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드라마 숲
박설하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는 일은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반쯤 눈을 감고 의자가 비스듬해질 때 너의 발을 지긋 밟았다 찡그리다 고요해진 네게 수요일을 흘려보내는 지금, 밤하늘의 트럼펫이 초승을 불러내고 벽에서 벽으로 건너가는 변주곡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가 한 페이지씩 스텝을 넘기고
웃는 사람에게도
훌쩍이는 사람에게도
깍지를 낀 사람에게도
일곱 시 너머로 방류되는 숲 오케스트라
맞닿거나 멀어질 때도
엔딩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던
눈을 감지 않았던
트럼펫 오보에, 클라리넷 심지어 심벌즈
덤불로 껴안은 노래
나무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사람의 숲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나이테가 나이테에게 건네주는 음률
다음 주엔 드라마 숲이 부는 현악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백지 외 『D-day}(근간)에서
모든 사물들과 모든 생명체들을 종과 속과 과 등으로 분류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앎의 체계, 즉, 분류체계라고 할 수가 있다. 종의 종류와 특성과 그 형태와 습성을 분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종은 숲을 이루며 무리를 짓고 산다고 할 수가 있다. 오이는 오이숲에서 살고, 수박은 수박숲에서 산다. 호랑이는 호랑이숲에서 살고, 곰은 곰숲에서 산다. 소나무는 소나무숲에서 살고, 참나무는 참나무숲에서 산다. 벌은 벌숲에서 살고, 나비는 나비숲에서 산다. 숲은 식물학적인 의미를 떠나 모든 사물들과 동식물들이 무리를 지어서 사는 숲을 말하고, 숲은 모든 만물의 삶의 터전이자 그 고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박설하 시인의 [숲, 드라마 숲]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모든 생명체는 무리를 짓고 숲을 이루며,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숲에서 이 세상의 삶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종의 역사는 종족의 드라마이고, 이 드라마는 ‘드라마 숲의 이야기’이고, 그 모두가 다같이 참여하는 대자연의 향연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는 일은” “드라마틱한” 것이고, “반쯤 눈을 감고 의자가 비스듬해질 때 너의 발을 지긋 밟았다”는 것은 무례함이나 가해 행위가 아니라, 너와 내가 손에 손을 잡고,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를 춤 추자는 신호인 것이다. 요컨대 “네게 수요일을 흘려보내는 지금, 밤하늘의 트럼펫이 초승을 불러내고”, “웃는 사람에게도/ 훌쩍이는 사람에게도/ 깍지를 낀 사람에게도/ 일곱 시 너머로 방류되는 숲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았던/ 눈을 감지 않았던/ 트럼펫 오보에, 클라리넷 심지어 심벌즈/ 덤불로 껴안은 노래”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나무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사람의 숲/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나이테가 나이테에게 건네주는 음률”이 또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생명체는 가수이자 대자연의 합창단원이고, 모든 생명체는 대자연의 연극배우이자 대자연의 지휘자이다. 몸은 악기이고, 나이테는 오선지이고, 입은 울림통이다. 동물과 식물, 물고기와 새, 인간과 인간, 소나무와 참나무, 벌과 나비 등의 구분도 없고, 어떤 계급 차이와 문화적, 종교적 장벽도 없다. 모든 생명체는 나무이고, 풀이고, 바위이고, 인간이고, 벌로 존재하지만, 그러나 대자연의 숲을 이루며, 자기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의 삶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엔 드라마 숲이 부는 현악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숲은 부처이고, 예수이고, 마호메트이고, 숲은 대지이고, 바다이고, 우주이다. 숲은 음악이고, 미술이고, 시이고, 숲은 소꿉장난이고, 놀이터이고, 전쟁터이다.
숲에는 모든 것이 다 있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모든 숲은 생명의 숲이자 박설하 시인의 [숲, 드라마 숲]이다.
첫댓글 주간님의 평론을 덧입어 저의 졸시가 빛이 납니다. 감사드리며 열심히 시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