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비오(오상의) 신부 (9.23)◀
1.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인명: 비오(오상의)(Pius)
축일: 9월 2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활동지역: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활동연도: 1887-196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 T♧♧♧♧ T♧♧♧♧
성인설명 :
•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동부의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에 속한 피에트렐치나에서 아버지 그라초 포르조네(Grazio Forgione)와 어머니 마리아 주셉파(Maria Giuseppa Forgione)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 다음날인 26일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매일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와 묵상을 즐겨하였다.
10살 때에 그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부모에게 말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신학교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
12살 때 첫 고해와 첫영성체를 한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의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903년 1월 6일 16세의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조네는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같은 해 1월 22일 수련복과 함께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에 종신 서원을 하였고, 1910년 8월 10일 23세의 나이로 베네벤토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五傷, stigma)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 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 동안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 6일 군에 소집되어 1918년 수도원에 복귀하기까지 성 비오 신부는 1년 혹은 6개월의 병가를 여러 차례 받았으며,
1918년 3월 16일 기관지염 때문에 군복무 불능 판정을 받고 3월 18일 산조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 복귀하였다.
· 성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이 찍힌 것을 알게 되었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은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달이 지나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거나 덧나지도 않는 오상의 고통을 50년 동안 겪게 되었다.
그가 오상을 받았다는 소문은 급속히 퍼져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성 비오 신부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하였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다.
· 격리된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집전과 기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하여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성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이다.
ㅡㅡ※ㅡTㅡ※ㅡㅡ
2.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1회) >
...... (안젤라 | 2009.09.20 Ud.)
▷ 축일:9월23일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
- San Pio da Pietrelcina (Francesco Forgione)
- BLESSED PIO FORGIONE (Padre Pio)
CAPUCHIN PRIEST
Pietralcina, Benevento, 25 maggio 1887 - San Giovanni Rotondo, Foggia, 23 settembre 1968
- Venerable:18 December 1997 by Pope John Paul II
- Beatified :2 May 1999 by Pope John Paul II
- Canonized :16 June 2002 by Pope John Paul II at Rome, Italy
- Pio=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devout person, religious, pietoso
▷ 성프란치스꼬의 거룩한 상흔 축일: 9월17일. 게시판1369번.
San Francesco d’Assisi, Impressione delle Stimmate
•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사건은
육화와 수난을 통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정확히 알려준 사건이며
동시에 성 프란치스코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극치를 이룬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그리스도화를 가능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 성인의 일생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 것이다.
성프란치스꼬는 오상을 받음으로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된다.
*성프란치스꼬의 거룩한 상흔 축일: 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성 비오 사제는 1887년에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한 뒤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겼으며,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며 살았다고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6월 16일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1887-1968)
• 카푸친의 최근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1887-1968)는 1903년에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평생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오가 1918년에 경당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 하는 동안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오상은 팔과 손과 옆구리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을 사랑한 비오는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남은 일생을 보냈다.
매일 미사를 드리신 다음 수시간 동안 고해 성사를 죄인들에게 주고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었다.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건강에도 관심을 많이 쓴 성 비오는
산 죠바니 로톤도에서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현대적인 병원을 세웠다.
널리 인기를 얻은 비오 형제는 항상 기도하는 가난한 형제로 남고 싶어했다.
그리고 1948년에 평화와 교황님의 지향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모임도 조직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형제적인 덕담과 영성 지도를 주었다.
기적과 거룩함, 인정과 유머감각에 가득찬 생활 끝에 비오 형제는 1968년에 죽음 자매를 만났고
2002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의 시성을 거행하셨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 오상의 비오 신부님
1. 2002년 6월 16일,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년)이 시성되셨다.
내겐 지나칠 수 없는 날이었고, 1999년 5월 2일 시복식에 이어 3년 만에 찾아온 기쁨의 날이었다.
1987년에 처음으로 "마리아"지에서 비오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리 시대에 이토록 놀라운 분이 사셨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토록 놀라운 분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접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출신의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 23일에 81세로,
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산조반니 로톤도(S.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서 돌아가셨다.
비오 신부님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서
반세기 동안 어떠한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五傷)을 지니고 사셨다.
손바닥에 난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에서, 그리고 발과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 수많은 기적적인 병치유가 이 수도사제의 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언, 신비한 향내,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공중 부상 등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증언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었던 소녀 젬마 양이 보게 된 것이라든지,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실명한 오른쪽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조반니 사비노의 기적적 치유는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2.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어려운 여행에도 아랑곳없이 비오 신부님을 뵙고자 산조반니 로톤도를 찾아온 것은,
단지 기적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근본적으로 영성적 동기 때문에 비오 신부님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 내 개인적으로도 그분을 찾는 첫번째 이유는
그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단순히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거하였다.
☞ 그러하기에 역대 교황님들도 큰 사랑으로 비오 신부님을 대하셨는데,
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했는데,
그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같은 증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3.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 명의 여자와 만 명의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사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며칠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
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적어도 편안하고 친절한 만남은 아니었다.
☞ 비오 신부님은 신중하지 않은 이에게는 엄격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대개는 몇 달 또는 며칠 뒤에 되돌아와 진정으로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보았고,
그로 인하여 삶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 이러한 영성 지도에서 그분의 모든 위대함이 드러나는데,
그는 독특한 지도 방법과 영혼들의 고뇌에 그 자신이 함께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
다음의 말씀이 그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4. 또한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반 정도 집전하는 미사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그의 영성의 절정이었다.
밤 1시부터 사람들은 성당 문이 열릴 때까지 서서 기도하며 기다린다.
멀리서 온 그들은 하룻밤을 설치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비오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성당 문이 열리면 성당은 이내 신자들로 꽉 차고,
신부님의 열정 어린 미사는 때론 두 세 시간씩 계속되곤 하였다.
☞ 비오 신부님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여있었고,
"왜요?"라는 물음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는 미사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에 떨어지곤 하였는데,
온몸으로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에 대한 그분의 열정은 다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은 태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성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대 건너편에는 자주,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 제가 하느님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하며 회개하곤 했다.
5. 비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긴 소송은 1969년에 시작되어
1999년 5월 2일 시복식을 거쳐
2002년 6월 16일로 막을 내렸으나 그분의 사도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그리고 타종교인과 믿지 않는 이들이 비오 신부님을 통하여 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을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나는 일이 확산되리라 믿는다.
☞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하신 비오 신부님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시리라 믿는다.
성인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심으로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심으로 이 땅의 더 많은 영혼들을 특히 북녘 땅의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청했고, 그 고통에서 생겨나는 열매 때문에, 또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 때문에 고통을 열망합니다.
내 고통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이 구원되고, 불쌍한 연옥영혼들의 고통이 단축될 것입니다."
-송열섭 가시미로, 청주 용암동 성당 주임신부, 경향잡지, 2002년 11월호에서-
▶ 오상의 비오신부
저 자: 요란A.슈그,
역 자: 송열섭, 가톨릭출판사
• 이 책은 카프친 프란치스코회 요한 슈그 수사 신부가
비오 신부를 만난 사람들의 구체적인 증언들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비오 신부 가까이에서 생활했던 신부, 수녀, 전문의와 평신도들 등 스물아홉 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신앙의 핵심 주제인 ’십자가의 예수님’ , ’미사’, ’고백성사’, ’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등의 의미를 새롭고 감동깊게 이야기한다.
50년 동안 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을 지녔던 비오 신부는
어마어마하게 큰 영적 능력이랄까 아니면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진, 신약성서적 의미에서 카리스마적 존재였다.
비오 신부는 훌륭한 삶, 성성, 덕행으로 충만한 분이었다.
그분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게 대한 특별한 신심과 함께 끝없는 기도, 고백성사와 영적 만남을 통해
전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사도직으로써 많은 영웅적 희생 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감탄할 만한 사랑에 찬 고행의 삶을 살았다.
그분의 삶은 제단과 고해실이라는 두 기둥으로 압축되며
사제직의 이러한 본질적이며 영속적인 가치는 비오 신부에게서 뛰어나게 실현되었다.
우리는 이 증언들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영적지도로
영혼 들을 돕는 데에 온 삶을 바친 비오 신부의 자비와 신앙의 핵심 주제인
’십자가의 예수님’, ’미사’, ’고해 성사’, ’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등의 의미를
새롭고 감동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저자: H. 바익셀브라운,역자: 최옥식, 성바오로출판사
• 이 책은 비오 신부의 많은 일화들을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소개함으로써
생애의 행적에 대해 한번쯤 품어 봄직한 의혹들을 풀어주고 있다.
5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의 오상을 간직 한 채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자신에게 인도된 영적, 육체적 병자들을 치유해 준 비오 신부에 관해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비오 신부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저자 H. 바익셀라운은
비오 신부의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뿐 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느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호소하는지 헤아릴 수 있도록 이끌고자 했다.
비오 신부는 기적을 잃어버린 20세기를 우리와 함께 살아간 사람이었지만
오상을 받고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며,
고백성사를 보는 이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꿰고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보여준 일들은
하느님의 전능과 은총을 증거하고 선포하였다.
☞ 비오 신부가 보여준 어떤 기적은 결국「십자가의 영광」으로 귀결된다.
「기도와 사랑」의 삶 자체가 다른 어떤 기적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기적이었다.
비오 신부에 관한 작지만 진솔한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구세주를 향해 활짝 열릴 수 있도록 해준다.
♬14.Canto Gregoriano-Verbum Caro Factum Est
https://youtu.be/oYH33I49zuY
ㅡㅡ끝.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