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6일(금)
* 시작 기도
주님...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셨습니다.
나아가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입니다.
한 마디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주저앉지 말고 서 있으라는 것이지요(엡 6:13).
하지만 이 못난 종은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주저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찌 보면 그런 모습이 나의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나를 아주 버려두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신 주님은 십자가로 건져주셨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세상의 술에 취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에 취한 자 곧 성령으로 충만한 자로 살기 원합니다.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가 되어 거룩한 불구자로 이 하루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3:27-35
제목 : 주님이 베푸신 이종(異種)사랑의 은혜로...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
* 나의 묵상
인간의 완악함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웃을 도와주는 일조차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나 없나를 따져보기 때문이다.
충분히 베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색하다.
그러나 안면이 있고 그를 개인적으로 알면 도움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성격상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베풀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때로는 내미는 손이 너무 많을 경우 고민이 되기도 한다.
옛날 김해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이다.
잘 알지 못하는 장애인 단체들에서 무차별적으로 도와 달라고 요청을 하거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물건을 보내고 비싼 값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런 경우 처음에 거절하면 연락이 더 이상 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한 번 도움을 주면 매번 요청을 하는 경우를 본다.
그래서 사실, 도움을 주기가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주님은 갚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 대접하지 말고, 오히려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 대접하라고 하셨다.
(눅 14:12-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이런 문제에 관한 한 사실 내적 갈등이 많다.
당시에는 교회마다 걸인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세상 살기가 팍팍하고 힘이 드니까 일을 하기보다 돌아다니면서 구걸하여 얻은 돈으로 술을 사먹는 것으로 소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이런 사람들은 도와준 사람에게 갚아줄 리는 만무하나 이들을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
교회가 잘 준다고 소문이 나면 한 번에 수 십 명씩 몰려드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제인지는 정말 고민해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점은 ‘이종(異種) 사랑’이다.
이종 사랑의 반대말은 ‘동종(同種) 사랑’으로서 이는 나와 비슷한 사람, 즉 나와 다른 사람을 나와 비슷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자녀들의 경우 부모의 말을 안 듣고 불순종하면 사랑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가까이 다가올 때 사랑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동종 사랑의 전형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종 사랑을 하셨다.
사람이 강아지를 사랑할 수는 있으나 강아지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이종 사랑의 전형을 실천하신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끼리끼리, 즉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사귄다.
세상의 모임이 그렇고, 결혼이 그렇고, 동호회가 그렇고,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마음에 맞는 사람이나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이종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동종 사랑을 하면서도 가끔씩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이종 사랑이 아니라 ‘동정’인 것이다.
직접적인 이종 사랑은 이처럼 나와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간접적인 이종 사랑도 말하고 있다.
이웃이 내 곁에서 평안히 살 때에 그를 해하지 말고 또한 다투지 말라고 권면한다(29-30).
그가 잘 되거나 못 되거나를 막론하고 그를 음해하거나 험담을 늘어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결국 그를 해하는 것이 되고 또한 다툼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되 주 안에서 항상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믿는 자의 본분이다.
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심판 받아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나 그런 나를 아들의 생명으로 살려 주셨다.
그런 사랑을 받은 나는 마땅히 그 아들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질 못하였다.
나누어 준다고 하면서도 받을 것을 먼저 생각하였고 이 사람이 나와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지를 따지곤 하였다.
내가 그와 같이 조건적 사랑(?)을 나눌 때조차 주님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지옥에서 날 건져주신 그 은혜는 무엇으로 견줄 수 있겠는가?
창세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셔서 태어나게 하시고 다시금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주님은 아들이시라도 창세전부터 아버지께 복종함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다.
그런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도 온전히 아버지께 복종하여 사랑 안에 거하는 복종과 사랑의 존재양식으로 사셨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언약이 깨졌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과 횃불언약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으로 아브라함이나 그의 자손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의미로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다.
(시 105:9-10)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하나님은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입애굽과 출애굽을 단행하셨으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각론적인 언약, 즉 시내산 언약, 모압 언약, 세겜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들의 불의함으로 그 언약들이 모두 파기되고 말았다.
사람은 불의하나 하나님은 불의하실 수 없으시기에(롬 9:14)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인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언약이 바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새 언약’이다(렘 31:31-34).
그 후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세우시면서 성취하셨다.
(눅 22:20).....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자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
또한 뭇별과 같이 자손을 주신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특히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날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이를 믿는 자를 십자가로 인도하여 영생을 얻게 하시마고 약속하신 주님은 아버지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 삼아 주셨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나는 셀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았던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을 지키시고자 짐승이 쪼개어짐 같이 또한 아들을 십자가에 걸어서 쪼개시고 날 자녀 삼아 주심은 그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시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이종 사랑은 나로 하여금 이종 사랑을 행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믿는 자들이 무엇으로 구별될 수 있겠는가?
주님의 이종 사랑으로 나도 살므로 오늘도 주님의 이종 사랑을 살아내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와 비슷한 자들에게 동종사랑을 행하는 자로 살 뿐, 이종사랑을 행하지 못한다.
이는 내 안에 아담의 본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빈 손 들고 십자가의 은혜를 붙든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요, 무엇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입니다.
그런 나를 신실하신 창세전 언약 안에서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또한 자녀 삼아 주셨나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은 나는 여전히 죄를 먹고 마시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주의 것이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땅의 복을 받았나이다.
그래서 지금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영생을 맛보며 누리는 삶을 살기 원하오니 날마다 주의 말씀 안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오늘 주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주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임을 아오니 이 시간 주님과 영광을 보는 은혜를 누리나이다.
이종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원히 고아가 되었을 터이나 이제 주의 자녀가 되어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갖게 됨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은혜가 내게 너무 크도소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