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20)
후박나무
여기 와서 산책이 버릇이 되었다. 스마트 워치는 매일 오후 걷기가 초과되었다는 힘찬 알람을 보낸다.
수영장에 다녀와서 책 보다 존다. 물속에서 팔다리를 놀리는 운동이 힘이 들긴 드나 보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나서 조각 공원 아니면 남파랑 산책로를 걷는다. 오늘은 배고프지 않아 마지막 사과를 먹고 커피 담아 집을 나섰다. 스틱을 차에서 가져갈까 하다 귀찮아 시장 쪽으로 걸었다.
길을 걷다 죽 늘어선 가로수에 시선이 꽂힌다.
여기 와서 나무 이름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산책하다 대뜸 낯선 이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운 세상이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먼저 걱정된다. 식물원에서 돈나무와 먼나무를 익혔는데 가로수는 분명 상록 활엽수인데 알 길이 없다. 용기를 내어 지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이 나무 무슨 나무인가요?' 주춤대던 여자가 모른다고 했다. 마침 주민센터에서 나오는 노인에게 다시 물었다. 역시 모른단다. 한 곳에 오래 살아도 주변에 자라는 나무 이름을 다 알 순 없다. 그래도 너무하다 싶었다. 짜증과 호기심이 솟구쳤다.
주민센터로 들어갔다. 입구의 QR 체크하는 여자에게 물었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모르겠단다. 그래도 들어왔으니 체온 재고 방문 인증 전화도 하란다. 재빨리 번호를 찍고 창구로 갔다. 젊은 직원도 역시 모른단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후박나무라고 한다. 공무원인 남자는 울릉도에도 있다고 말한다. 아, 후박나무였구나. 궁금증이 풀리니 속이 환해졌다. 그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중부지방에선 일본목련을 후박나무라고 한다고 말해주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 과로 상록 교목이다. 꽃이 목련을 닮은 일본목련은 엄연히 후박나무와는 다른 나무인데 윗녘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다. 일본목련 꽃은 향이 진해서 멀리서도 알아챈다. 강원도 살 때 아내는 일본목련 꽃이 필 무렵이면 집안에서도 향을 느낀다고 했다. 울릉도에 자전거 여행 갔을 때 사동항의 후박나무 아래서 한둔을 했다. 밤새도록 파도소리를 들었는데 바람에 후박나무 가지가 내는 소리는 엄청났다. 주민센터에서 나와 후박나무를 사진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후박나무, 너였구나".
능포항
수변공원 끝에 있는 등대로 걸어갔다.
포구는 차분하게 갈아앉은 하늘색만큼 적요한 분위기다. 코로나 여파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이동을 차단했다. 고깃배는 줄에 기대 졸고 냉동 건물도 한산했다. 주차장에는 시티투어 버스가 발이 묶인 채 멈춰 있다. 주차장 옆 공터에는 손질하다 만 그물이 활개를 펼치고 누워 있다. 방파제에는 낚싯꾼이 새우를 달아 던지고 있었다. 챔질 하는 낚시꾼에게 다가가 보니 손가락 굵기의 매가리가 달려 나온다. 매가리는 여기 말로 전갱이 새끼를 말하는데 미끼로도 쓴다. 기다란 낚싯대가 미안한 얼굴이다. 방파제를 걸어 등대에 가니 건너편의 포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등대 턱에 앉아 커피를 꺼냈다. 아까 포구에서 보았던 낚싯배가 지나간다. '나이스 피싱'이란 배 이름처럼 두 명의 낚싯꾼은 오늘 밤 대물을 낚아 올릴까.
등대 종아리에 물결이 친다. 찰방대는 파도에 바다오리들은 익숙한 듯 물 위를 미끄러진다. 난간에 기대 낚시를 던지던 사내의 미간이 가늘게 떨린다. 조선소 근무복을 입은 남자가 물을 내려다보며 서성인다. 나처럼 남는 게 시간인가 보다.
여기저기 풍경을 사진에 담는다.
이미지는 이미지 너머의 실체를 읽어야 한다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사진이나 풍경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의미다. 전쟁의 참혹한 사진을 내밀며 타인의 고통이 진부한 하룻밤의 유흥거리가 된 시대에 그녀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 가고 있는가?'라고. 멋진 일몰이나 지는 해의 풍경을 바라보며 힐링을 얻곤 한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돌아와 마주하는 건 엄혹한 현실이다. 구조적인 부조리는 끊임없이 재생되는데, 잠깐의 마음 치유가 무슨 소용이겠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상처를 어루만지며 삶에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다. 분명히 현실의 삶은 본질보다 앞선 무거운 숙제다. 오죽하면 어느 비평가가 '냉엄한 건 현실이고 문학은 시시하다'라고 했겠는가.
갈매기가 하늘로 길을 낸다.
하늘은 새의 길이다. 바람과 습도, 천적을 피해 안전한 항로를 택하는 건 몸에 새긴 감각이다. 후투티는 어미를 따라 동남아시아나 호주에서 출발해 한 번 온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다음 해엔 혼자서 비행한다. 후투티를 한 번 본 사람은 그의 생김새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일명 '추장 머리 새'다. 타이완 바다 절벽에 둥지를 튼 제비는 한반도 산간벽지 농가의 처마를 기억하고 부드러운 논흙의 감촉을 기억한다. 주인의 성품을 살펴 처마에 집을 짓고 새끼를 키워 먼길을 떠나는 지난한 행보를 거듭한다. 겨우내 파도소리를 들으며 몸을 만든 제비는 바람에 섞인 훈기를 맡고 북쪽으로 떠날 날짜를 가늠한다. 사람도 이동하고 둥지를 틀고 삶의 추위를 견딘다. 새는 부러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서로의 부리를 죽지에 비비며 체온을 나누지만 인간은 사랑을 사고팔기도 한다. 바다에서 까마귀는 갈매기와 섞여 난다. 그래도 갈매기는 곁을 주지 않고 여봐란듯이 물에 떠서 휴식을 즐긴다. 테트라포트에는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었고 축대에는 굴 껍데기가 붙어 있다. 갈매기와 까마귀가 동거하지 못하는 것처럼 따개비와 굴도 사는 데가 다른 모양이다.
성대와 치매
다른 수변 다리로 갔다.
성대를 많이 잡은 주민인 듯한 낚시꾼이 나무판자에 성대를 올려놓고 손질한다. 몸통은 붉고 지느러미가 파란색인 성대는 열대어처럼 이쁘게 생겼다. 성대는 여기 말로 발갱이라고 부른단다. '발갱이'는 뭍에서 한 자가 안 되는 어린 잉어를 뜻한다. 재바른 칼질 몇 번에 횟감이 늘어난다. 낚싯꾼 중에는 여행객도 끼어 있었다. 수변 다리에서 포구로 돌아가는데 자연산 굴을 망태에 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젊은 여자는 남자들 틈에서 굴을 선별하며 걸쭉한 육담을 쏟아낸다. 남자들은 빙긋 웃으며 대거리한다. 저울대의 남자에게 물으니 오늘 해녀들이 잡은 자연산 석화란다. 벚꽃 필 때 잡히는 섬진강 벚굴보다 크기는 작아도 투박한 껍데기에 해초가 붙어 뒤발한 자연산 굴은 겉으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술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노란색 거제노인 주간보호센터 승합차가 지나간다. 차 옆구리에 '즐거운 어르신들의 학교'라고 쓰여 있다. 배움에 마침은 없지만 즐거운 말년이길 바란다. 장모 생각이 났다. 치매 초기 판정이 난 장모는 성깔 더러운 사위 집에 있다가 다시 아들 집으로 갔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희미해진 장모의 말년은 쓸쓸하다 못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인간에게 늘어난 수명은 어쩌다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을까. 국가는 노인 복지를 위해 세금을 쏟아붓지만 물질적인 복지가 곧 삶의 행복은 아닐 거다. 나이 들어서도 인간관계는 소중하다. 정신이 흐려지면 관계도 흐려진다. 이쁜 치매라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살아온 과거가 자신인데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여기까지 이르면 답을 찾기 어렵다. 아내는 가끔 맛있는 반찬을 하면 엄마를 보러 간다.
소주 생각
해가 진다.
어둠이 깔리는 능포 거리에 가로등과 신호등이 반짝인다. 보석 같다. 빨간 건 루비고 파란 불은 에메랄드다. 필리핀 팔라우 섬의 물빛 같았다. 광고회사 시절 밤에 북한산에 올라가 본 서울의 야경도 그랬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맞다. 나도 너도 트래지디다. 비극 속에서 핀 꽃은 더 아름답다. 어쩌면 그래서 살만한 건지 모르겠다. 거리에는 술꾼의 위장을 자극하는 안주거리가 넘쳐난다. 복어집, 곰장어 구이, 막 썰어 횟집. 소주 생각이 났지만 오늘은 참기로 한다. 무선 이어폰에서 킹 크림슨의 에피탑(Epitaph)이 나온다. 팔다 남은 생선을 거두는 옥수 시장의 저녁 불빛이 장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