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생애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공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묶기도 했는데,
'삼미'라는 아호는
어렸을 때 걸렸던 천연두의 흔적 때문에 눈썹이 세 개처럼 보여서 붙인 것이다.
다산은 뒤에 천연두와 홍역과 같은 전염병에 대한 치료에 관심이 많아,
홍역 치료에 대한 책인 <마과회통(麻科會通)>과
종두법에 대한 책인 〈종두심법요지(種痘深法要旨)〉를 쓰기도 했다.
그는 1776년에 혼인하여 6남 3녀를 얻었다.
다산은 매형인 이승훈(李承薰)과 가까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었다.
다산은 이승훈과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李家煥) 등과 교류하면서
실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성호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관료 생활 시기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
다산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 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당파싸움에 밀려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지방의 관리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복귀하여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지방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초기의 사회개혁론
다산은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기존의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의 개인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의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마을을 30가구 정도로 재편성한 다음,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향촌제도).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 (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균전론(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근대적 정치개혁 이념 제시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업과 상업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생각이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原政)〉·〈원목(原牧)〉이다.
여기에서 다산은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가장 먼저 이루어야 하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백성의 자유 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백성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백성은 자신들의 자유 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산의 주장은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었다.
유배생활 시기신유사옥과 강진 유배
다산은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당파싸움은 계속되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지방 정치의 부패와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지난 10월 14일과 15일에는 제37회 정약용문화제가 개최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생가와 묘소가 소재한
경기도 남양주시가 주최하는 행사다.
다산이란 호는 정약용의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이
차(茶) 재배지로 유명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그의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노자의 구절에서 따왔다.
2012년에 정약용은 탄생 25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수원 화성신도시 건설 지휘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문신이자 유학자였지만,
기술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관료생활을 시작한 1789년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설계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는 작업을 추진했으며,
상여가 한강을 안정적으로 건너기 위해서는 주교를 가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노량진과 용산을 잇는 주교는 30자 너비의 갑선(甲船) 60척을 나란히 붙여 놓은 후
그 위에 42자 길이의 종량(縱梁)을 배마다 5개씩 깔고
다시 그 위에다 길이 24자, 너비 1자, 두께 3치의 횡판(橫板) 1800장을 대는 식으로
건설됐다.
■
「 유학자론 드물게 과학에 관심
배다리·거중기·유형거 등 도안
인간의 특성을 기술에서 찾아
국가 기술연구소 설치 제안도
」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것은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려는 의도와 결부돼 있었다.
정조는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으며,
새로운 읍치에 ‘화성’이라는 일종의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1792년에 정조는 부친상 중이던 정약용에게
화성 공사를 위한 규제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약용은 화성 축조에 필요한 사항을 정리한 성설(城說)을 정조에게 올렸다.
이와 별도로 옹성(甕城)·현안(懸眼)·포루(砲樓)·누조(漏槽) 등에 관한 설계안도 마련했다.
화성 공사에 사용된 기술로는 거중기와 녹로가 자주 거론된다.
거중기와 녹로는 도르래 원리를 활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리는 기구에 해당한다.
녹로는 왕릉을 조영할 때 관을 내리는 용도로 이미 사용됐던 반면,
거중기는 정약용이 화성 건설에 활용하기 위해 새롭게 선보인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거중기를 개발할 때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조했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거중기 제작에 드는 철과 구리의 사용을 최대한 줄였으며,
기기도설의 많은 조항 중에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기본 원리가 되는 부분에 집중했다.
다목적 첨단 수레, 유형거 개발
그러나 녹로와 거중기가 화성 공사에 그리 크게 기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녹로는 2대,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녹로의 높이는 10m가 넘었던 반면 거중기의 높이는 약 3.8m였다.
녹로는 화성의 성벽을 쌓을 때,
거중기는 채석된 돌을 들어 올릴 때 사용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약용의 독창성이 더욱 잘 드러난 발명품으로는 유형거(遊衡車)를 들 수 있다.
유형거는 ‘흔들거리는 거울과 같은 수레’라는 뜻으로, 화성 공사에서 11대가 사용되었다.
유형거는 돌을 적재하는 기능과 돌을 나르는 기능을 동시에 지닌
다목적 운반 차량에 해당한다.
돌을 적재하는 과정에는 지렛대의 원리가 적용되었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쾌하게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정약용은 1800년에 정조가 서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고,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강진유배에 처했다.
무려 18년 동안 강진유배 생활을 하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이용감(利用監)을 신설해
기술을 도입·보급하고 기술자를 양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용감은 ‘이용후생을 지원하는 관청’이란 의미다.
오늘날로 치면 정부가 운영하는 과학기술연구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도 박지원과 박제가가 외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로운 국가기관의 설치와 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사람은
정약용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다.
정약용은 이용감의 직제로 차관급 1명, 국장급 2명, 과장급 4명 등을 제시하면서
그 자격 요건으로 과학·외국어·손재주·안목 등을 들었다.
기술을 활용하는 절차로는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감에서 시험한 후
각 분야의 전문 관청으로 전달하고 필요한 백성에게 보급하는 3단계 방식을 제안했다.
전문 관청의 목록에는
기와와 벽돌을 담당하는 견와서, 수레 제작을 위한 전궤사,
선박 제작을 위한 전함사, 화폐와 병기를 담당하는 전환서,
방직 기술의 향상을 위한 직염국, 제지 기술을 담당하는 조지서 등이 포함돼 있었다.
문·이과 경계 넘나든 통섭형 인재
정약용은 뛰어난 기술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기예론(技藝論)’이란 단편에서 인간과 금수의 차이를
삼강오륜과 같은 윤리에서 찾지 않고 기술에 주목했다.
또한 인간 생활의 혜택이 모두 성인의 덕택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대중들의 집단적 활동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시대가 지날수록 기술이 발전한다는 진보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상고사상(常古思想)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기예론은 기술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고찰한 우리나라 최초의 집필로 평가된다.
정약용은 발명가 겸 기술정책가·기술사상가로서 기술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사실상 그의 세계에는 문과와 이과가 모두 녹아 있었다.
정약용은 요즘에 많이 거론되는 통섭이나 융합의 대가였던 셈이다.
아마도 그는 ‘문과라서’ 혹은 ‘이과라서’라는 변명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의 사상이 심오한 이유는 그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파야 깊이 팔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