 유다를 밀쳐내고 칼을 움켜잡고 있다. 몇 시간 후 베드로는 이 칼로 로마 병사의 귀를 베게 된다. 유다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놀란 것처럼 보이지만, 돈지갑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그의 정체를 폭로 하고 있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때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하고 말씀하셨다.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산으로 올라갔다.
(마태복음 26장 26- 30절 )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린토1서 11장 23-25절, 공동번역성서)
네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h 1503 모나 리자 (또는 '라 지오콘다)
다 빈치 이전의 초상화들은 모두 날카로우리만치 명확한 윤곽이 특징이다. 그러나 <모나 리자>의 매력은 그 두리뭉실함에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그 애매모호한 미소의 힘이 가장 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푸마토(stumato)라는 새로운 화법을 창시했는데, 이것은 이목구비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그림자 처리를 함으로써 보다 부드러워 보이게 한다. 보다 투명하고 은근한 빛이 더해져서, 다 빈치는 미술에 혁명을 불러 일으켰으며 모델 뒤로 보이는 기묘하면서도 몽환적인 풍경은 이 그림에 매력을 더한다. 인적도 없고 단지 바위와 강, 길, 수로만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왼쪽의 풍경과 오른쪽의 풍경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평선이나 화가가 보는 각도 등이 서로 다르다.
여인은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있다. 양쪽 가장자리에 기둥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외부로 트인 주랑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나리자의 도난 사건>
1911년 8월 21일 모나리자가 도난당했다. 충격에 사로 잡힌 루브르는 일주일간 문을 닫았고 놀랍게도 이 사건의 범인은 모나리자의 보안장치 기술자로 밝혀졌다. 그는 왜 모나리자를 훔쳤을까요?
사실 이사건의 배후에는 명화 전문 사기꾼 에두아르도 드 발피에르노 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나리자를 훔치기 전부터 서로 공모하여 여섯 점이나 되는 모나리자 복제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모나리자를 훔친 것이다.
당연히 사건은 대서특필 되었고, 그들은 계획했던 대로 암시장을 찾는 고객들에게 가짜 모나리자를 진짜로 속여 팔 수 있었다. 다행히 2년 뒤 범인들이 붙잡혀 모나리자는 제자리로 돌아오게 됐지만 하마터면 진짜 모나리자를 영영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던 사건이다. 그 후 루브르는 모나리자를 수송할 때면 장갑차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 Leonardo da Vinci · 1510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돈나 리타
쌍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Madonna Litta (Madonna and the Child)
Leonardo da Vinci · 1490
#마돈나_리타
- 이 작품은 원래의 소장자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리타 공작이었기 때문에 마돈나 리타로 불린다. 마돈나는 "나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의 호칭으로 성모의 조상이나 성화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된다. 아기 예수의 왼손에는 머리에 붉은색이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들려있다.
요즈음 어린이들처럼 애완동물과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새는 황금방울새이며 엉겅퀴와 가시나무를 먹고 산다고 하여 성서화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새이다. 창세기에 보면 엉겅퀴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원죄)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는 땅에서 종신토록 수고하는 벌을 받았으며 엉겅퀴는 가시가 많은 관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의 재료로 묘사되기도 한다.
마돈나 리타 출처.askdesign님 네이버블로그
레오나르도 다빈치, 인간의 비율
The proportions of the human figure (The Vitruvian Man)
Leonardo da Vinci · 1492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래 영상을 화면을 터치하셔서 언어를 한국어로 설정하고 보시면 됩니다
위에 세개의 점을 클릭하시어 언어설정을 한국어로 누르시고 처음 화면이 이해하는데 부적합할 수 있다고 나옵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틀릴수 있으니까요 ^^
YouTube에서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과 관련한 수학 이야기-제임스 얼(James Earle)' 보기
https://youtu.be/aMsaFP3kgqQ
Da Vinci's Vitruvian Man of math - James EarleView full lesson: http://ed.ted.com/lessons/da-vinci-s-vitruvian-man-of-math-james-earle What's so special about Leonardo da Vinci's Vitruvian Man? With arms...www.youtube.com
YouTube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보물찾기 본능:
노아 차니 at TEDxLjubljanaSalon' 보기
https://youtu.be/_gKCzdT60Uo
Leonardo da Vinci and the Treasure Hunt Instinct: Noah Charney at TEDxLjubljanaSalonNoah Charney is an American art historian and novelist. He is the author of The Art Thief, a mystery novel about a series of thefts from European museums and...www.youtube.com
레오나르도 다빈치, 흰 산족제비와 함께 한 여인 The Lady with an Ermine (Cecilia Gallerani)
Leonardo da Vinci · 1496
🌿 다 빈치가 그린 "흰 산족제비와 함께 한 여인" (일명 체칠리아 갈레라니)은 스포르차가 가장 총애했던 정부 체 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그림이다.
Portrait of a Musician
Leonardo da Vinci • 1485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습작들>
레오나르도 다빈치, 멀티 배렐 건
Multi Barrel Gun
Leonardo da Vinci • 1481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수창치도
Drawings of Water Lifting Devices
Leonardo da Vinci • 1481
레오나르도 다빈치
Crossbow Machine
Leonardo da Vinci
Date: c.1481; Milan, Italy
레오나르도 다빈치, 해골
View of a Skull
Leonardo da Vinci • 1489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례연구
Study of proportion
Leonardo da Vinci • 1490
레오나르도 다빈치, 해부연구(후두와 다리) 1510
레오나르도 다빈치, 플라잉 머신의 설계
Design for a Flying Machine
Leonardo da Vinci • 1488
다빈치, 자궁 속의 태아에 대한 연구
Leonardo da Vinci - Studies of the foetus in the womb
프로파일 헤드에 미치는 빛의 영향에 관한 연구
레오나르도 다 빈치•1488년
Study of the effect of light on a profile head (facsimile)
Leonardo da Vinci • 1488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몰라의 계획 1502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 같은 명화를 그리기 이전에 지도를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이탈리아 이몰라지역을 그린 지도는 최초의 유럽 도시계획도로 불리지만 이는 단순한 조감도가 아니다. 개별 거리와 구역, 요새, 강 등이 모두 주의 깊게 표시되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군사지도였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아들 보르자의 정복전쟁을 돕기 위해 지도 제작에 착수한 다빈치는 보르자의 정치권력이 기울자 다시 피렌체로 돌아갔다. 아마 이때쯤 '모나리자' 작업에 들어갔으리란 추정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너무나 와 닿는 문구
"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보려는 사람, 보여주면 보는 사람, 보여줘도 안보는 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