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태도는 마치 ‘그리스도교 종파간 논쟁’을 상기시켜주는 듯 합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언가 행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의 4대 종파는 천주교(가톨릭),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동방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입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마르 9,39)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도록 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 교회에 다닌다니, 누가 성당에 다닌다니, 누가 어디에 다닌다니 하면서 분리와 분열을 조장하는 자세는
하느님의 마음이 아님을 역설하시는 것이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그리스도교 내 종파들과 함께 협업하는 교회 일치 운동'을 천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단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 개신교 안에서도 철저한 이단 구원파 교회,
대순진리교, 통일교, 에덴성회, 단월드 등입니다. 이 한반도 내에만 3,000여 개가 넘는 이단신흥종교가 있다고 합니다.
이단 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죄책감을 통해 세속적 부를 취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청년들을 꼬셔서
가족들을 그 종교로 이끌어야 하는 사명과 소명까지도 철저히 교육받기 때문에 온 가족이 넘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기에 영생을 얻기 위해 재산을 팔아 봉헌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구원을 받으리라.’
‘죄의 사슬에 묶인 이승에서의 삶을 일찍 마칠수록 너는 구원의 문턱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쇠뇌적 가르침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무서운 것은 그 사람의 명의를 모두 한 종교에 두고서 죽게 되면 보험금을 가져간다는 것이죠.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철저한 사기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나온 ‘사바하’라는 영화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제게 화두가 하나 있습니다. ‘이단종교, 무엇 때문에 철저한 쇠뇌로 무장되는가?’
어쩌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비참한 하루하루의 삶 안에서 나를 구원해준다면...’ 하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는 상태에서
이단종교의 속삭임은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본질적으로 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표징을 바라는 나약한 인간의 자화상이 신흥이단종교로 빠지게 하는 시발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이 땅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투신할 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은 오직 하느님께 유보되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안에서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구원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갖기 위하여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연구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며 기도와 선행으로 하느님과 이웃에게 순명하는 신앙인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표징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기를 청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