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라 찬양하라
시편 105: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휴가철이다. 여러분은 즐거운 휴가 계획을 세우셨는가? 마음먹고 어디라도 다녀올 이유가 있다.
시원한 자연 바람을 쐬고, 부부가 모처럼 호젓하게 손잡고 걷고, 또 별렀던 맛있는 음식을 찾아 드시라. 자기를 위해 ‘통 큰’ 소비를 하는 기회이다. 어디서 쉬든지, 무엇을 먹든지, 인생의 낙이다.
대개 휴가는 절기상으로 한여름인 삼복중에 이루어진다. 어제가 그 한복판인 중복(中伏)이었다. 세 번의 복날은 천간(天干)에 따르면 세 번의 경일(庚日)에 맞이하는데, 가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날이란 의미이다. 가장 무더운 날에 가을을 꿈꾼다.
휴가의 의미를 보자. 현대인에게 쉼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한 회복 기간이지, 쉼 그 자체가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냥 보너스인 셈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쉼’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심지어 창세기는 안식의 의미를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 헤셀은 삶의 안식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삶의 절정’이라고 강조하였다. 안식일이 대표적이다. 여러분에게 휴가가 소중한 ‘삶의 절정’의 한 모습이 되길 기대한다.
1)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의 한 대목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절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1).
시편 105편은 시인의 마음으로, 시인의 진실함으로 삶의 절정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고백한다.
먼저 삶의 절정으로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를 꼽는다. 우리 삶에서 감사와 찬양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다. 시인은 찬양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행하신 일을 만민에게 선포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이름을 자랑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그 분의 역사를 기억하라’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에 대해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놀라는 일이고, 그 다음은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너무 쉽게 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높이기보다, 끊임없이 무시하고, 모독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아닌, 더 물질적이고 매력적인 것을 신으로 섬기고, 더 나아가서 나 자신을 내 삶의 주인으로 삼으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보다, 자주 인기 있는 사람들, 유력한 정치인들의 이름을 더 높이고,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가? 평소 나 자신의 불신앙과 불경건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지는 않았는가?
이를 바로 잡는 열쇠가 바로 예배이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일은 하나님과 정상적이고 올바른 관계를 누리기 위해서다.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 삶을 가능케 하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에서 해마다 절기를 정해 그 언약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대대손손 하나님과 관계를 확인하는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삶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회복하도록 반복하고 있다.
2)
시편의 고백에 따르면 ‘감사하니 찬양하게 되고, 찬양하다 보니 더 깊이 감사한다.’ 시편 105편의 찬양의 배경은 역사적으로 역대상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감사와 찬양의 배경이 예배와 관련한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성막을 준비하고, 그 지성소에 언약궤를 두었다.
다윗은 비록 임시적 용도로 만든 장막일망정 하나님을 모시게 된 일을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백성들과 큰 잔치를 벌인다. 그들은 축복하며 음식을 나누었다. 모든 백성이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받았다.
하이라이트는 이 일을 기뻐하며, 크게 찬양한다. 그날 찬양대는 힘차게 찬양하고, 백성 가운데 그 기쁨이 넘쳤다.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비파와 수금을 타고 .. 제금을 힘 있게 치고, ..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대상 16:4-6).
성경을 보면 다윗의 생애 가운데 이만한 절정의 순간이 없다. 전쟁터에서 승리도, 왕으로 취임하는 즉위식도 이만한 감격을 전달하지 못한다. 이제 다윗은 성읍 예루살렘에 드디어 하나님을 모시게 된 이 시간, 그 감격은 다윗의 생애의 절정이었다. 다윗은 왕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일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권능이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를 평안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두려움이 없는 평화를 약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찬양하고, 간구하고, 기억해야 한다.
예배 습관을 들이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 포털 ‘갓피플 닷컴’이 청년들을 상대로 ‘내가 고쳐야 할 예배 습관 중 내가 주로 하는 것은?’이라는 제목의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상상의 나래형’, ‘뒷자리 선호형’, ‘필기 열중형’, ‘수면제 중독형’, ‘주보 열독형’ 순서로 많았다.
마음을 예배에 온전히 드리는 일이 쉽지 않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과 이 예배가 내 삶의 절정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3)
한홍숙 장로님이 있다. 그때 이미 여든이 훨씬 넘으신 할머니였다. 어느 날 내게 말씀하신다. “목사님, 미국 다녀옵니다.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얼마 후 그새 미국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목사님, 미국 잘 다녀왔어요.”
장로님은 전형적인 할머니였다. 영어는 ‘굿모닝’도 못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홀로, 그것도 미국 내 공항에서 비행기를 다시 갈아타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잘 다녀오셨다고 한다.
딸이 사는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기적 같다며 딸이 웃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귀국할 때는 먼 길을 말도 못하는 노인이 혼자 가는 안타까움에 딸이 엉엉 울면서 배웅했다고 한다. 사위가 자기 아내에게 ‘당신 어머니를 공항에다 버리는 거’라고 책망하더란다.
미국에 잘 다녀오신 장로님이 그 먼 길을 어찌어찌 다녀오셨는지 여행담을 들었다. 길을 잃을까봐 무섭지 않았느냐는 물음, 이렇게 웃으면 말씀하시더라.
“아유... 하나님이 나 때문에 미국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하셨지.”
적어도 믿음을 말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누구든 공항에서 길 잃어버리는 법은 없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결코 인생 길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평소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특히 예배는 개인의 종교체험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구원의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개인에게만 머물면 사랑의 범위가 편협해지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사실에 대해 소홀하게 된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그 구원하심과 감사를 거듭거듭 찬송, 기도, 말씀을 통해 고백한다. 여기에서 찬양의 역사적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7-8).
이 구원의 사건을 만백성에게 알려야 하고, 그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며, 이를 위해 선교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시편은 끊임없이 감사와 찬양을 반복한다.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재확인하고, 노래로 반복하여 암송하고 그 의미를 따르도록 고백한다. 성경의 찬양은 한결같이, 같은 레파토리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찬양이다.
찬양에도 그 시대의 유행가가 있다. 컨템포러리 뮤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찬양은 믿음의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영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시편 105편의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 사건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무대 위에 뛰어 올라와 그 위대한 드라마에 합류하라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지금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예배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구원의 역사에 연결된 존재요,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재발견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찬양하는 이유는 그 즐거운 곡을 음미하고, 흥분된 감정 때문이 아니다. 내가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기 때문이다. 내게 사랑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나를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 구원의 사건에 불러주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마음으로 찬양해야 한다. 파수꾼의 기다림으로 찬양해야 한다. 레위인의 경건으로 찬양해야 한다. 처녀의 들뜬 마음으로 찬양해야 한다. 시편 105편의 클라이막스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3-4).
하나님을 자랑하는 까닭은 바로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7)시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만민들에게 설교할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이 설교의 대상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 기도는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3)는 것과 통한다.
내가 할 일은 나 자신의 거룩함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가당치도 않다. 오히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가를 고백하는 일이다.
어거스틴은 “찬양하는 자는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와 찬양곡들은 모두 그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일이다.
내가 찬송가를 사랑하고, 우리 교회가 한 달에 한 곡을 집중적으로 찬송가를 선택하여 부르는 이유가 있다. 세상의 어떤 노래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레파토리 중에 4절까지 암송하는 찬송가 한 곡쯤 넣어라.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규칙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편화하기를 원할 때,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룬다”(Art.105).
우리가 시편을 사랑하고, 시편화하는 삶을 배울 일이다. ‘복 있는 사람의 길’, ‘나의 목자를 따르는 삶’,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찬양하는 사람들이다. 노래 실력이나, 연주 실력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마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 때문에 그는 언제나 찬양하는 사람이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그런 시편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자랑하는 여러분 위에 평생토록 함께 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