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금요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의 모든 일정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의 바다로 힘차게 나아가지 못하고
찰싹이는 작은 파도 같이 부딪치고 판단하는 마음으로 머뭇거립니다.
저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우선을 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기의와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옵소서.
진리의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28.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29.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
30.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31.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
(본문 주해)
오늘 본문은 지혜를 간직한 사람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27~31절 : “도움을 청하는 손을 뿌리치지 말고 도와줄 힘만 있으면 망설이지 마라.
있으면서도 "내일 줄 테니 다시 오게." 하며 이웃을 돌려보내지 마라.
너를 믿고 사는 이웃은 해칠 생각을 아예 마라.
너를 해치지도 않는 사람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
사기치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그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마라.”(공동번역)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도 때가 있다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은 ‘여유가 있거든’ 혹은 ‘남는 돈이 있거든’의 뜻이 아니라, 도움을 줄 작은 힘이라도 있으면 도우라는 것이다.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는 망설이지 말고 즉시 도우라는 말씀이다.
‘마땅히 받을 자’란 율법에 의하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이다. 그리고 기업이 없는 레위인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긍휼을 베푸심으로 구원하여 약속의 땅에 들여놓았으니, 이제 그들을 돌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잊지 않게 하시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27~28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시기질투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웃과의 사이에 화평을 도모하며 살라는 말씀을 하신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평이 일어난 사람이라면 남을 해하려고 할 이유가 없다.(29~30절)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따르지 말아라.”(31절, 새번역)
누가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겠는가? 그런데도 이 말씀이 있는 것은 그들의 포악함이 세상의 형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 37편 전체를 통해 악인의 결국이 잘 나타나듯이,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37:2)
32~35절 : “참으로 주님은 역겨운 일을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과는 늘 사귐을 가지신다.
주님은 악한 사람의 집에는 저주를 내리시지만, 의로운 사람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려 주신다.
진실로 주님은, 조롱하는 사람을 비웃으시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새번역)
패역한 자와 정직한 자(32절), 악인과 의인(33절), 거만한 자와 겸손한 자(34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35절)를 대비시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릴 복과 은혜가 대조됨을 보여준다.
(나의 묵상)
오늘 본문도 의인과 악인의 삶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런 본문을 보면 자신을 항상 ‘선한 일을 하는 의인’에 두고 보는 것이 나의 습관이다.
그래서 잘한 일에 고개를 끄덕이며, 못한 일에는 다시 한번 결심(말이 결심이지, 그냥 슬쩍 넘어갈 때가 많다.)하는 정도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 악인들, 소위 본문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인물들이 하는 일만을 한번 모아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다 내가 하는 짓이라는 사실이다.
첫째, 마땅히 도와야 할 자에게 인색하게 군다.(27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과 재능과 시간인데 마치 내 것인 양 내 생각대로 결정한다.
둘째,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한다.
즉시 베풀지 못하고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움켜지고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포기해야 할 영역들이 있어야 하는데, 내 것에 대한 포기가 없으니 늘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이웃을 해하려 하고 다툰다.
‘나는 이웃을 해하려고 한 적이 없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저 시기 질투를 내고, 그에 대한 험담을 들으면 기분이 괜찮고, 쑥덕거리는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는 것이다.(29~30절)
넷째, 폭력을 휘두르고 사기치는 자들에게 혀를 끌끌 차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진 세상적 형통에 대한 미움은 없다.
내가 하는 이런 짓들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고, 저주받을 일이며, 수치가 되는 일이거늘, 언제나 유야무야 넘어간 것이다.
그러고도 나는 주님과 교제하는 자라 말하였고, 복 받은 자라 내세웠고, 은혜 가운데 산다고 말하였고, 주님을 나의 기업이라고 자랑하였던 것이다.
어제 서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들었다.
전적으로 아멘이 되었다.
영문 밖에서 치욕을 당하신 주님께로 나아감은 나의 치욕을 받는 것, 십자가에 연합되어 사는 승리의 삶이거늘, 삶의 현장에서 아무런 빛을 주지 못하는 무능력의 사람으로 주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자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내가 묵상의 자리에 앉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심히 두렵고 떨리는 것임과, 그래서 야고보 장로가 그렇게 행함을 강조하였구나 생각해 본다.
“나의 모든 행실을 주여 기억하지 마시고......”
이 악인이, 이 포악한 자가, 패역한 자가, 이 거만한 자가, 이 미련한 자가 오늘도 어찌할 줄을 몰라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주님의 보혈만을 의지합니다.
(묵상 기도)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 행한 것 죄뿐임을 고백합니다.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재빠르고도 은밀한 죄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의인으로 세상에 보내시지만 악인에게 오염되고,
정직한 자로 보내시지만 교만한 자에 오염되고,
겸손한 자로 보내시지만 거만한 자에 오염되고,
지혜로운 자로 보내시지만 미련한 자로 오염되어 행하니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시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립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그 같은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존재이오니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에 연합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