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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묵상글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주님, 저도 깨끗하게 해 주소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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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 저도 깨끗하게 해 주소서!
성전 묵상 1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나무라시는데
왜 장사꾼의 소굴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하실까요?
강도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을 일컫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성전이지 나의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전에는 하느님이 계셔야지 하느님이 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가 이루어져야 할 성전에
하느님은 안 계시고 인간들이 주인행세하고 기도하지 않고 장사나 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집을 내 것으로 만드는 강도질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건물 성전뿐 아니라 나와 너 모두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바오로 사도 말씀하셨는데 나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나의 성전이라고 하지만 나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실 때 성전이지 나로 가득하다면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나를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내 안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고 나만 있다면 나는 성전이 아닐 것이고,
그래서 내 안에 하느님과의 일치인 기도는 없고 나 혼자 덩그러니 있다면
그리고 사랑은 없고 욕심만 있으며 기도는 하지 않고 근심 걱정만 한다면
그때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도가 될 것입니다.
성전 묵상 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이런 나라면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께서 나도 정화하시지 않을까요?
그때 나의 성전도 주님께서 정화하시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정화하실 필요가 없도록 내가 스스로 정화해야 할까요?
물론 주님께서 정화하실 필요가 없도록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 스스로 말끔히 정화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주님께서 정화해주시도록 나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나를 주님께 맡겨드리면 주님은 내 안에서 나를
억지로 몰아내는 조폭이 아니라 은혜로운 청소대행업자십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주님께서 정화하실 필요가 없도록
내가 스스로 정화하는 것이 물론 더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바늘로 잘 찌르지 못하잖아요?
급체하여 사관을 터야 하는 그런 경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도 깨끗하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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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7절의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말씀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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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강도의 소굴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 덕에 백성이 산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마음에 끌리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권세가 아니라 백성과 인류, 세상의 성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요, 영혼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행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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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중에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 종교’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단은 다르지만 끝이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신당동 떡볶이, 장충동 족발, 종로 닭 한 마리’에는 ‘원조’라는 이름의 가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원조와 비슷한 이름의 가게들이 함께 있습니다. 이단은 맛이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먹어서 건강에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보통은 원조 집에 손님이 많지만 자리가 없으면 다른 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취향에 따라서 원조가 아닌 집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는 ‘가톨릭, 동방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로 나뉘어 졌습니다. 시작은 같지만 교리와 제도의 해석에 따라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예전에는 교리적인 이유와 더불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에 따라 이단을 단죄하였고, 전쟁까지 벌였습니다. 현대에는 공동선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방인, 과부, 고아를 잘 돌보아야 한다. 한 때는 너희도 이방인, 과부, 고아로 떠돌아다니지 않았느냐?”
사이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 먹던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욕심 때문에 몸에 해로운 음식을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보기에 비슷해서 사먹지만 먹으면 설사를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불량식품의 유형을 이렇게 나누기도 합니다. “불량식품은 ① 위해식품, ② 병든 동물고기 등을 사용한 식품, ③ 기준·규격이 고시되지 않은 화학첨가물 등이 첨가된 식품, ④ 유독기구 등을 사용한 식품, ⑤ 기준과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포장을 사용한 식품, ⑥ 허위표시, 과대포장 등을 한 식품 등 6가지로 유형화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이비는 종교를 가장하여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범죄자들입니다. 사이비 종교도 종교를 '가장'하고 기존 종교의 교리를 따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종교의 계통학적 구분으로써 답을 찾으려 하다보면 사이비 종교를 구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이비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은, 그 나라의 사법체계 안에서 '사이비다'라고 판정이 나거나, 그에 상응하는 유죄판결을 받은 단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사이비종교는 이단에 포함되지만 모든 이단 종파가 사이비 종교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사이비들이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이비들의 위선과 허위에 대해서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들의 가르침은 따라라. 그러나 저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저들은 자기들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산다면 그 역시 사이비입니다.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로 이끈다면 그 또한 사이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칭찬하셨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한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우라고 하는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는 자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거나 우상 숭배자거나 중상꾼이거나 주정꾼이거나 강도면 상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와는 식사도 함께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 악인을 제거해 버리십시오.”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사이비는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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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는 어쩌자고 강도의 소굴로 만드느냐?”라고 말입니다.
이 문장을 두 개로 나누면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와 “강도의 소굴”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하느님을 만나러 가면 그 앞에서 고개 들고 천국 문을 열어 달라고 떳떳이 말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저는 그렇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죄인 일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우리의 마음이 떳떳치 못하기에, 우리의 삶이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성전에 들어와 기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니 우리 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강도는 거룩한 성전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돈벌이의 도구가 아닙니다. 신앙은 사회적 신분을 높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신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여기 가서 저거 믿고, 여기 와서 이거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자신의 장신구처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을 주님은 ‘강도 같은 사람아’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것을 갈취하는 동시에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사리사욕의 도구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내 전부로, 내 삶의 힘과 희망이 되어주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이렇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제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이 찬미 받으시길, 그리고 우리의 기도로 모든 이들과 우리 스스로가 감사하고 행복하길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마음의 사리사욕을 없애고 기도의 힘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속도보다 이것?
한국인의 특징 ‘빨리빨리’
외국 어디를 가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던지는 말 ‘빨리빨리’
우리는 얼마나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었나요.
전 세계로 퍼진 우리나라 유행어가 ‘빨리빨리’인걸 보면
우리는 얼마나 속도에 미쳐 살아왔던 것일까요?
그런데….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향입니다.
너무 빠르면 앞의 위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너무 빠르면 앞의 낭떠러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속도에는 욕심이 들어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있는 삶, 절제가 있는 삶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신앙 역시 속도가 아닌 방향입니다.
주님을 향해 오늘도 천천히 느끼며, 기도하며, 사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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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운전 중에 라디오를 통해 “지금 엄청난 화재가 났습니다.”라는 뉴스 속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이런 반응일 것입니다.
“아이고, 큰 사건이 또 났네. 빨리 화재가 진압되어서 희생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런데 잠시 뒤에 조금 구체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화재는 인천 연수구에 있는 송도 신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말에 저는 “아니, 우리 동네잖아? 잘하면 화재 난 것을 볼 수도 있겠는데?”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뉴스 진행자의 놀라운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인천 송도신도시에 있는 성김대건 성당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때 저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남의 집에 불난 것처럼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맙소사, 우리 성당이잖아?”라면서 속도를 높여 성당으로 빨리 갈 것입니다.
대부분 어떤 사건에 대해 구경꾼 신드롬(방관자 효과)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비로소 구경꾼 신드롬에서 빠져나오게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보면서,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심지어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중에는 구경꾼 신드롬에 빠져있었던 바로 ‘나’도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십자가가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까? 나와 너무 깊은 연관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뜨겁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끝이 없는지는 ‘나의 주님’이라고 가슴 깊이 고백할 때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나와 연관 깊은 분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부분으로만 연결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성전에 있으면서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았지요. 그래서 성전을 세속적인 물건들이 파는 곳, 장사하는 곳, 심지어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약자를 오히려 소외시키는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이고, 이 성전에서 우리 역시 거룩해지기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이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만나는 장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때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곳임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와 연관 있을 때 가장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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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화해했으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깊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한스 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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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정화
-성전정화의 일상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건물보다도 사람이 우선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건물의 성전이라도 거기 좋은 신자가, 좋은 공동체가 없다면 참으로 허전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때론 박물관처럼 무덤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날로 텅비워져가는 성전이나 번창했다가 사라져 흔적만 남은 오래된 폐사지(廢寺址)를 찾을 때마다 절로 젖어드는 비애감입니다.
정말 살아있는 성전인 거룩한 신자가, 거룩한 공동체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참 좋고 거룩한 신자가 되기를, 또 좋고 거룩한 신자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거룩한 욕심의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살아있는 성전인 나부터, 공동체부터 날마다의 성전정화가 으뜸 수행입니다. 말그대로 성전정화의 일상화입니다.
어제 나눴던 “겨울 배나무 예찬” 고백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많이 보완된 완결된 고백 기도시 같은 글이요, 참 좋고 거룩한 살아 있는 성전의 사람을, 공동체를 상징하는 고백시요, 배밭 수도원이라 일컫는 요셉 수도원 소속의 수도자뿐 아니라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넓은 의미에서 요셉 수도원의 한가족같은 모든 분들에게도 와닿는 고백시라 믿습니다.
-어쩜 저리도 담담할 수 있나
초연할 수 있나
초겨울 밤하늘 별들은 더욱 빛나고
땅에서는 하늘 냄새가 난다
그 크고 탐스러운 배열매들 모두 선물로 내놓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봐주지 않아도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기에
묵묵히 침묵중에 말없이 책임을 다한 후
날마다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무념(無念), 무심(無心), 무욕(無慾)의 겨울 텅빈 사랑의 배나무들
텅빈 허무(虛無)가 아닌 텅빈 충만(充滿)의 사랑이구나
참 평화롭다, 놀랍다, 감동스럽다, 부끄럽다
겨울 배나무들아
너야 말로 내 겸손의 스승, 평화의 스승이구나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배나무들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구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성전정화의 일상화로 날마다 이렇게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을 살아가는 이들이 진짜 성인이요 살아 있는 참 좋고 거룩한 성전입니다. 참 좋고 거룩한 신자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걸어다니는 성전입니다. 어제 저는 이런 분을 만났습니다. 루시아 자매인데 평상시에도 눈길이 갔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제 뜻밖에도 2주간에 걸쳐 기도하며 손수 손으로 뜬 겨울 쉐터를 저에게 선물했고 이 털쉐터를 입고 강론을 씁니다. 더불어 감동적인 실화도 전해주었습니다.
-제 친구가 몇 년전 여기 별내 신도시에 사는, 암투병중인 오빠를 찾아 간병하며 때로 요셉 수도원을 찾았답니다. 그때는 배꽃이 피기 1-2주전 정도는 될 것입니다. 친구는 병색이 짙은 오빠와 함께 수도원을 방문했고 마침 배나무 전지중인 마르코 수사님이 배꽃봉오리들이 많이 달린 배가지를 잘라 주며 당부했다 합니다.
“이 배나무 가지를 병에 꽂아주면 얼마후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과연 말그대로 얼마후 꽃병에 꽂은 배나무가지에서 흰 배꽃들이 활짝 피어나던 날, 친구분의 오빠는 참 편안하게 배꽃을 보며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아직 수사님에게는 알리지 못했지만 곧 전해드릴 것입니다.-
참 귀한 겨울 털쉐터 선물과 더불어 아름다운 실화를 선물해준 살아 있는 성전같은 아름다운 자매였습니다. 수도원에서 걸어다니며 일하던 살아 있는 성전인 수사님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 병자인 오빠가 활짝 핀 흰 배꽃을 보며 선종했다니 그대로 부활로 직결된 죽음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 주제도 성전정화입니다.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우선 착수한 것은 공동체의 중심인 성전정화였습니다. 이민족들이 더럽혔던 제단을 다시 정화하여 봉헌한 것입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으며 무려 봉헌축제는 여드레 동안 계속됐다 합니다. 역시 축제의 이스라엘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하루하루 날마다 성전정화가, 성전정화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이들을 내쫓으시는 성전정화 활동후 본연의 사명을 "가르치는" 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루카복음 사가가 즐겨 쓰는 용어가 “날마다”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날마다 말씀 공부의 일상화를 통해 살아 있는 성전정화는 이루어집니다. 살아 있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회개와 정화로 깨끗해 지는 살아 있는 성전이 개인이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음 두 문장에서 “날마다”란 말이 나옵니다.
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책임의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라 갈 때 저절로 이뤄지는 성전정화입니다.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루카11,3)
새삼 가톨릭 교회의 평생 교육 시스템에 감동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를 통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의 결정체인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주님의 미사 은총은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 살아 있는 성전정화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미치는지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됩니다. 참으로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교회의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물론 날마다 죽을 때까지 순교적 삶에 충실했던 성인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될 뿐 아니라 부단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이분들의 생애와 삶이 우리에게는 늘 신선한 도전이자 자극이 되며 성전정화의 일상화에도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오늘은 베트남 순교 성인들 축일입니다. 우리보다 200년 정도 앞선 1533년 복음이 전래된 이후 거의 200년 동안 13만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베트남 교회입니다.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 순교성인들의 구성도 참 다양합니다. 96위의 베트남인들과, 11위의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소속 선교사, 10위의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입니다. 신분별로 보면, 8위의 스페인과 프랑스 출신의 주교들, 50위의 사제들(스페인과 프랑스13, 베트남37), 59위 베트남 평신도 도합 117위 순교성인들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8년 6월19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비롯한 116명의 동료순교자들을 시성했고, 이들의 축일은 11월24일 오늘로 기념하도록 보편 교회 전례력에 포함시켰습니다. 참으로 오늘 성 안드레아 둥락을 비롯한 116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거룩하고 치열했던 신앙의 삶이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정화함을 느낍니다.
참으로 분투의 노력으로 “주님의 전사”답게 하루하루 날마다 순교적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저절로 성전정화의 일상화도 이뤄질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공동체는 물론 우리 모두 하나하나를 정화해주시어 참으로 살아 있는 성전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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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곁에 벗들이 있으니>
“온 백성이
그분을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세상이
불신이어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곁에
믿음의 벗들이 있으니
세상이
절망이어도
나의 희망은
꺼지지 않습니다
내 곁에
희망의 벗들이 있으니
세상이
미움이어도
나의 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내 곁에
사랑의 벗들이 있으니
세상이
죽임이어도
나의 살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내 곁에
살림의 벗들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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