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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감사로 살아야 하는 인생
겔 28:1-10
정남준의 ‘열린 생각 열린 공간’이란 책에 이런 시가 있다. “어린아이의 미소가 아름다운 건 그대 안에 동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맑은 아침햇살이 반가운 건 그대 안에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은 건 그대 안에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감사한 건 그대 안에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른다.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알기에 감사할 줄 안다. W. H. Beecher 씨는 ‘교만은 감사를 죽여 버린다. 교만한 자는 결코 자기가 소유할 만큼 소유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겸손과 감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반드시 꺾으신다는 사실이다. 아름답고 성숙한 인생은 감사하는 인생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될 때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된다. 고로 우리는 겸손과 감사로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본문에 나오는 두로는 에스겔서 기록 당시, 해상무역으로 부요한 나라였다. 세계사 속에 페니키아(성경/ 베니게)라는 도시로 유명한 곳이 바로 두로다. 현재 레바논에 티레(Tyre, 티르)가 두로와 같은 지명이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와 떨어져 맞은편 섬에 두로 성읍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쌓여 지금의 반도로 바뀌었다. 본래 이 둘을 합해서 두로라고 했으나 두로의 원래 중심 성읍은 섬에 있었다. 그렇기에 v2,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이라고 말한 것이다.
두로는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자 중심 무역항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지중해를 주름잡는 해상도시로 자리 잡았다. 백향목(삼나무)과 소나무, 아마포, 자수제품, 채색 도기, 소금, 등을 수출했고, 상아세공과 목각장식이 특산품이었고, 금세공사와 금속세공품도 널리 알려졌으며, 중계 무역에 탁월하여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의 꽃을 피운 역사적 상업도시이다. 두로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요해지자, 국방을 강화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 그런 두로는 농사하기에는 적합한 땅은 아니었기에 늘 양식을 이스라엘에서 수입해서 살았다.(행 12:20) 다윗 왕 시절에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목수와 석공들을 보내 다윗 왕궁을 짓는 데 협조했고(삼하 5:11), 솔로몬 왕 때에는 레바논 산에서 벌채한 백향목을 뗏목으로 지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 성전 건축을 도왔다.(왕상 5:10)
두로 섬에 지어진 성채는 거대한 배를 연상하게 했다. 약 30만평 넓이의 거대한 배였다. 그 배는 최고급 자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겔 27:3-7에서 묘사된다. “저 바다 어귀에 자리 잡고 해안 민족들과 무역하는 자야,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두로야, 너는 스스로 말하기를 너는 흠 없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4 네 경계선들이 바다의 한가운데 있고, 너를 만든 사람들이 너를 흠 없이 아름다운 배로 만들었다. 5 스닐 산의 잣나무로 네 옆구리의 모든 판자를 만들고, 레바논의 산에서 난 백향목으로 네 돛대를 만들었다. 6 바산의 상수리나무로 네 노를 만들었고, 키프로스 섬에서 가져 온 회양목에 상아로 장식하여, 네 갑판을 만들었다. 7 이집트에서 가져 온 수놓은 모시로 네 돛을 만들고, 그것으로 네 기를 삼았다. 엘리사 섬에서 가져 온 푸른색과 자주색 베는, 너의 차일이 되었다.” 한 마디로 최고급 자재로 배의 판재와 노와 돛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마치 타이타닉 호를 연상하게 하는 표현들이다.
이어서 선장과 선원 그리고 병사들까지 최고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두로의 중개무역 나라들과 물품에 대해 죽 나열하고 있다. 중개무역을 하는 나라가 인근의 모든 나라이고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은 매우 다양하고 풍성하다. 두로의 국토는 작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영화가 매우 컸던 이유는 지혜와 총명과 슬기로운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vv3-5a, “너는, 다니엘보다 더 슬기롭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것이라도 네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4 너는 지혜와 총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네 모든 창고에 금과 은을 쌓아 놓았다. 5 너는, 무역을 해도 큰 지혜를 가지고 하였으므로, 네 재산을 늘렸다.”
이렇게 장황하게 두로를 설명하는 이유는 이런 두로가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흔적도 별로 남지 않고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레바논은 국기에 백향목을 그려놓았지만, 그 유명한 백향목도 그 땅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어져 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옛 영화가 왜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며 교훈을 얻자.
1. 두로의 멸망은 교만이 원인이었다.
지중해를 중심한 강대국들의 교역의 중심이며 교통의 요충지로 주변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두로의 번영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 야욕을 부추겼다. 그러나 성경은 두로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지적한다.
vv1-8,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3 너는, 다니엘보다 더 슬기롭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것이라도 네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4 너는 지혜와 총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네 모든 창고에 금과 은을 쌓아 놓았다. 5 너는, 무역을 해도 큰 지혜를 가지고 하였으므로, 네 재산을 늘렸다. 그래서 네 재산 때문에 네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듯이 우쭐대니, 7 내가 이제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잔인한 외국 사람들을 데려다가, 너를 치게 하겠다. 그들이 칼을 빼서 네 지혜로 성취한 아름다운 상품을 파괴하고, 네 영화를 더럽힐 것이다. 8 그들이 너를 구덩이에 내던지면, 너는 맞아 죽는 사람처럼 바다 한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두로는 무역을 잘해서 돈 좀 벌었다고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며 우쭐대면서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았다고 자부했다. 그들이 슬기로운 것은 맞다. 하나님도 다니엘보다 슬기롭다고 인정하셨다. 지혜와 총명으로 재산을 모으고 큰 지혜로 무역을 해서 금과 은을 쌓아 놓았던 것이 맞다. 그런데 그만 그 재산 때문에 교만해진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런 영화로운 도시, 두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vv7-8, “내가 이제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잔인한 외국 사람들을 데려다가, 너를 치게 하겠다. 그들이 칼을 빼서 네 지혜로 성취한 아름다운 상품을 파괴하고, 네 영화를 더럽힐 것이다. 8 그들이 너를 구덩이에 내던지면, 너는 맞아 죽는 사람처럼 바다 한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러면서 멸망당하는 순간에도 교만할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이 짓궂게 질문하신다. vv9-10, “너를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네가 신이라고 네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사람들의 손에 찔려 죽을 것이다.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10 네가 외국 사람들의 손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과 같이 죽을 것이다. 내가 말하였기 때문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에 찔려서 죽는 게 신이 될 수 없다.
이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B.C.586년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때 함께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고 무역의 왕자 자리를 시돈에게 내주게 된다. 이후 잠시 회복되지만, 훗날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공격당한다. 이때 알렉산더는 길이 800m, 폭 60m의 방파제를 쌓아 7개월 동안 공격한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 두로를 함락시켰고, 2천여 명 지도자의 목을 자르고, 주민 3만 명을 노예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 로마제국에 의해 침략 당한다. 히람 왕이 세운 무역의 도시 두로. 그러나 오늘날 부의 상징이었던 옛 항구터는 사라지고 로마시대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두로의 히람 왕이 B.C. 10세기에 축조한 항구의 방파제가 수면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Philip Myer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알렉산더 대제의 공격은 두로가 멸망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공격 후 폐허가 된 두로는 조금 그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다시는 그 전과 같은 나라로 재건되지는 못했다. 한 때 크게 번창하였던 그 땅은 이제 바위의 표면처럼 썰렁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이 어부들이 그물을 펼쳐서 말리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돈 좀 잘 벌면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착각한다. 말 타고 비싼 차타고 자가용 비행기 타고 높은 빌딩 짓고 고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교만해져서 자신을 신처럼 생각한다. 많이 가진 자들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주변에 갖지 못한 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하면서 돈 가진 자 주위에 몰려들어 아첨한다. 요즘은 우리나라 유행어 중에 뭔가 잘하는 사람을 ~신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연예인들 이름 앞에 갓이란 단어를 붙여서 대세를 표현하는 언어로 쓰고 있다. 개그와 MC로 스타덤에 오른 유재석 씨를 유느님이라고 부른다. 운동 좀 잘하면 또 신, 황제, 갓~ 이런 단어를 붙인다. 호나우도,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 같은 선수를 축구의 신이라고 부르고, 펠레를 축구의 황제라고 부른다. 야구의 홈런타자 출신 양준혁 씨를 양신이라 부르고, 마이클 조던이나 허재 감독을 농구의 황제라 부른다.
어느 정신병원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는데, 그가 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하고 외쳐대는 거다. 같은 병동 안에 있는 다른 환자들이 매일 그 소리를 듣는 게 지겨워졌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방에 가서도 또 그 말을 외치니까, 그 방의 환자가 그러더란다.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일이 없다!”
역사를 보게 되면, 강대국들의 왕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세계를 정복하고 나면 꼭 따라오는 게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의 왕들이나 이집트의 바로 왕이나 로마의 시저 황제나 다 자신을 신격화하고서 지배하던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처럼 숭배하게 만들었다. 죄의 본능이 다름아닌 바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이다. 그런 생각은 인간을 교만의 극치로 몰아넣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 교만에서부터 강포와 폭력이 나오고 살인과 강간과 무자비한 권력 행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v16a,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너는 폭력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교만한 자와 강포한 자를 반드시 꺾으시고 심판하신다. vv16b-17, “그래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쫓아냈다. 너를 지키는 그룹이, 너를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추방시켰다. 너는 네 미모를 자랑하다가 마음이 교만하여졌고, 네 영화를 자랑하다가 지혜가 흐려졌다. 그래서 내가 너를 땅바닥에 쓰러뜨려 왕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멸하신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교만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그러니 어떤 권세는 정치권력과 술수를 이용해서 쟁취한 것일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권세를 잡은 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나라의 문재인 대통령도 그래야 한다. 저 미국의 트럼프나 일본의 아베도 그래야 한다. 겸손하게 통치하는 일을 하나님 대신 해야 한다. 그래서 선한 자를 포상하고 악한 자를 징벌하는 권선징악을 잘해야 한다. 그걸 거꾸로 하면 안 된다. 교만하여 거꾸로 행사할 때 하나님은 그를 치신다. 그게 꼭 일국의 권세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오늘 우리에게는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교만하면 사용하기를 중단하시고 겸손할 때까지 내리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만한 걸 못 견뎌하신다. 잠 16:5,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역겨워한다고까지 말하지 않나! 그래서 징계의 채찍을 드신다. 겸손하게 만든 다음에야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삶에도 시험이 있고 아픔이 있지 않나?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사랑한다면서 무엇 때문에 그런 시련을 주실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의 유력한 한 가지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고난을 만나면 속으로 ‘하나님이 아직 나를 더 만지실 부분이 있나 보네.’하며 자중한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겸손이고,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만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 않겠나?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교만에서 멀어지고 겸손으로 가게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수단이라도 쓰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려는 시도가 어찌 보면 우리에게 시험과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얘기다. 사도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장치였다.(고후 12:7) 건강 외에 무슨 장치들이 있을까? 물질, 사랑하는 가족, 인간관계 등을 겸손하게 하는 여러 장치로 사용하실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겸손할 때 나를 사용하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겸손을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장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려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 그런 장치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낮추겠습니다.” 그러고 아예 넙죽 엎드려서 겸손하게 사는 거다. 그러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서 쓰려고 준비한 장치가 다 필요 없게 된다. “네가 이제야 준비가 되었구나!” 하면서 바로 쓰신다.
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왕을 태운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멋지게 보였다. 국민들은 왕과 함께 그 나귀를 향해서도 갈채와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나귀는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다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귀에게 참수형이 내려지고 말았다.
이 어리석은 나귀처럼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영광을 받을 때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그것을 차지하려고 우쭐해서 뻐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것들이다. 영광을 가로채지 말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기 바란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벧전 5:5, “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겸손하게 인사할 줄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권위에 겸손하게 순종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에게 높임 받고 쓰임 받는 자가 된다.
3. 겸손한 자는 감사와 기도를 하며 산다.
어떤 시골에 사는 크리스천 농부가 대도시를 방문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농부는 십대로 보이는 불량배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음식이 나오자 그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불량배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어이, 농부 아저씨! 촌에서는 식사할 때 다들 기도를 하나보지?” 이때 늙은 농부가 대답했다. “다들 하는 건 아냐! 돼지들은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지.” 세끼 식사기도에서부터 감사가 시작된다.
여러분, 겸손한 자들에게 따르는 요소들이 무엇이 있을까? 감사가 따르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기도가 뜨른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믿지 않는 죄처럼 큰 교만의 죄가 없다. 날 낳으신 부모를 무시하거나 거역하는 죄처럼 배은망덕한 죄가 어디 있겠나! 크리소스톰 이란 초대교회 교부는 말하길 “사람의 근본적 죄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아담과 하와가 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굳이 따먹고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었을까? 그건 하나님이 베푸신 에덴동산과 아름다운 창조세계와 동식물과 풍부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의와 자유와 행복을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데서부터 시작된 거다. 마귀가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 3:1)하고 질문할 때,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는 불평이 생겼다. ‘아! 그렇구나! 우리에게 먹지 말라 금지하신 것도 있구나. 왜 금지하셨지?’ 그때 마귀가 “그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봐! 그러면 네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거야! 선악을 알게 될 거야!” 유혹하자 그만 원망이 생기고, 동시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일어났다. 하나님 없이 독립해서 내가 에덴동산의 왕으로 살아야겠다는 교만함이 결국 불순종의 죄에 빠지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고 말았다.
여러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조주는 창조주이시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다. 아무리 피조물이 잘나도 창조주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가 있고 돈을 많이 벌고 세상을 주름잡는다 할지라도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가 다 한 번 죽는 인생, 피조물, 아니 흙과 먼지에 불과한 인생이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 아닌가? 다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인 양 입고 차고 걸치고 살고 있는 거다. 다 주셨기에 누리고 쓰고 먹고 사용하고 즐기고 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겸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럴 때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롬 11:36)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하게 된다. 이럴 때 하나님에게 의존적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의 참된 행복이 찾아오게 된다. 부모를 거부하고 사는 자식처럼 황폐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여러분,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부인하며 사는 인생처럼 황량한 인생은 없다. 마치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사는 것과 같다.
만인의 연인이요 세계 남성의 우상처럼 군림했던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도 많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수백 통의 팬레터도 매일 받습니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미래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너무나도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마릴린 먼로는 1962년 어느 날 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 닫는 해수욕장과 같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세상의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내가 누리는 것 모두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 생명도, 내 건강도, 내 가정도, 내 물질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다윗왕은 성전건축을 위해 백성들과 함께 최선을 것을 드린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대상 29:11-14, “주님, 위대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와 존귀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의 머리 되신 분으로 높임을 받아 주십시오! 12 부와 존귀가 주님께로부터 나오고, 주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주님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니,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13 우리 하나님, 우리가 지금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합니다. 14 제가 무엇이며, 저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으므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님께 바쳤을 뿐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교만은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여전히 내가 주인으로 사는 데서 나타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서 주님으로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교만이 기도하지 않는 모습으로 왕왕 나타난다. 기도하지 않고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 아닌가! 기도하지 않고도 내 능력과 지혜로 사역할 수 있다는 생각 아닌가!
또한 주일에 예배하지 않고 일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그게 뜻하는 바는, 결국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과연 그런가?
또 영적 권위자에게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벧전 5:6,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목원들을 섬겨야 하고, 목원들은 목자에게, 목자들은 목사에게 순종해야 한다. 겸손과 순종, 그리고 교만과 불순종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귀영화를 누리던 두로의 멸망 원인은 교만이었다. 우리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자.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신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 수 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후반기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열매를 누리며 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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