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다른 팀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몇 년 전, LG와 롯데가 모처럼 가을야구에 도전할 때
<DTD> <내팀내> <촌논마라톤>같은 글이 야구커뮤마다 넘쳐났습니다.
실제로 LG와 롯데는 DTD를 시전하거나 촌놈마라톤같은 페이스로 다른 팀 팬들의 비웃음을 많이 샀죠.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는 문장이 들어간 LG관련 기사 10년치를 모아놓은 짤이 유행했고 (그런데 결국 안 달라졌다는 의미죠)
롯데는 4월과 5월에만 야구 잘한다며 "봄데"라고 놀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롯데는 여름만 되면 폭락했고요)
LG와 롯데가 특별히 바보 같은 팀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들이 다른 팀보다 야구단에 투자를 덜 하거나
2군 구장이 없거나, FA를 안 잡거나, 외국인을 못 뽑거나
아니면 연고지 유망주 씨가 말랐거나
아니면 감독이 특별히 무능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팀의 중심을 잡아줄 에이스급 선수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죠, 아닙니다.
LG와 롯데는 빅마켓 팀이고 (물론 롯데 팬들은 구단이 투자에 인색하다며 불만이 많습니다만)
LG는 구리에 챔피언스 파크, 롯데는 상동에 대규모의 2군 전용 연습장이 있었습니다
한화가 서산 구장을 짓기 훨씬 전에 그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죠
최근 몇 년 한화가 FA시장에서 큰손이었지만 그 전에는 롯데와 LG도 큰 손이었고
두 팀은 서울과 부산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아마야구 시장을 연고지로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롯데의 암흑기에는 손민한-이대호가 있었고
LG의 암흑기에도 박용택-이병규-봉중근 같은 선수들이 있었죠
주키치나 가르시아 같은 임팩트 있는 외국인 선수가 활약한 시즌도 많았고요
한화보다 훨씬 앞서 2군 연습장을 짓고
우리가 정근우-이용규를 '돈질'해서 사오기 훨씬 전에 이미 많은 FA를 영입하고
서울-부산 유망주들을 매년 1차지명으로 데려가면서
외국인 감독을 데려오는 등 숱한 노력을 해왔던 빅마켓 구단들도
암흑기를 벗어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수년만의 가을야구를 맛보기 직전에는
전반기에 좋은 성적을 올리다 후반기에 미끌어져 아깝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경험을 몇년 간 했고
꿈에 그리던 가을야구에 진출하고 그 다음에는
젊은 야수의 어이없는 실책과 믿었던 베테랑들의 자멸로 1~2경기만에 <광탈>했죠
저는, 앞으로 한화이글스의 앞날에도 그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해야 할 '불편한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산에 야구장 짓고 쳐스에 본격적으로 투자한지 이제 겨우 5년인데
다른 팀들은 그것보다 훨씬 전부터 퓨쳐스에 오랫동안 투자해왔고
최근 5년 사이에 기아 두산 같은 팀들은 2군 연습장을 더 늘렸습니다 (물론 우리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죠)
지난 몇 년 동안 FA 큰손 노릇을 했지만, 그런 과감한 현질을 다른 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고
우리가 모처럼의 전면드래프트로 얻은 하주석 유창식을 오매불망 물빨하며 기다리는 동안
서울-영남-호남 등 큰 시장을 가진 다른 팀들은 상대적으로 훌륭한 1차지명자들을 많이 데려가기도 했고요
우리가 하는 노력을 다른 팀들은 더 먼저 했고
우리가 노력하는 지금, 다른 팀들도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선수단의 두께> 차이가 생겼고
우리는 진작부터 그 두께를 조금씩 늘렸어야 했는데
지난 5년 동안 욕심 많은 나이든 감독들이 오히려 그 두께를 더 줄여버렸습니다
그나마 한 명은 카드를 몇개 만들어두기라도 했는데, 나머지 한명은 그것조차 못 했죠
그걸 겨우 바로잡기 시작한 것이 이제 막 1년을 넘은겁니다.
한화에도 좋은 선수들은 있습니다
김태균은 좋은 타자고 샘슨과 호잉은 훌륭한 외국인이며 김민우 김재영은 괜찮은 유망주죠
그러나 우리는 김태균 빠지니까 중심에서 쳐줄 선수가 없고
샘슨 혼자 잘 던져도 나머지 선발 순서가 모두 불안한 변수이며
호잉이 잘쳐도 그냥 1루로 내보내면 뒷타자가 해결을 못하죠
김민우 김재영의 퐁당퐁당 페이스가 '당'으로 떨어지면 대안이 없고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것
주력 선수들을 효율적으로 도와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을 좋게 할 선수들을 더 많이 만드는 것
그래서 3년이 지난 시점 즈음에는 강한 팀으로 한번 바꿔보라는 것
그것이 애초에 한용덕과 2018년 이글스 멤버들에게 주어진 숙제였습니다.
김재호 박건우 오재원이 센터에 버티고 있어서 두산이 강한 게 아니고
그 선수들이 죄다 없어도 류지혁 정진호 최주환이 있으니까 강한건데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게 지금의 숙제죠
전반기에 제법 승수를 많이 벌어둔 덕분에, 아직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남은 시즌 동안 더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선수들이 정신상태가 썩어 빠졌거나 겉멋이 들거나 집중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선수층이 얇아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거죠
LG나 롯데는 특별히 선수들의 정신무장이 덜 되어 있어서 그런 과정을 겪었을까요
다른 팀 선수들은 열심히 집중해서 야구하는데 그 팀들만 선수들이 맨날 놀러 다녔을까요?
그게 아니고, 체력이 부침을 겪기 시작하는 후반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카드가 부족해서 그런건데
한화이글스에게도 그런 위험이 충분히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니까 그런 변수를 제거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지금 팀을 강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눈앞에 보이던 2위가 자꾸 멀어지고
이러다 4등~5등으로 내려가는 것 아닐까 싶어 불안하고 초조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올 시즌 7등까지 추락하더라도 작년보다 오히려 성적이 좋아지는 겁니다.
<야구 못하던 팀이니까 못해도 된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요
남들도 오래 걸렸는데, 우리는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더 빨리 하는 건 쉽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겁니다.
한용덕 감독이 "팬분들이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강한 팀을 만들어보겠다"고 했죠.
지금까지의 행보를 볼 때
저는 그래도 우리 감독이 그라운드에서는 믿을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을 좀 더 가져보면 어떨까 합니다.
불안하겠지만, 좀 더 대범하게 마음을 먹고 말입니다.
적어도, 후배 투수 팔 갈아서 눈 앞의 1승과 맞바꾸는 사람은 아니고
본인 실수로 져놓고 자꾸 남탓만 하는 비겁한 리더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암흑기를 벗어나는 것이
그러니까 전력 약했던 팀이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기적같은 반전이
마치 도깨비 방망이에서 요술 아이템 나오듯이 <뿅>하고 나오지는 않을테니까 말입니다.
첫댓글 절~~~절이 동감하는 글입니다 ^^
저 역시 그러는 중 입니다...
어느 한순간 잘하게 되는게 아니라 서서히 단계를 밟아가며 잘해야 진짜 잘하는거고..
그래야 나중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구구절절 동감하게되는 글이네요.
작년에 2군 시설 확충에 대한 발표가있었고 올해 실제로 이행해서 100억을 투자해 구장한면과 실내연습시설을 확충했죠.(완공된 후에 직접가서 보고왔는데 굉장히 깔끔하게 잘 지어 놨습니다^^)
그럼으로인해서 이젠 서산에서 2군과 육성군이 동시에 경기를 할 수 있게되었고 훈련 시스템도 더 체계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멈추는게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2군 육성군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아야 우리가 두산같은 강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지만... 그래도 최소 5위는 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네요..
1선발님 글 읽고 다시 마음 잡아봅니다. 장기적인 강팀을 만들기위한 모든 것을 응원합니다.
비록 그것이 패배일지라도요.
하지만 적어도 올해 가을야구는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추락해서 가을야구도 못하면 선수들 사기가 훅 떨어질 것 같고, 가을야구를 경험하는게 내년, 그리고 후년 팀을 만들어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경험이라고 보고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3위로 많은 게임을 치뤄봤으면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원래 잘하던 팀이라면 한감독 이하 코칭스텝이 욕먹어도 되지만, 선발진도 외국인선수도 모두 바뀐 상태에서 이런성적은 잘하고 있는 겁니다.
마무리 투수를 무리시키지 않는 원칙을 잘 지키고 있고, 불펜투수들의 연투도 최소화하고 있으며, 2군에서 열심히 하는 선수들에게 1군의 기회를 주면서 리빌딩도 하고 있네요.
그 '두께'를 만들면서 이 성적이라면 참 잘하고 있는 겁니다.
동감합니다. 지난 두명의 노감독들의 근시안적인 선수단 운영때문에 우리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작년 이상군 감독대행과 한용덕 감독이 그 피해를 조금씩 줄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과 내후년에는 더욱 강한 한화가 되어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우리 분명 리빌딩도 어느정도 잘되고있고, 팀의 뎁쓰도 좋아지고 있는것 맞죠? (제발 맞다고 해주세요ㅠㅠ)
올해의 성적은 말그대로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정말 내년 이후부터가 걱정이라서요.
정말 시의적절한 글입니다.^^ 공감합니다.
팀을 일으켜 세우고 정비하는데 몇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정작 이글스의 감독님은 팀을 정비하고 가을야구로 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데 몇개월도 걸리지 않은것 같습니다
강한 팀을 만드는 조건중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감독다운 감독을 만나는 일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