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는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병자호란의 여파로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총명했고 임금으로 자질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인 강씨는 당시 사림(士林)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그 역시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1645년 1월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일부에서는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여하튼 독살이라고도 여겨지는 의문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세자 자리를 세자의 아들이 이어야 하는데, 원손을 폐위하고 인조는 봉림대군이 잇도록 했다. 그러자 봉림대군이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인조는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서 형의 자식을 네 몸에서 난 것처럼 대하라.”
인조의 말과 달리 소현세자의 죽음은 그 아내와 아들들에게는 비극의 서곡이었다. 1646년 그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는 ‘인조를 저주했다’는 죄목과 함께 ‘독약이 든 음식을 인조에게 올렸다’는 죄목으로 후원 별장에 유폐되었다. 그 사건의 중심에 강빈(姜嬪)과 반목 관계였던 후궁 조씨와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자점(金自點)이 있었다.
부제학을 지낸 유백중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강빈을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묵살되었다. 대사헌 홍무적, 집의 김시번, 장령 임선백, 지평 조한영, 이대현 등이 나서서 죽음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소용없었다. 홍무적은 다시 인조에게 “강빈을 능히 폐하기는 하더라도 죽이시면 안 됩니다. 전하께서 기어이 강빈을 죽이려 하시거든 먼저 신을 죽이신 뒤에 죽이시고, 제 벼슬도 갈아 주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상소를 올렸으며 수많은 신하들이 그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크게 노한 인조는 “가고 싶은 자는 가라. 나는 말리지 않으리라” 했다.
그때 어느 신하가 간하기를 “이것은 전하의 실언(失言)이십니다. 임금은 반드시 겸손하고 맑고 곧은 선비들을 모아서 조정에 있게 하고, 그들의 말을 채택해 써야만 국가를 능히 보전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만일 혹 마음에 저촉되고 거슬림을 노여워하여 물러감을 맡겨둔다면 조정에 있는 자들이 자기의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여 구차스럽게 비위를 맞추려는 비부(鄙夫)들뿐일 것이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 과연 실언을 했노라” 하였다. 자신의 실언을 인정하긴 했지만 인조는 강빈을 용서하지 않았다.
병술년인 1647년 2월 14일에 사헌부의 남노성과 박인제가 장계를 올려 강빈에게 내린 사사의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했다. 17일에는 이경석(李景奭)이 강빈을 용서할 것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고, 이경여(李敬輿)는 ‘인심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고 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경여의 이름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끝일 수가 없으니 위리(圍籬)하고 멀리 귀양 보내라”라고 하였다.
3월 어느 날이었다. 금부에서 강씨를 자기 집에서 사사한다고 아뢰었고, 그날 통한의 한을 품은 강빈은 세상을 하직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 이경여가 귀양을 가자 이경석은 소를 올려 벌 받기를 청했고, 그러한 사실이 흉계라고 진언했던 대사헌 홍무적(洪茂績)과 이응시(李應蓍)가 유배를 갔다. 1654년 강빈의 신원을 주장했던 황해감사 김홍욱(金弘郁)은 심문을 받다가 장살당했다. 홍무적은 제주로 유배를 와서 3년여를 머물렀고 그 뒤를 따라 소현세자의 세 아들1)이 이곳 제주도로 유배를 오게 된다.
어머니가 지은 죄로 인하여 제주로 유배를 오던 그 당시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石銕)이 열두 살, 둘째 아들 석린(石麟)이 여덟 살, 셋째 아들 이회(李禬, 초명은 석견(石堅))는 네 살이었다. 그들 삼형제가 제주도로 들어오자 강빈을 용서할 것을 간청했던 홍무적을 비롯한 제주도에 유배를 왔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옮겼다. 그것은 그들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격리시키기 위해서였다.
세자의 아들로 단란했던 시절이 그처럼 깡그리 망가져 버린 그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1650년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그들을 강화로 이배했다가 다시 교동도로 옮겼다. 효종은 그들 삼형제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실을 알고서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첫째와 둘째는 일찍 죽었다. 1656년 귀양에서 풀려난 이회는 1659년에 경안군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현종 9년인 1668년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권력은 씨앗과 같아서 부자간이나 형제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처럼 인조는 자식인 소현세자도, 며느리 강빈도, 어린 손자들도 믿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는 “돈과 권력은 불신의 창조물이다”라고 말했으며,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권력을 뺏긴 걸 더 오래 기억한다”고 권력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이 ‘권력’이었고, 권력에서 밀려나면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이었다. 설령 살아난다 해도 그때부터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이 죽은 뒤 효종의 능을 쌓은 사람이 신명규(申命奎)와 이정기(李鼎基)였다. 그런데 그 능이 비만 오면 헐려서 다시 수리해야 했다. 그 사실을 안 남인들이 탄핵을 했는데, 그때가 1673년이었다. 국문을 받고 사형 직전에 유배형을 받은 신명규는 지금의 서귀포시 예래동의 이애길의 집에 짐을 풀고 후학들의 양성에 힘을 썼다. 그가 유배 당시에 제주도의 인정과 풍속, 그리고 견문을 기록한 책이 『묵제기문록(黙齊記聞錄)』이다. 이정기는 정의현에서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명규의 아들인 신임이 제주도로 그의 아버지를 찾아왔고, 그도 훗날에 이곳 제주도에 유배를 오게 된다.
서귀포 지장샘서귀포 지장샘은 독특한 설화를 갖고 있으며 샘의 주변은 돌로 담장을 쌓아 보존이 잘되어 있다.
각주
1 소현세자의 세 아들 : 조선 인조 때 소현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후궁 조소용과 반목함에 따라 조소용은 세자빈이 왕실을 저주한다고 모함했다. 결국 1646년(인조 24) 3월 소현세자빈은 사약을 받고 죽었고, 다음 해인 1647년 5월 세자빈의 아들 삼형제까지 제주로 유배를 당했다.
저자 신정일 | 사학자 저자는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의 대표로 현재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걷기 열풍을 이끈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2012.10.5, 다음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