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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승부의 인문학 「승자의 공부」 - 유필화
유필화 선생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과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경영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987년부터 성균관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일본 게이오 기주쿠대학교 초빙교수로, 지난 30년간 한국의 우수기업 및 사회단체에서 1,500회 이상 강연을 했을 만큼 기업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경영전문가로 영어 독어 일본어도 능통하고 다양한 논문과 저술을 집필했다.
*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부학장
* 한국마케팅학회 회장
* 교보생명 사외이사
* 제일기획 사외이사
* 1987~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독일 경영연구원 연구원
* 독일 빌레펠트대학교 초빙교수
저자는 〈승자의 공부〉이 책을 다음과 같은 주제기준으로 썼다고 한다.
- 중국대륙을 호령한 황제, 재상, 장군
- 동양의 7대 병법서로 불리는 무경칠서(武經七書)
- 3000년 역사의 지략과 협상법이 집대성된 〈삽십육계〉와 〈전국책〉
-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불교경전
19세기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을 유럽최강으로 만든 비스마르크 총리는 1885년 2월 12일 제국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사는 한 배웁니다. 나는 오늘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 말을 본 따 책의 저자 유필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승자는 공부하고, 공부하는 자는 승리한다.”
그리고 책머리에서 “고수는 싸우지 않고 이긴다.”“정도(正道)만으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다.”라고도 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책은 ‘1부 ‘승자의 그릇’2부 ‘ 승자의 원칙’3부 ‘승자의 책략’이렇게 3부로 기술하고 있는데, 1부에서 ‘물은 배를 엎을 수 있다(당태종), 성실, 성실, 성실하라(강희제), 삼감으로 그릇을 키우다(주공 단), 주는 것이 얻는 것(관중), 물처럼 유연하되 물처럼 쉼 없이(저우언라이), 반대에도 할 말은 한다(좌종당), 2부에는 속도의 몰입(손자), 승자의 4덕(오자), 내공의 병법(육도삼락), 통솔의 묘(사마법), 사람 쓰는 법(울료자), 정공과 기습(이위공문대), 3부는 3000년 내공이 담긴 36가지 책략(36계), 상대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가(전국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 읽을거리로 ‘붓다의 가르침과 현대의 기업경영’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만 봐서 내가 잘 모르는 이름과 이해가 어려운 단어들도 보인다. 저우언라이는 주은래를 말하는 것을 알겠는데, 주공 단과 좌종당, 사마법, 울료자, 이위공대문 등은 처음 듣는 이름들이다.
(1)‘정관의 치(貞觀 治)’로 중국 역사상 훌륭히 정치를 했다고 평가받는 당나라 태종은 당고조 이연의 둘째아들로 그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본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왕이 되자 신하들의 고언에 귀 기울이고 황제라고 뻗대지도 사치하지도 않았다. 또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일체의 일이나 토목공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리더의 원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추앙받는 군주가 되었는데 그의 성공비결은 태종이 죽은 뒤 50년 후 사관 오긍(史官 吳兢)이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에 상세히 기술하여 세상에 전한다. 태종의 정치사상이 집약된 구절을 보자.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舟人水 水能載舟 水能覆舟)
하지만 당태종은 만년에 대의명분을 잃고 수나라가 망하는 꼴을 옆에서 지켜보고도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이때 한반도는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644년 신라의 김춘추가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당태종은 세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충신 방현령과 장손무기 등 측근들이 극구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는데 이것은 평소의 정치와는 달리 실패작이었다. 정관 23년(649) 당태종은 자신이 세운 당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장안에서 죽었다. 야사에 고구려 연개소문이 쏜 화살에 눈을 맞춰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봐서 고구려 원정으로 극도로 피곤했고 원정의 실패가 죽음을 앞당겼는지 모른다.
(2) 거란 즉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은 나라가 청나라고 청나라는 조선인조 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포 한방 쏘지 않고 인조가 삼전도로 내려와 굴욕적으로 항복하게하고 그것을 기념해 ‘삼전도비’를 세웠다는 것이 역사이고,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도 또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에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청나라를 기틀 위에 올려놓은 황제가 4대 ‘강희제(姜熙齊)’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비길 데 없을 정도로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도 많은 책을 읽어서 과로한 나머지 피를 토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는 독서의 효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 한권의 이득이 있고 하루 독서를 하면 하루의 이득이 있다. 황제는 천하의 일을 모조리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책을 가까이 하며 옛 사람의 가르침을 배워 잘못을 줄이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천하를 다스린 지 50여 년 동안 큰 과오를 범하지 않은 것은 책과 가까이 지낸 덕분이다.”
강희제는 8살에 황위에 올라 죽을 때까지 61년간 청나라를 다스렸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긴 황제 재위기간이며‘과감한 결단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끝없는 실천으로 자기관리의 화신으로 불리는 그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가 1720년 즉위 60년을 맞아 신하들이 큰 축하연을 열자고 하자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면서 신하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3) 춘추시대 공자가 그토록 본받고 싶어 했던 주(周)나라는 주지육림에 빠진 은나라 걸왕(桀王)을 몰아내고 문왕(文王)이 세운 나라다. 문왕, 무왕 그리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 등 3대 왕이 주나라의 기틀을 다졌는데 그 역할을 주공 단(周公 旦)이라는 인물이 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주공 단’은 문왕의 아들, 무왕의 아우, 성왕의 작은 아버지가 되는데 한 번도 반역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3명의 왕을 보좌하여 공자가 그토록 본받고 싶어 한 주나라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주공 단은 주나라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노(魯)땅을 영지로 받았으나 그는 일에 쫓겨 자신의 땅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백금(伯禽)을 대리인으로 노나라로 보내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아우이며, 지금의 성왕에게는 숙부이다. 제후들 가운데는 고귀한 몸으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나도 손님이 오면 머리를 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손님을 맞고 예의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모자란 때가 있지 않은가하고 근심걱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한다. 너도 노에 가거든 아무리 귀한 몸이라고 해도 결단코 건방진 행동은 하지 마라.”
이 말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 인물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어떤 자세로 정치를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정치철학에 대하여 후세사람들은 다음의 두 항목으로 요약했다. ‘첫째, 늘 인재확보에 힘을 기울인다. 둘째, 겸허한 자세로 부하와 백성을 대한다.’
(4) 다음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管仲)’의 이야기다.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관중은 자신을 알아준 제나라 환공(桓公)을 위하여 일했던 인물로, 관중의 처세에 대하여 관중이 죽은 100년 후에 태어난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논어》는 전한다.
“환공이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도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의 힘 덕분이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그를 제후들의 맹주로 만들었으며 천하의 질서를 회복했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다. 만일 관중이 없었으면 우리들은 오랑캐의 풍속을 강요받았을지도 모른다.”《논어》〈헌문편〉
또 사마천은 《사기》에서 관중이 군주에 대한 보필의 책임을 다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옛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군주의 좋은 점은 더 키우고 결점은 바로잡았기에 온 나라가 평화로워졌다.”그러고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관중은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정치를 맡자 보잘 것 없는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는 이점을 살려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아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백성의 뜻에 맞추어 정책을 실시했다.”
관중은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는데 그것이 백성의 신임을 얻었고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정치의 비결로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5) 저우언라이(주은래)는 故김종필처럼 만년 2인자로 머물렀음에도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데 그는 동지인 마오쩌뚱(모택동)과 같이 국민당 장제스(장개석)와 싸웠는데 중국에서는 《삼국지》의 제량공명에 비유되곤 한다. 그의 정치적 처세는 한 마디로 ‘참다, 견디다, 질기다’는 뜻을 가진 인(忍)이라고 하는 한자와 잘 맞는다. 1927년 국민당과 공산당이 갈라지기 직전에 국민당의 배신행위에 격분한 류영(柳寧)이라는 부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동지, 단지 인忍이라는 한 글자만 있을 뿐이네. 혁명을 위해서는 악문 이가 부러지도록 흐르는 피와 함께 그것을 삼켜야 하네. 필요하다면 창부(娼婦)도 될 수 있어야 하네.”
1936년 12월 7일 장제스가 공산당과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장쉐량(장학량)이 12월 12일 상관인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과 싸울 것을 요구했다. 이것을 일명 ‘시안사건’이라고 하는데,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장쉐량은 장제스를 죽일 뜻을 품었다. 이를 안 마오쩌뚱은 저우언라이를 시안에 급파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가 갇힌 감방에 들어서면서 공손하게 경례를 하고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했던 그대로 “교장님!”이라고 부르고 정중한 태도로 그를 설득했다. 장제스도 저우언라이의 정성에 끌렸는지 둘이 만난 뒤 사건은 급속도로 화해의 길로 이어졌다. 그것은 저우언라이의 거짓 없는 진심과 믿음직스러운 태도 때문이었던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 같은 높은 사람뿐 아니라 무명의 학생과 자기편을 대할 때와 적을 대할 때도 한결같았고 외국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념이나 진영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데 이런 성실한 자세와 태도가 그를 존경하는 인물로 만든 것이었다.
(6) 좌종당(左宗棠, 1802∼1885)이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그는 청나라 말기 정치적으로 무너져 가던 나라를 구한 증국번(1811∼1872), 이홍장(1823∼1901)과 더불어 이른바 청나라 3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들 세 사람은 시작은 달랐으나 모두 청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다. 좌종당은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신장(新疆) 위그르 지역의 반란을 진압했는데 그 곳이 지금 중국의 영토로 남아 있게 한 장본인이다.
청나라와 신장 위그르 회족간 싸움은 1866년부터 7년간 계속되었는데, 당시 신장에는 서투르키스탄 출신 ‘야굽 백’이라는 인물이 신장 위그르 자치구를 거의 점령하고 있었고, 영국과 제정 러시아가 뒤에서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 영국은 야굽 백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억제하려고 했으며 러시아는 야심을 감춘 채 1872년 야굽 백과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회족의 반란을 틈타 상권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보내어 사실상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홍장을 중심으로 신장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포기론자들의 논리는 해안선 경비강화가 당면한 과제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신장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세로 봐서는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감숙성 난주에 주둔하고 있던 좌종당은 단호하게 무력탈환을 주장하였는데 ‘중국의 국방을 위해서 신장이 아주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마침내 조정은 좌종당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신장탈환을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2년여에 걸친 신장수복 작전을 펼쳐 결국 성공했다.
한漢나라 때 반초(班超)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서역을 공격한 적이 있지만 이렇듯 짧은 기간 안에 서역 전체를 중국(청) 세력권 안에 넣은 경우는 좌종당이 처음이었다. 좌종당의 원정이 없었다면 지금 서역 땅은 중국에서 떨어져 나갔을지 모른다.
좌종당의 이런 위업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첫째, 주도면밀한 준비. 둘째, 무력에만 기대지 않고 정치적인 배려도 잊지 않았다는 점. 셋째, 힘들지만 견뎌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후세사람들의 평가다.
다음은 2부 「승자의 원칙」으로 여기에는 무경칠서의 내용인‘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무경(武經)이란 문文이 아닌 무武가 원전이라는 뜻이고, 칠서(七書)란 《손자》《오자》《사마법》《울료자》《이위공대문》《육도》《삼략》등 모두 7권의 책을 말한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손자》고, 오자, 육도삼략은 그래도 들어본 것 같은데 나머지 《사마법》《울료자》《이위공대문》등은 이름조차 생소하다.
여기 서문에서 저자는 “손자병법이 아주 훌륭한 병법서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중국 병법서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려면 무경칠서를 모두 독파해야 한다. 병법서란 한 마디로 어떻게 하면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지지 않을 수 있는가?를 논하는 전략전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오늘날 불확실성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략전술을 가르쳐 주고 위기관리에 대처할 수 있는 사상서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손자병법》은 손무가 쓰고, 손자인 손빈이 완성했다고 하나 이 책도 『논어』처럼 한결같이 ‘손자 왈’로 시작되는 것으로 봐서 손자가 직접 썼다기보다는 후세사람들의 썼을 가능성이 높다. 손무는 춘추시대 오패 중 한 명인 오왕 합려(吳王 閤閭)를 도와 오나라 위상을 높인 명장 중의 명장이다. 그는 유명한 오자서와 함께 활동했는데, 오자서는 《오자》의 오기(吳起)와는 다른 인물이다.
나중에 다시 《손자》를 읽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을 다시 보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적을 모르고 나를 알면 이길 확률과 질 확률이 똑같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진다.” 《손자병법》 제3장〈모공편〉 이것이 원전이다.
한참 지난 이야기기는 하지만 식품회사‘하인즈’와 휴대폰 회사‘모토로라’는 세계적으로 막강한 상표 이미지를 가진 회사였으나 한국의 식품시장과 휴대폰 시장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유야 많지만 이들은 한국내의 경쟁사인 ‘오뚜기’와 ‘삼성전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패 원인 중 하나였다. 상황파악 뿐 아니라 이들은 오뚜기와 삼성의 의지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또 한국 할인점 시장에 진출했던 프랑스‘까르푸’와 미국‘월마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소비자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내 경쟁사인 ‘이마트’나 ‘홈플러스’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아 결국 한국시장에서 외면당했던 것이다.
두 번째 《오자》는 손무보다 뒤인 전국시대 오기(吳起)가 쓴 병법서로 그는 위나라에서 태어났으나 노나라에서 이웃 강대국인 제나라의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독이 되어 시기심을 사게 되고 결국은 위나라로 돌아갔는데 위 문후(文侯, 기원전 445∼396)와 아들 무후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대장군으로 발탁함으로써 27년간 76차례나 싸움을 치러 이 가운데 64차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승리하지 못한 12차례의 싸움도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을 뿐, 패한 것은 아니라고 하니 가히 ‘백전불패’의 장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기가 말년에는 초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었는데 오로지 정치를 바로 세우는데 진력하였으나 재상이 된지 6년 만에 그를 신임한 도왕(悼王)이 죽자 그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렇듯 말년은 불행했지만 그는 문무를 두루 갖춘, 이론과 현실에 밝은 전략전술가로 병법서 《오자》에는 그것이 녹아 있다.
《오자》에서 ‘군주가 제대로 나라를 이끌어야 나라가 튼실해지고 망할 염려가 없다고 하면서 도, 의, 예, 인 등 4가지 덕목을 강조했다.’
도道를 지키면 근본으로 돌아가고 원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의義를 행하면 큰일을 성취하고 공적을 세울 수 있다.
예禮의 길을 가면 손해를 면하고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인仁을 행하면 업적을 유지하고 성과를 지킬 수 있다.
“높은 자리에 있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도에 어긋나고 의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그는 반드시 신세를 망치고 나라를 잃게 된다. 그래서 성인은 도로써 천하를 안심시키고, 의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예로서 백성들을 움직이고, 인으로 백성을 어루만진다.”고 했다. 군주가 이 4가지 덕을 잘 지키면 나라가 번창하지만 지키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도 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로 “먼저 적장수의 그릇과 재능을 충분히 조사한 다음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싸워야 한다.”고 하고 “적의 우두머리가 평범하고 경솔하게 남을 믿는 사람이면, 속임수를 써서 꾀어내라. 탐욕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면, 재화를 줘서 매수하라. 단조롭고 아이디어가 빈곤한 사람이면, 책략을 써 바쁘게 뛰어다니게 하라. 그래서 적을 지치게 만들라. 윗사람이 재력과 권력을 휘둘러 아랫사람이 불만을 품고 있으면, 이간책을 강구하여 분열을 꾀하라. 적의 작전행동이 갈피를 못 잡고 부하가 장군의 지휘에 불안감을 갖고 있으면, 위협 공격을 가해 패주시켜라.”고도 했다.
이제부터는 《육도》《삼략》을 보도록 하자. 이 둘은 모두 중국 고전병법서로 각기 다른 책이지만 하나로 묶어서 《육도삼략》이라고도 한다. 주나라의 뛰어난 참모로 주나라 개국을 도운 태공망(여상, 강태공)과 관계 깊은 책인데 육도란 〈문도〉〈무도〉〈용도〉〈호도〉〈표도〉〈견도〉여섯 편으로, 주 문왕과 무왕이 태공망과 주고받은 대화형식이다. 앞의 세편은 주로 정치와 용병을 다루었고, 뒤의 세편은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논의한 내용이다.
《삼략》은 〈상략〉〈중략〉〈하략〉 세편으로 되어있는데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정치와 병법의 핵심을 담고 있다. 《육도》《삼략》도 태공망이 직접 지은 것은 아니고 상당부분이 후대에 태공망의 이름을 빌어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육도》《삼략》도 《손자》《오자》처럼 병법서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예전에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과묵했던 나에 대해 “속에 육도벼슬을 하면 뭐 하노? 말로 해야지”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는데 아마도 이때는 ‘육조벼슬’이라고 해야 맞는 말인 듯싶다. 내가 잘못기억하거나 어머니께서 잘못 아셨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쓰는 “부드러움이 능히 억셈을 누르고 약함이 능히 강함을 누른다.”(柔能制剛 弱能制强)는 이 말은 《삼략》〈상략〉에 있는 말인데 그것만 알아서는 문제가 될 수가 있다. 이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단지 부드러움만을 소중히 하고 약함만을 지켜야 하는 규칙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부드러움과 억셈, 강과 약, 이 넷을 모두 갖추고 그때그때 정세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柔有所說 剛有所施 弱有所用 兼此四者 而制其宜) 고 했다.
싸움을 함에 있어 공격할 때는 재빨리 나아가고 방어할 때는 빈틈없이 지키는 유연한 대처 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서 싸움에 나갈 때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지 《삼략》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들었다.
1) 지휘관의 계략은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 2) 장병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3) 일단 공격을 시작하면 질풍처럼 밀어붙인다.”
그러나 이 말이 현대전에도 맞을 것인가? 하는 데는 쉽게 판단해 버릴 수 없어 보이는 그 무엇이 있어 보인다.
다음에는 《사마법》이라고 하는 병법서다. ‘사마(司馬)’는‘사마의’같은 인물의 성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군사업무를 다루던 관직을 말한다. 관직으로 부를 때 ‘대사마’라고 했는데 그래서 원래 《사마법》이란 책에는 군사, 전쟁 등 관련 규정과 노하우를 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는 《사마법》은 후대인 전국시대 제나라가 옛날 기록들을 정리하고 가필해 간행한 병법서다.
《사마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쟁을 보는 시각인데, 《사마법》의 전쟁관은 전쟁을 억제하자는 것으로 다음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전쟁으로써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으면 전쟁을 일으켜도 좋다.”
(以戰止戰 雖戰可也) - 《사마법》〈인본편〉
또 “나라가 크다고 해서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평화롭다고 해서 군비를 소홀히 하면 위험에 빠진다.”고도 했는데, 이 말이 얼마나 바른 지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독일 나치정부와 조선의 선조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1933년 1월 30일 독일 나치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히틀러가 집권했다. 그는 꾸준히 군비를 강화해 급기야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라고 했지만 1945년 5월 8일 나치독일은 치욕적 패배를 안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은 200년 동안 평화가 계속되자 국방을 소홀히 생각하고, 사대주의에 물든 지도자(사대부)들은 문약해져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를 기르자는 ‘이이(李珥)의 10만양병설’을 무시하다 급기야 1592년 4월 왜군이 쳐들어오자 한마디로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었던‘임진왜란’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한다.
다음은 《울료자》라는 진짜 생소한 병법서인데 여기서 울(尉)은 성, 료(繚)는 이름, 자는 존칭으로 쓰였다. 울을 ‘위’로 읽지만 성을 나타낼 때는 울로 읽는다. 《울료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울료자》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양 혜왕이 울료자에게 물었다.”(梁 惠王 問 尉繚子)
이 말은 ‘울료자’란 사람이 양나라 혜왕과 만나 부국강병책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양나라는 위(魏)나라의 별칭이고, 혜왕은 3대 왕이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369년에서 기원전 319년. 위의 초대왕은 문후, 2대 왕은 무후로 문후 시절에 강국이 되어 무후 때까지 강성했으나 혜왕에 이르러 동쪽 제나라가 쳐들어와 크게 패했고, 서쪽 진나라에게도 패해 국력이 급속히 약해지자 왕이 ‘울료자’라는 인재를 불러서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양나라 역사서에는 울료자 이름은 보이지 않아 그가 진짜 인물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의 울료자가 있는데 그는 진시황 때의 인물로 《사기》〈진시황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의 수도 대량 출신으로 ‘울료자’라는 사람이 진나라에 와서 임금에게 건의했다. ‘진나라가 강대해지니 제후들은 기껏해야 군현의 우두머리 정도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제후들이 동맹하여 진나라의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권세 있는 대신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보조를 맞추지 못하게 하십시오. 불과 삼십만 금만 쓰셔도 충분합니다.”
여기 울료자는 진시황에게 중용된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의 행적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전해지 않는다. 결국 전해지는 《울료자》의 저자가 누구인지 단정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위작이 아니라는 것은 1973년 산동성에서 출토된 한나라 때의 죽간에서 한왕 때에 《울료자》가 유포되고 있었다는 증거 때문이다.
《울료자》는 천관편(天官篇)에서부터 병령하편(兵令下篇)까지 24편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법제의 확립을 설하고 신상필벌을 주창한 법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책에는 주로 군대의 편성과 관리, 통제와 정치, 경제, 병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날카로운 필치와 뛰어난 논리는 《손자병법》과도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울료자》의 첫 편인 〈천관편〉에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점占이나 신神에게 기대서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슬기와 힘이 뛰어난 자가 이기는 법이다.”
또 무의편(武議篇)에는 이런 말도 있다.
“뛰어난 군대는 물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은 아주 유약하지만 앞을 가로 막는 것은 설사 그것이 언덕이라 하더라도 부셔버리고 만다. 그것은 물의 성질에 유연성과 파괴력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군사행동뿐 아니라 인간의 이상적 행동을 물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노자》제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최선의 선善은 물과 같다.”《울료자》에도 조직 관리를 맡은 지도자는 얼핏 서로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엄격함과 유연함을 모두 주문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무경칠서〉의 마지막인 《이위공문대》를 살펴볼 차례다. 문대(問對)는 ‘질문에 대답한다.’는 것이므로 누군가의 질문에 ‘이위공이 대답한다.’라고 풀이된다. 여기서 질문자는 이 책 맨 처음에 소개된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고 그의 상대는 이위공(李衛公)이라는 말이다. 약관 20세 때에 아버지에 의해 대장군에 봉해진 이세민과 함께 신생국가이던 당나라를 안정기에 접어들게 만든 인물, 이위공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이정(李靖)이고, 공적을 인정받아 ‘위공’으로 봉해졌다.
《이위공문대》이 전략서도 다른 병법서와 마찬가지로 이위공이 직접 쓴 것은 아니고, 후대에 두 사람의 이름을 빌린 것으로 앞의 다른 여섯 권과 달리 당나라 후기 또는 송나라 대에 쓰였다. 그만큼 후대에 기술된 것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당태종과 이정 두 사람이다. 한쪽은 용병의 귀재, 또 한쪽은 백전노장, 두 거물의 화려한 병법이야기가 날카롭다.
이 책은 다른 병법서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있는데 첫째, 《손자》《오자》《사마법》《울료자》등에 나오는 빼어난 글귀를 여기저기 인용하였고 특히 《손자》를 더 많이 인용하였다. 또한 실전을 경험한 사람의 관점에서 설명하였고, 둘째, 전쟁하는 방법은 정(正)과 기(奇)의 조합으로 무궁무진한 방법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깊이 논의했으며, 셋째는 대체로 신비의 베일에 싸였던 진형(陣形)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넷째, 다양한 실전사례가 언급되고 있다.
또 역사상 뛰어난 명장과 군사(君師)들을 차례로 등장시키는 것도 특이한데 태공망, 관중, 오기, 장량과 한신, 조조, 제갈공명 등 잘 알려진 인물들을 줄줄이 등장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등급을 매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당대의 장수들은 더 엄격하게 평가했다.
《이위공문대》에 흥미를 끄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고구려와 신라에 관한 이야기로서 책머리에 나온다. 태종이 물었다.
“고구려가 가끔 신라를 침략하고 있다. 사신을 보내 그만 두라고 권고해도 명령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토벌군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어떤가?”
이정이 대답한다.
“고구려 중신 개소문에게 슬쩍 속을 떠보니, 자신이야말로 용병의 달인이라고 생각하고 설마 토벌군을 보내지는 않겠지 하며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 부디 저에게 병력 삼 만만 주십시오. 꼭 그놈을 사로잡겠습니다.”그러나 태종은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멀리 원정가면 도대체 어떤 전략전술을 쓸 예정이냐?”고 물었다. 이정은 정병(正兵)을 쓸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태종은 또 이렇게 묻는다.
“몇 해 전 그대가 돌궐을 평정할 때는 기병(奇兵)을 쓴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병을 쓰겠다고 하니 그 까닭이 무언인가?”
이렇듯 둘은 병법의 중요한 개념이기도 한 기奇와 정正의 문제를 논의하고 태종은 그 개념을 이해하려고 했다.
싸움에서는 먼저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한데 《이위공문대》에서는 그러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적의 허실을 파악한다. 허는 적의 전력이 허술한 곳, 실은 전력이 충실한 곳을 뜻한다. 둘째, 적의 전력이 충실한 곳에서는 우리는 정으로 대응하고, 적의 전력이 허술한 곳에서는 기로 대응한다.
이 말을 태종은 이렇게 풀어서 말했다.
“기에서 정으로 바꾼다 함은 우리를 기라고 생각하고 쳐들어오는 상대방을 우리가 즉각 정으로 바꿔 맞아 싸우는 것을 말한다. 또 정에서 기로 바꾼다 함은 우리를 정이라고 생각하고 쳐들어오는 상대방을 우리가 즉각 기로 바꿔 맞아 싸우는 것을 말한다. 적의 세력을 항상 ‘허’로 만들고 아군의 세력을 늘 ‘실’로 하는 것이다.”
기원전 48년 여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로마 내전의 향방을 결정지을 일대 회전을 치른다. 회전에 투입된 양군 전력은 카이사르 진영은 80개 대대의 중무장 보병 2만 2,000명, 기병 1,000명 등 23,000명이었고, 폼페이우스 진영은 110개 대대의 중무장 보병 4만 5,000명, 기병 7,000명 등 54,000명이었다.
카이사르는 병력면에서 열세라는 것을 알고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두 가지 비밀작전을 생각한다. 하나는 경무장한 보병 400명을 1,000기의 기마병과 합쳐 만든 보병과 기병의 혼성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노련한 병사들만 뽑아 만든 별동대였다. 이들의 임무는 적 기병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적 기병에 밀리지 않는 배짱과 의지가 중요했다. 이런 비밀병기의 목적은 모두 적군의 기동성을 죽이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자 특수부대들은 적 기병 7,000명을 인간 울타리 속에 몰아넣어 무력화 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카이사르 진영이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금은 생뚱맞게 중국병법서 이야기에서 로마 전쟁이야기로 변했지만 동서양이라고 해서 싸우는 방법과 싸우는 이유, 싸움의 과정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경칠서의 대략을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제3부 「승자의 책략」인데, 여기서는‘만천과해(瞞天過海)로부터 주위상(走爲上)’까지 36가지 전술계책을 상세히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만천과해는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다’라는 것이고, 주위상은 흔히 ‘36계’라고 하는 것으로 싸우지 않고 줄행랑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상대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가?’를 묻는 〈전국책〉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뒤에 ‘붓다의 가르침과 현대의 기업경영’을 주제로 저자의 소견을 이야기했다.
여기까지 이 독후감을 읽었어도 상당히 길고 지루함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는 짧게 쓰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36계’의 마지막인 ‘주위상’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책략’이라는 것인데 ‘승산이 없을 때는 싸우지 말아야 한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는 장수를 필부의 용勇’이라고 부르며 중국인들은 경멸했다고 한다.
후퇴한다는 것은 이길 수는 없지만 패하지는 않으므로 큰 타격을 피할 수 있고 전투력을 보존하여 다음 전투에 대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보존한 병력으로 역전승을 거둘 기회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위상’으로 ‘히틀러와 처질, 항우와 유방, 조조와 유비의 싸움’을 예로 들었지만 여기서는 ‘항우와 유방’을 보자. “유방이 항우의 패권에 도전해 시작된 대결은 4년 가까이 이어진다. 그 기간 동안 항우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유방은 싸울 때마다 패해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유방은 결코 무리한 싸움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후퇴해 항우의 예봉을 피했다. 그렇지만 유방이 손 놓고 있은 것은 아니었다. 보급망 확보, 군사훈련 등 장기적 관점에서 준비하며 2∼3년을 버티는 동안 우위에 서게되고 결국 역전승을 거두었다.”유방이 승리한 것은 불리한 싸움을 피해 달아나는‘주위상’을 실천한 결과였다.
‘36계’에는 ‘줄행랑친다.’는‘주위상’외에도 여러 가지 계책들이 있는데 모두를 살피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는 줄인다. (김환태의 「인생을 사는 지혜 부하를 이끄는 지혜」에 보면 대략을 알 수 있다.)
- 독후감 고전-온고지신 참조 -
여기서부터는 「상대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전국책(戰國策)》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책策은 책략을 의미하므로 전국시대의 책략을 기록한 것으로 주로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소위 변설가들의 삶과 지략을 묶은 것인데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라는 학자가 궁중에 있던 장서 《국책》《국사(國事)》《단장(短長》등을 참고해 총 33권으로 묶은 것이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의표를 정확히 찌르는 것이다. 엉뚱한 이야기로 상대의 관심을 끈 다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이런 접근법은 특히 설득하기 어렵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상대를 만날 때 효과적이다. 이 장에는 이런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전국시대 위(衛)나라의 안라왕이 이웃 조(趙)나라를 치려고 했다. 이 때 위나라 중신이며 달변가인 계량(季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떻게든 전쟁은 막을 요량으로 왕께 면담을 요청하여 왕을 만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꺼낸다.
“제가 조금 전에 외국에서 돌아왔는데 오면서 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서 ‘초나라로 간다.’고 했습니다. ‘남쪽에 있는 초나라로 간다면서 왜 북으로 가느냐?’고 물으니 ‘말이 썩 잘 달린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말은 좋을지 모르나 길이 틀렸네.’라고 하자 그는 ‘여비도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 제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네는 길을 잘못 들었네.’하고 거듭 충고하니까 그는 ‘훌륭한 마부도 있네.’라고 답했습니다.
안라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솔깃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계랑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의 신뢰를 얻어 패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고 하십니다. 나라가 크고 군대가 강한 것을 믿고, 이웃나라를 치고 영토를 넓혀서 명성을 얻으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면 그만큼 패왕의 길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초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반대로 수레를 몰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안라왕은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하더니 조나라 침공계획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전국시대 지금의 북경 근처에 연(燕)나라가 있었다. 이웃 제나라가 침공해 와서 패했는데 연나라 소왕(昭王)은 어떻게든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패전의 치욕을 씻고 싶었다. 그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곽외(郭隗)라는 현자를 불러 물었다.
“우리의 내란을 틈타 공격해 온 제나라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 치욕을 씻고 싶지만 작은 나라의 비애고, 역부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재를 초빙해 그들의 협력으로 조상시대로 회복하기 위해 선생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곽외가 대답했다.
“제(齊)왕은 훌륭한 보좌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훌륭한 벗을, 패자는 훌륭한 부하를 갖고 있었지요. 그런데 나라를 망치는 임금은 시시한 부하에 둘러싸인 사람입니다, 인재를 모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방법은 다음의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를 다하여 상대방을 모시고 정중히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보다 100배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옵니다.
둘째,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의견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보다 10배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옵니다. 상대방을 대등하게 대하면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인간밖에 모이지 않고 또 걸상에 기대앉아서 지팡이를 잡고 곁눈질로 지시하면 말단의 벼슬아치들 밖에 모이지 않습니다. 또한 정신을 못 차리고 무조건 호통치고 호되게 꾸짖으면 하인 밖에는 모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재를 초빙할 때의 지침입니다.
이제부터 널리 나라 안의 인재를 가려 뽑아서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소문이 퍼지면 천하의 인재들이 너도 나도 몰려올 것입니다.”
곽외는 이어서 말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의 임금이 천금을 투자해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그런 말 한 마리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하고는 석 달이 지난 후에 마침내 준마를 찾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임금이 가서보니 말은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하는 이 죽은 말을 500금을 주고 샀다고 했습니다. 왕은 벌컥 화를 내며 큰 소리로 꾸짖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말이지 죽은 말이 아니야. 죽은 말을 500금이나 주고 사는 바보가 어디 있냐?’고 했습니다.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죽은 말이라 500금을 주고 샀습니다. 틀림없이 살아 있는 말이라면 더 비싸게 사줄 것이라는 소문이 날 겁니다. 이제 곧 좋은 말이 몰려올 겁니다.’
과연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왕은 천하의 준마를 세필이나 얻었다고 합니다.”
곽외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폐하께서 진심으로 인재를 모시고자 한다면 먼저 저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저 같은 사람도 귀하게 여긴다는 평판이 돌면 더 뛰어난 인물들이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몰려올 것입니다.”
소왕은 곽외를 최고 고문으로 영입하여 스승으로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그러자 과연 여러 나라에서 인재들이 몰려왔다. 그들의 협력을 받아 결국 제나라에 보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아무리 원대한 사업도 우선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얻을 것은 무엇인가인데, 붓다는 인간은 물론 모든 존재의 현실이 괴로움(苦)이고 그것의 원인은 집착(執)이며, 그 괴로움이 사라진(滅) 세계에 이르는 길(道)을 제시하고 이렇게 설한 근본 목적은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고통이 없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데”있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그러기 위해 고집멸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 싯다르타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 바로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개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오직 존귀하나니 삼개가 괴로움에 싸여 있으니 내 마땅히 안온하게 하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다음은 고집멸도에 관한 설화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말룽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 계시던 기원정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홀로 앉아 이렇게 생각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익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최후가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최후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가? 세존께선 이와 같은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나는 그 같은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 더 참을 수가 없다. 세존께서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그를 비난하고 떠나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말룽카는 해질 무렵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찾아 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혼자 생각한 일들을 말씀드리고 덧붙였다.
“세존께서는 저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 한결 같이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기탄없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물으셨다.
“말룽카야, 내가 이전에 너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따라 수행하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 밖의 의문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에 이것은 진실하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를 따라 도를 배우고 있느냐?”
“아닙니다.”
“말룽카야, 너는 참 어리석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너에게 말한 적이 없고 너도 내게 말한 적이 없는데 너는 어째서 부질없는 생각으로 나를 비방하려고 하느냐?”
말룽카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머리를 숙인 채 말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이때 부처님이 그 자리에 모인 비구들을 향해 말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에게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 못한 채 도중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에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소. 그리고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 화살이 뽕나무로 되어 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어 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된 것인지 대나무로 된 것인지 알아야겠다. 또 화살 깃은 매의 털로 되어 있는지 독수리 털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어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들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에 무한다하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고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며 또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한결 같이 말하는 법(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고)과 괴로움의 원인(집)과 괴로움의 소멸(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도)이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배워라.”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카를 비롯한 여러 비구들이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중아함》〈전유경〉 - 2020114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