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의 시
바람에게 / 이해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도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다, 바람이여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 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도 한점 바람이 될까
근심 속에 저무는
무거운 하루 일지라도
자꾸 갈아 앉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다오
나무들이 많이 사는 숲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 다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겠다
삶의 절반은 뉘우침 뿐이라고
눈물 흘리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묵묵히 하늘을 보여 준 그 한사람을
꼭 만나야겠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김동규, 임금히 노래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10월엽서 /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께요
좋아한다는 말 대신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께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없이 부칠테니
알아서 가져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10월의 시 / 이재호
왜 그런지 모르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가을비는 싫다.
새파랗게 달빛이라도 쏟아지면
나는 쓸쓸한 느낌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낙엽이 떨어진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허전하기만 한 것은
군밤이나 은행을 굽는 냄새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왜 살부빔이 그리운가.
사랑이란 말은
왜 나에게 따뜻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춥다.
옷깃을 여민다.
내 등뒤에는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울음처럼 들린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10월의 시 / 목필균
깊은 밤 별빛에
안테나를 대어놓고
편지를 씁니다
지금, 바람결에 날아드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느냐고
온종일 마음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 모를 서글픔이 서성거리던 하루가
너무 길었다고
회색 도시를 맴돌며
스스로 묶인 발목을 어쩌지 못해
마른 바람속에서 서 있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지 아느냐고
알아주지 않을 엄살 섞어가며
한 줄, 한 줄 편지를 씁니다
보내는 사람도
받을 사람도
누구라도 반가울 시월을 위해
내가 먼저 안부를 전합니다
10월의 서곡 반기룡 시
가을 햇살 내리쬐는 시월의 첫날
냉기가 몰려오고 살갗은 전율을 한다
그리움의 언어가 넘실대고
황금물결이 수를 놓으며
숲 속은 피톤치드의 향으로 그윽하다
머지않아 만산홍엽으로 채색된
장관을 보리라
여름내 더위와 투쟁을 하였던 나무들도
이젠 전환의 여울목에서 자연의 원리에
스스로 몸을 내어 주리라
아름다운 옷으로 물들 나뭇잎이
벌써 손짓을 하듯 팔랑거린다
세월의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산과 들에 깊은 색조로 조각하여
인산인해를 이루리라
어떤 것은 빨강색으로
또 다른 것은 노란색으로
형형색색 물들은
단풍의 행렬이 힘찬 날갯짓 하며
이 산 저 산 쉼 없이 물결을 이루리라
어느 날 그대에게 단풍 옷 입고 다가갈 때
시월의 서곡은 힘차게 출발하였다고
힘주어 말 좀 해다오
10월의 기도 / 이해인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 주소서
10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 이채
가을밤 청청한 소나무를 타고
우물속으로 떨어진 달이 처연히도 빛나노라
긴 두레박을 내려 그 모습 길어올리면
나뭇가지에 걸려버리는 내 하얀 목선
묵언의 몸짓으로 혼자 감당해야 할
아침까지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겨울로 가는 달빛의 슬픔이 한층 차가워지는 만큼
그만큼의 긴 고뇌를 10월의 달과 함께 견뎌내고 싶은 것일까
우물가에 기대어 달과 나의 시차를 극복하고
이슬 한방울로 만나고 싶은 꿈의 안부를 묻는 중이다
매일 매일 신이 내게 던진 주문을 읽으며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지만
기적을 바라지 않기에
애당초 기적같은 건 없는 거라고
오래 비워둔 내 방의 꽃병에
푸른 달빛을 채우며 꽃을 꽂는다. 그리고
역사는 내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라고 혼자 중얼거리지
하늘의 달이 지상의 달이 될 때
나의 고백은 서늘해질 수 밖에 없지만
나뭇가지에 걸려버린 내 하얀 목선같은 달빛이여!
내일이 가는 길과 그 길의 바람의 온도를 묻고 싶을 뿐이다
10월에는 행을/윤보영
10월입니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습니다.
기온이 내려간 만큼
사람들 옷은 두꺼워지고
두꺼워진 옷만큼, 마음은
오히려 더 허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제가 마음을 먼저 데우겠습니다.
데운 마음으로
내 10월을,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채워진 마음만큼 더 따뜻해진
10월을 11월에게 건네주고 싶습니다.
행복합니다.
10월의 시 /최명숙
10월이 되면
계절이 오기 전에 헐벗었던 이에게는
수수한 옷 한 벌 입게 하시고
아픔이 많은 이에게는 하루쯤 아픔을 잊게 하여
스스로 치유의 길을 찾게 하시고
오래된 연인들에게는 잠시의 이별을 통해
사랑의 소중함을 새기게 하소서
재물을 가진 이에게는 굶주린 이웃을 살피게 하시고
가진 것 없음에 원망이 많은 이이게는
근면함의 이치를 알게 하시며
머릿속에 지식이 가득 찬 지식인들에게는
바르지 못한 우월의 오만을 버리게 하소서
가진 것 없이도 자신의 존재를 작게 여기지 말고
온갖 생각들로부터 평안을 갖게 하소서
붓다의 모든 제자들과 대중들에게
집착의 허망함을 바로 알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우리 몸의 사대 요소들이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가피인지를
부디 깨달아 정진하게 하소서
10월의 시/ 박 광 호
임이여, 사스락거리는 소리 들으시나요
시방 시월의 캘린더가 붉게 타는데,
떠날 채비를 하는 부산함 속에
나무들과 잎들은 섧게 흐느낍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픔인 것을!
동구 밖에서 천사가 기다린다손,
작별의 시간은 서럽고 안타까운 것!
애착이 진할수록 살을 에는 슬픔이어요
그럼에도 전혀 두렵지 않다 하여요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야 할 숙명이고,
자연의 섭리에 순순히 응함이요,
조물주의 뜻이라 모태에서 배웠어요
하물며 한철 내내 살아온 나날은
탄생과 인내와 기쁨이었어요
지난날 꽃들로 화려한 옷을 입고
오늘에 풍성한 결실 이루었어요
그들에게 찬사와 환호가 있었으니,
마지막 날에 ‘개선행진곡’* 들려주어요
가슴 뜨거운 ‘주의 영광’*이어도 좋아요
어느 하늘 아래 이만한 감동 있으리오
이제 잎들은 저마다의 옷차림으로
하늘과 세상에 잘 살았음을 고합니다
벌써 화려한 카니발을 시작하여
잎들이 허공을 날아 낙하하고 있어요
하여도 저들은 하나같이 겸허해요
덜렁거리거나 요란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비운 자의 의연함으로
세상에 온 때처럼 다소곳이 떠나네요
사람들은 덩달아 거리로 몰려나왔으되,
육감의 즐거움에 마냥 흔들립니다
단풍에 취하여 혹은 낙엽이 곱다며
빠라끌리또*의 가르침은 안중에 없어요
개중에는 지아비를 잊지 못하는
어느 노파의 애절한 사부곡이듯
과거의 추억에 가슴 시린 이도 있지만,
성당의 미사곡이 도심에 이르지 못해요
임이여, 시월의 캘린더를 넘길 때까지
우리에게 깨우침의 기회를 주시어요
마악 땅에 다다른 낙엽의 마음으로
묵주알 굴리면서 당신을 모시게 하소서.
가을 우체국/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은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능 금/ 김 춘 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Ⅱ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 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Ⅲ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가을날 /릴케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주옵소서.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녘의 빛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무거워져가는 포도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에 없는 자는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토록 그렇게 살 것이며
잠자지 않고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바람에 나뭇잎이 그를 때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혜맬 것입니다.
쿠울호의 백조/ W. B. 에이츠
나무들은 가을빛으로 아름답고
숲속 오솔길은 메마른데
10월 황혼 아래 물은 거울되어
고요한 하늘을 비춘다.
바위 사이 넘치는 물 위엔
쉰 아홉 마리의 백조.
나 처음 그 백조들을 세어 본 이래
열 아홉번째의 가을이 찾아왔구나.
그 때는 미처 다 세기도 전에
모두들 갑자기 솟아 올라
커다란 부서진 원을 그려 회전하며
날개소리도 요란히 흩어지더니.
저 눈부신 것들을 바라보니
이내 가슴 쓰리도다.
맨 처음 이 물가에서
머리 위의 요란한 날개 소리
황혼에 들으며
발걸음도 가볍게 걸었었건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하였구나.
아직도 지치지 않고 백조는 사랑하는 것들끼리
차가운 정든 물결 속을 헤엄치거나
공중으로 기어오른다.
그것들의 가슴은 늙지 않았다.
어디를 헤매든 정열이나 패기가
아직도 그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고요한 물 위를 두둥실 떠 간다.
신비롭고 아름답게,
어느 골물 속에 그들은 집을 짓고
어느 호숫가나 연못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것인가.
나 어느 날 깨어나
그것들이 날아가 버린 걸 알게 될 그 날.
가을 날 /헷새
숲 가의 가지들 금빛에 타오를 때
나는 홀로 길을 갑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몇 번이나 둘이서 걸었습니다.
이 좋은 날에
오랫 동안 마음에 지니고 있던
행복도 슬픔도 나에게서
이제 먼 향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잔디풀 태우는 연기 속에서
농부의 아이들이 뛰어 놉니다.
거기 나도 끼어들어 어린이와 더불어
가락 맞춰 노래 합니다.
가 을 /H. 헷세
숲 속의 새들이여,
얼마나 그대들의 노래는
단풍진 숲가에 나래치는고!
새들이여, 빨리 날아가거라!
이내 바람이 온다, 바람이 분다.
이내 죽음이 온다, 거둬들인다.
이내 회색빛 유령이 와서 웃음지으면
우리들의 가슴은 얼어 붙고
뜰은 그의 화려한 모습을 남김 없이 잃고
생명은 모든 그의 빛을 잃는다.
나뭇잎 속의 귀여운 새들이여!
사랑하는 작은 형제들이여!
자, 우리 즐겁게 노래합시다.
이내 우리들은 티끌이 됩니다.
시월 (로버트 프로스트·미국 시인, 1874-1963)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은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시월 이야기/ 이향지·시인, 1942-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시 월/임보·시인, 1940-
모든
돌아가는 것들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산은
너무 고운
빛깔로
덫을 내리고
모든
남아 있는 것들의
발성(發聲)을 위해
나는
깊고 푸른
허공에
화살을 올리다.
가을 노래 / P. 베를레에느
가을 날
바이롤린의
긴 흐느낌이
가슴 속에 스며들어
마음 설레고
쓸쓸하여라.
때를 알리는
종소리에
답답하고 가슴 아파
지나간 날의
추억에 눈물 흘리어라.
그래서 나는
궂은 바람에
이 곳 저 곳
정처 없이
흘러 다니는
낙엽 같아라.
시 월 /피천득·수필가, 1910-2007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월의 장미/(나호열·시인, 1953-)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을 맞으며
똑똑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10월/(오세영·시인, 1942-)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10월은 /(박현자·시인, 경기도 양평 출생)
시월은
내 고향이다
문을 열면
황토빛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시는
어머니
하늘엔
국화꽃 같은 구름
국화향 가득한 바람이 불고
시월은
내 그리움이다
시린 햇살 닮은 모습으로
먼 곳의 기차를 탄 얼굴
마음밭을 서성이다
생각의 갈피마다 안주하는
시월은
언제나 행복을 꿈꾸는
내 고향이다.
시월/(이문재·시인, 1959-)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시월에/(문태준·시인, 1970-)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시월에 생각나는 사람/(최원정·시인)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 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음력 시월/(김영천·시인, 1948-)
음력 시월을 이르는 말에
소춘 小春,
양월 良月,
응종 應鐘,
방동 方冬,
상동 上冬,
이렇듯 여러 말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갑자기 추웠다가
다시 따뜻해지는 작은 봄에
이렇듯 여러 이름이 있는 이유가 있을 터이어서요
나는 내 아내의 모든 병이 낫고
새로 찾아온 봄을 두고
참
오래 오래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시월, 초사흘/(류제희·시인)
누가 던져놓았나, 길 없는
하늘중천에
막내고모 눈썹 같은 초승달
달빛에 야윈
미루나무 꼭대기에 서너 장
봉함엽서 떨고있네.
흰 눈발 서성이면
덧나던 그리움도, 기우뚱
헛발 딛는 초저녁
귀뚜라미 울고 / 디킨슨
해는 지고
귀뚜라미는 운다.
일꾼들은 한 바늘씩
하루 위에 실마리를 맺었다.
얕은 풀에는 이슬이 맺히고
황혼이 나그네처럼
모자를 정중히 한 쪽 손에 들고
자고 가려는지 발을 멈췄다.
끝없는 어둠이 이웃사람처럼 다가왔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지혜가 오고
동서양의 그림 같은 평화가 오고
그리고 밤이 되었다.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W.B. 에이츠
나 인제 일어나 가리, 내 고향 이니스피리로 돌아가리,
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살이 집 짓고
아홉 이랑 콩을 심고, 끌벌통 하나 두고
벌떼 잉잉거리는 숲속에 홀로 살리.
그리고 거기서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리 우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거든,
한밤중은 희미하게 빛나고, 한낮은 자줏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 차는 그 곳.
나 인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찰랑대는 잔물결 소리 들려 오는 그 곳으로,
한길이나 잿빛 포장길에 서 있어도
그 물결 소리 이토록 내 가슴 깊은 곳에 괴어 들거든.
낙 엽 / H. 헷세
꽃마다 열매가 되려고 합니다.
아침은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
변화하고 없어지는 것 외에는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름까지도
가을이 되어 조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 있게 매달려 있으십시오.
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
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서
집으로 불어가게 하십시오.
시월/ (목필균·시인)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10월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혹시
다 마셔버렸나요
빈 잔을 앞에 두고
후회하고 있나요
옆구리가 시리고
뼈마디가 아린가요
차분히 지켜보세요
저 깊은 하늘소(沼)에서
붉은 술이 방울져 내릴 겁니다
다시 잔을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남은 날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가을 하늘 /(목필균·시인
누구의 시린 눈물이 넘쳐
저리도 시퍼렇게 물들였을까
끝없이 펼쳐진 바다엔
작은 섬 하나 떠 있지 않고
제 몸 부서뜨리며 울어대는 파도도 없다
바람도 잔물결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 끝에 머물며
제 몸만 흔들고 있다
10월/ (문인수·시인)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시월(十月) /(오정방·시인, 1941-)
가을은 쓸쓸하나
시월은 슬프잖고
가을은 외로우나
시월은 고독찮네
루루루
풍성한 시월
노래하며 보낼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