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의 내용은 99%가 팩트가 아니다. 그것은 요한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조하여 전달하기 위해서 매우 과장된 언어를 사용한다. 문자 그대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인데도 예수가 그를 살렸다? 예수가 있었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광신이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가 있기만 하면 늙어 가는 모든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부활시킨 사람들의 예들은 모두가 생생한 젊은이들의 경우이다. 나이들어 죽어가는 할배 할매들이 아니다. 당연히 이미 완전히 죽었던 사람을 부활시킨 예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은 나사로의 부활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도 나사로는 죽어신체를 가눌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을 수 있다. 그는 죽어가는 몹쓸 병에 걸려 격리되었을 것이며 아무런 기척도 없는 상태라 손 쓸 수가 없기 때문에 격리된 채 나흘 째되었고 그의 누이들은 그를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가운데 예수께서 돌아 오셨다. 예수는 나사로와 몹시 친했고, 가까이 지내던 터라, 만일 나사로가 살아 있다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서서 걸어 나올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과연 예수의 예상대로 큰 소리로 "나사로여 그대의 친구인 내가 왔노라"라고 외치자 나사로는 그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서 불편한 몸을 잊고 걸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은 죽어가는 암환자라도 그가 몹시 좋아하는 일이 그 앞에 전개될 때 순간적으로 그의 모든 고통을 잊고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같다. 하나의 예를 들면 암환자라도 그가 도박 중독자라면 그의 손에 자금이 쥐어 쥐고 가까운 곳에 도박장이 있다면 그 자금을 다 잃을 때까지 도박하는 동안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의 능력을 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사람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할 어떤 힘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를 바로 알고 하느님을 새롭게 파악해야 한다.
광신적 신앙이 해로운 이유는 이성과 균형을 잃고 맹목적으로 그들의 교리에만 집착하게 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원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광신적으로 빠지면 현실을 왜곡하고 타인과의 소통까지 막아버린다. 첫째, 광신적인 신앙은 타인을 배척하게 만든다. 자기 믿음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다 보니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기 쉽다. 결국 가족이나 친구,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고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둘째, 도덕적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원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할 신앙이지만, 광신적으로 변하면 비윤리적인 행동도 정당화하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종교적 광신이 전쟁, 박해, 차별의 원인이 된 사례가 많다. 셋째,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은 좋지만, 극단적으로 빠지면 현실적인 문제 해결보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개입만을 바라게 된다. 그러다 보면 노력해야 할 부분을 등한시하고, 문제를 방치한 채 신앙 만으로 해결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결국, 건강한 신앙은 이성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신앙은 희망을 향하여 삶을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삶 자체를 가두어 포로로 만드는 관념의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