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받거나 구치소 또는 교도소에 수감되면 누구라도 한없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대기업 총수를 비롯한 기업인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고 보면 된다. 이유야 어떠하든 사회와 단절돼 작은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불안감에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거친 사람들, 열악한 환경과 싸워야 한다는 공포가 ‘삼각파도’처럼 엄습해서다.
설령 다른 수감자와 떨어져 독방에 수용된다 하더라도 일반 재소자들보다 적응하는데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하찮은 일조차 주변의 조력을 받아 생활해왔던 터라 그렇다.
그래서 대기업 총수 등 사회 고위층의 형사사건을 많이 대리하는 한 대형 로펌(법무법인)에선 전직 교도소장을 고문으로 위촉했다고 한다. 교정당국 관계자들을 인맥으로 잘 활용해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VIP 클라이언트’들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제공해보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이런 세심한 외부의 배려도 수감된 기업인에겐 별무소용인 경우가 많다. 때로는 심리적 불안 단계를 넘어 신경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
배임 등의 혐의로 병원과 구치소를 오가며 재판을 받아오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승연 한화 회장도 그 중 한 명이다. 김 회장은 극적인 파기환송심을 통해 세상에 다시 나오기 직전까지 ‘섬망( delirium )’ 증세에 시달렸다.
섬망 증세는 얼핏 치매와 비슷하다고 한다 .사람을 잘 못 알아본다거나 혼동하는가 하면 갑자기 괴성을 지르는 등 과잉행동을 보인다.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는 증상도 흔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뇌수술 등 외과적인 문제로도 나타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감도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김 회장에겐 극도의 불안감이 원인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김 회장은 수감 대신 치료받는 조건으로 옮겨진 병원에서 신경 안정제로 버텼다. 치료 과정의 대부분을 말 그대로 ‘비몽사몽’한 상태로 지내왔음은 물론이다. 다만 치료가 쉽지 않은 치매와 달리 원인을 제공한 요인이 사라지면 서서히 사라지는 심리 질환이다.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인 최태원 SK 회장은 성경책을 읽으며 마음수련을 하고 있다. 면회를 간 지인들에 따르면 염색을 못해 백발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한다. 그룹 관계자는 “때만 되면 흘러나오는 기업인 가석방이 번번히 좌절돼 일종의 ‘희망고문’까지 받아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평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구속 집행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CJ 이재현 회장은 훨씬 더 심각하다. 우울증은 물론 유전병이 악화되는 와중에 이식 받은 신장마저 제 기능을 못해 말 그대로 ‘한계 상황’까지 몰린 형국이다. 그가 앓고 있는 유전병은 샤르코마리투스증후군( Charcot Marie Tooth disease, CMT)이다.
발음도 어려운 이 생소한 유전병은 신경을 구성하는 유전자가 변이돼 장애를 일으킨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손발의 근육이 사라진다. 그래서 병이 심각해지면 걷기는커녕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CJ 관계자는 “이 병이 진행되면 될수록 마치 전족한 발처럼 발바닥 가운데가 위쪽으로 굽게 된다.발을 아예 딛기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천형(天刑)‘같은 병”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족은 여성의 발을 천 등으로 꽁꽁 묶어 기형적으로 아기발처럼 작게 만드는 중국의 오랜 풍습으로, 북송 시대 이후 전해져 내려왔으며 당·청 시대에 가장 성행했다고 한다.)
이재현 회장의 친누나인 이미경 부회장도 같은 유전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그 역시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이 회장은 만성 신부전증으로 재판 초기 신장 이식까지 받았다. 당초 자신의 아들의 신장을 기부 받기로 이야기가 오갔지만 “아비로서 차마 할 짓이 아니다”며 고사한 끝에 부인의 신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궁합이 잘 맞지 않는 듯하다. 계속되는 이식 장기의 거부 반응으로 면역억제제를 끝없이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면역 억제제는 말 그대로 면역을 죽이는 치료제다.
그런데 알다시피 면역이 약해지면 평소 아무것도 아닌 병균·세균 조차 치명적인 위협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급기야 이 회장은 지난해 말 우리나라에선 거의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진 홍역에 걸려 위중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사법당국은 아픈 기업인들에게 이전과 달리 좀처럼 관용을 베풀지 않고 있다.
사실 과거엔 법정에 서는 기업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외 없이 환자복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병원용 이동 간이침대에 누워 출두하곤 했다.
건강상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 재판정의 동정표를 얻으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되레 ‘감표’ 요인이다. 구속된 기업 총수를 수발한 경험이 있는 기업 관계자는 “요즘엔 건강상의 문제로 병보석은 물론 구속 집행정지를 요청하려 해도 변호사측 의사는 물론 검사측 의사, 판사측 의사가 각자 따로 나와 ‘환자’상태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일 정도로 까다로워졌다”고 말했다.
대기업 기업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저변에 깔려있지만 몸이 성치 않거나 아픈 기업인이라도 ‘거칠게’ 다루도록 만든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여대생 청부 살인 혐의로 수감돼 있던 제분업체 총수 부인의 병원 이탈 사건이다.
지병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수감생활 대신 병원치료를 받고 있던 문제의 ‘여사님’이 의사들로부터 허위 진단서를 발급받아 호텔 드나들 듯 자유롭게 외출하다 적발돼 꾀병이 들통이 났다. 이 사건은 병보석은 물론 건강 문제로 형을 감면 받으려는 이전의 관행을 일순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기업인들에 대한 기계적인 무관용에 대해선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총수가 없어 투자도, 경영도 안 된다는 해당 기업들의 상투적인 ‘총수 부재 위기론’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 죄 값을 치르는 것 못지 않게 지병 등 신체적으로 고통 받는 그들은 재벌총수나 기업인을 떠나 그저 병들어 나약해진 인간일 뿐이라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다.
대기업 회장이라도 편견을 갖지 말고 피고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법치주의,일벌백계도 좋지만 여론에 휘둘리는 '재판 고문'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가장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