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궤도’, 이 특이한 밴드 이름은
스무 살 음악청년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담은 야망과 의지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무한궤도는 산업혁명기
영국인 리처드 에지워스의 발명품으로 탱크나 불도저를 움직이는 캐터필러를 말한다. 즉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속적인 궤도를 연결하는 장치를 지칭한다. 무한궤도를 음악적 첫걸음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채택한 이유에
관해 그가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네이밍에서 표명하려고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드는 밴드는 앞바퀴와 뒷바퀴, 그리고 가운데의 작은 바퀴들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하모니를 일구어낼 것이며, 땅이 울퉁불퉁하거나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고랑이 패어 있다고 해도 불굴의 의지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
…
2. 넥스트
무한궤도 1집에 성공을 했지만, 1집으로 팀은 해체되었단다.
아무래도 신해철 1명의 대한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
아무튼 신해철은 솔로로 데뷔하면서 연이어
히트 앨범을 내면서,
특급 스타 반열에 오르게 돼…
그렇게 솔로로 성공했다면 성공과 돈맛에
계속 솔로를 했겠지만,
신해철의 피는 밴드를 위한 피였어.
=========================================
(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
…
그는 다시 밴드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밴드가 아닌, 밴드 구성원 모두의 밴드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
아빠도 넥스트 1집을 사서 정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본가에 아직 그 CD가 있을 것 같은데,
다음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신해철의 꿈과 달리 그룹 활동의 한계도
있었어.
밴드 구성의 완벽체인 4명의 멤버로 구성이 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신해철의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은
어쩔 수 없었어.
넥스트는 4개의 앨범으로 활동을 접는단다.
그 넥스트에 평가를 강헌은 이렇게 했어.
=========================================
(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
그는 넥스트 활동을 접고 해외 유학을
떠나게 돼.
그리고 외국에서도 계속 실험적인 음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사랑과 투자를 멈추지 않아.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어.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신해철은
솔로 활동, 넥스트 활동을 다시 재개하면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단다.
삶을 마감하던 그 해에도 컴백 앨범을
발표했는데,
A.D.D.A라는 곡을 듣고 역시 신해철이라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가 그렇게 쉽게 가버릴 줄… 정말 슬프더구나.
3. 87학번
…
신해철.
그는 가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부조한 시스템에 대해서도
논리 정연한 말로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존경스러운 논객이기도
했어.
신해철은 87학번이야.
우리나라 1987년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면
국가와 사회문제에 눈을 뜰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그가 박노해 시인의 헌정 앨범에도
참여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구나.
========================================
(26~27)
신해철은 짧다면 짧은 생애 내내 롤러코스터 같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스스로 확고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그 원칙은
그가 음악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추구한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한다. 신해철은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같은 위악의 페르소나를 유쾌하게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언제나 본능적으로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더듬이를 지녔다. 나는 그와 세 개의 트리뷰트(tribute, 헌정) 작업을 같이했다. 2001년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200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2년 노무현 추모 앨범과 공연. 그중에서 사회적 반향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했지만,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작업은 한국 문화사에 노동자 문학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 음반 프로젝트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자 문학도였던 나와 내 동년배 사람들에게 <노동의 새벽>은 시인이자 혁명가를 자처한 박노해에 대한 입장 차이와 관계없이 충격적인 의미를 담은 예술적 사건이다. 나는 이 시집이 (출간되고 20년을
지나는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이유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노동의 새벽>은
단일 시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진 시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4년 봄, 사상 최초로 시집 헌정 음반을 기획했다. 하지만 제작비도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프로듀서가 없었다. 나는 2000년대라는 새로운 흐름에서 그저 ‘운동권 가요’의 동어반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음악적 감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부여하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