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방수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을 가다. 제2편.
이 자료는 오륜대 박물관에 없었던 자료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 올린다.
서면선과 안경 집은 大院君(대원군)의 따님 媤家(시가)에서
나온 것으로 金和鎭(김화진)씨가 寄贈(기증).
輪扇(윤선:모양이 둥근 부채)
紗帽(사모)와 宕巾(탕건)
http://sbkm.kr/sub0102
http://oryundaemuseum.com/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관련 이미지
오륜대 한국 순교자 기념관에 전시된 이 사진도 필자가 손수 촬영하여 만들어 드렸다.
1979년 2월 15일.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 541번지에서 이벽의 가족들(父,兄,동생등) 묘와 집터(동 543번지)를 발견하였고, 화현 3리의 송 언배, 유 흥수, 노인들이 노쇄하여 돌아가시기 얼마전에 극적으로 만나 그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답사...
1979년 2월 23일 오기선 신부님, 박희봉, 신부님과 유 홍렬 박사, 이 원호 교수, 안 정심씨, 백 마리아씨와 재 답사를 하였고. 1979년 2월 25일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공근리와 횡성면 가담리에서 이벽 성조의 직께 7대와 8대 종손과 후손들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아래 화살표를 가르치는 곳이 이 벽 성조님의 묘소 위치이다.
1979년 2월 27일 강원도 횡성에서 이벽 성조의 직계 7대 후손, 대표 이 상국씨와 8대 종손 이 완형씨, 그 동생 이 기형씨와 포천 묘소에서 참배.
1979년 4월 10일 포천군 화현 3리 산 289번지에서 이 벽 성조의 묘소를 후손 이 상만, 이 기형등이 참석한 가운데 발굴하여, 지석까지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1979년 4월 20일 김 남수 주교님, 오 기선 신부님, 박 희봉 신부님, 유 홍렬 박사, 이 상만씨 이 기형씨, 이 원호 교수등과 이 벽 성조님의 묘지석 재 발굴 확인하여 斯界에 알려지기 시작 하여졌다.
1979년 4월 20일. 마을 이장이 참관하는 가운데, 김 남수 주교님, 오 기선 신부님, 박 희봉 신부님, 유 홍렬 박사, 이 원호 교수님, 후손 이 상만씨 이 기형씨,등과 이 벽 성조님의 묘지석 재 발굴 확인..
1979년 5월 31일에 경주이씨 종친회 족보 편찬위원회 사무총장(대전시 갈마동 380-155)의 書庫에서, 1813년 계유보를 발견하여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벽 성조님의 행적이 斯界에 알려지기 까지는 변 기영 신부님의 희생과 열정으로 윤곽이 만 천하에 드러 날 무렵 변 기영 신부님은 더 이상 말하면 안된다는 의사의 진단이 나올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다. 소위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는 이야기다.
사진 설명 : 이벽 성조님의 새 무덤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나온 자기류 사진
사진설명 : 1981년 9월 23일 천진암 터에서 5점의 유물이 발견 되었다. 그중 부처님께 매일같이 봉양하는 밥그릇(摩指器) 밑면에 天眞寺라고, 쓰여진 금석문이 나왔다. 다산 정 양용의 여유당 전집내 [천진소요집]에 천진암에 관한 21편의 詩(시)중 천진암과 천진사가 구분 없이 21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移葬(이장)의 理由(이유)와 背景(배경).
이 벽 성조님 묘소는 한경남도 신창읍민회 40여명의 공동 명의로 된 공동묘지 갓등산 중앙에 있었는데, 1978년도에 이미 3차례 이장공고가 나가고, 묘지 이장 공고 시효가 지난 고총으로, 아무 때나 아무나 발굴하여 화장하고, 새묘를 쓸수 있는 상태에서, 이미 그곳 공동 묘지는 그렇게 되고 있었으며, 2,3백년전의 고총들은 파 혜치고, 새묘를 한 두자 비켜서 같은 자리에 써 나가고 있었고. 토지 소유주 신창읍민회가 이미 몇 차례 발굴 이장하여, 가도록 독촉 하였고, 이벽 성조님의 묘소 바로 곁에 까지 새로운 묘를 써 들어 왔기 때문에 불가피하고, 시급하게 이장을 해야만 했다.
조금만 늦어서도 이벽 성조님의 묘소는 자취를 없애 버릴 찰나에 확인하게 된 것 또한 奇異한 일로 하늘이 도우지 않고는 있을수 없는 慶事였다.
변 기영 신부님은 이장 위원회를 구성하고 발기와 구성 및 회의를 토대로 이장 이유와 배경을 파악하고, 이장의 불가피성과 시급성을 인정하고, 이 벽 성조님의 지석 발굴 재확인에 참여한 관계 인사들로 우선 이장 준비 위원회 구성을 발기하게 되었다.
1979년 4월 20일 혜화동 성당 사제관에서 최초로 이장 준비 위원회를 갖고, 위원장에 김 남수 주교님, 부위원장에 후손 이 상국씨와 박 희봉 신부님, 총무에 변 기영 신부님, 위원에 후손 이 완형씨, 이 상만씨, 이 원호 교수님과 자문위원회에 오 기선 신부님과 유 홍렬 박사님이 각각 맡았다.
사진설명: 가운데 通德郎 慶州李檗之墓. 좌측은 둘째부인 恭人海州鄭氏之墓. 오른쪽은 첫째부인 恭人安東權氏之墓라는 지석이 뚜렸이 남아 현재 천진암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3합장된 묘지석들의 필체와 크기와 조선회의 융합강도(밀도)가 상이한 것으로 보아 각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시대에 지석이 제작 매몰된 듯 하였다. 사망년도는 이 벽 성조께서는 1785년 봄이고, 첫째 부인 안동권씨는 적어도 1782년 이전이라야 하고, 두 번째 부인 해주정씨는 적어도 1860년 이후라야 한다,고 사료된다.
이벽 성조님의 무덤 좌우로 안동권씨와 해주정씨 부인의 壙中안에 서로 魂(혼)이 內通할수 있도록 구명을 만들어둔 흔적이 뚜렸했다. 이것을 보면서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우리 조상님들께서도 분명히 魂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죽어 魂靈이라도 만나 보시도록 배려를 한것 같다는 사실로 인정 하지 않을수 없다.
이벽 성조님의 유해 광중
(무덤속의 밑 부분에 깔린 흙을 손 수건에 싸가지고 가는 참관자도 있었는데 특효가 있다고 했다?)
이벽 성조님의 유해
通德郎 慶州李檗(통덕낭 경주이벽)은 어떤 인물인가?는 아래를 크릭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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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學을 專攻하시면서 史書를 목말라 하시던 복자 수녀원의 서양자 수녀님을 기억하면서
사학 자료를 구입하지 못해 절두산 성지에서 하소연 하시던 수녀님께서 드디어 출간
서양자 수녀님, 「박해시대 숨겨진 이야기들Ⅰ」 출간
평생 양반으로 살아오던 이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천대받던 백정이나 갖바치 신분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생활. 신자들이 숨어사는 험한 산속까지 찾아다니며 밤새 성사를 주는 일상 안에서도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해 피폐해져 갔던 선교사들의 건강. 부인이 삯바느질을 한 덕분에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자신의 집을 본당으로 기꺼이 내놓았던 성인 정의배의 정성. 중국에서도 처참하게 이어졌던 박해로 인해 기혼자였지만 사제로 발탁됐던 주문모 신부의 삶. 나아가 피난생활로 인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던 신자들의 처참한 체험을 비롯해 천주교와 민간신앙이 충돌하게 된 다양한 배경과 사연들….「박해시대 숨겨진 이야기들Ⅰ」(407쪽/1만2000원/도서출판 순교의맥)을 읽다보면 막연히 힘겨웠을 것이라고 상상만 해오던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저자인 서양자 수녀(아가타·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는 「중국 천주교사」를 비롯해 「중국 천주교 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의 책을 펴낸 바 있다. 30여 년 간 중국교회 연구에 매진하며, 거대한 중국대륙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장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엮어낸 역작들이었다. 특히 이러한 연구 활동들은 한국교회사 또한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했다.
「박해시대 숨겨진 이야기들Ⅰ」은 이른바 생활인의 시각에서 한국교회사를 보다 새롭게 들여다보고, 가려졌던 모습과 배경 등을 풀어낸 책이다.
이와 관련해 서 수녀는 “어떤 자료인가보다는, 그 자료를 어떠한 시각으로 보는가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인다”며 “이 책에서는 특별한 가치를 발굴하는데 힘썼다기보다는, 기존 교회사에서 다루지 않았거나 빠진 부분,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관심 밖으로 밀려 있던 사건 등을 조사하고 해설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이 책은 200여 년 전 조선시대 생활문화 등을 풍성하게 제시해 신자들의 생활상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각 자료조사를 위해 서 수녀는 서울대교구 내 성지와 신자들의 삶터를 수년간 탐방하고, 생존한 노인들의 증언 등을 수합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당고개 사형장이 산꼭대기가 아니라 당고개 부근 만초천 모래사장이었다는 주장에도 힘을 실었고, 성녀 김효임·효주의 고향에 대해서도 밝혀냈다. 총 21부에 걸쳐 이어지는 방대한 책자에서는 교우촌 생활을 비롯해 우리나라 세시풍속과 천주교, 서울 각 지역의 생활 특징과 당시의 의복 등 다양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중 군수공파 30세손 양 방수(바오로)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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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daum.net/gfamnamyang/ZjTb/1478
첫댓글 이승철 ~ 월 2020-12-14 오후 5:16 ~ 참 부름 습니다. 지금도 여러곳을 맘 되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