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20]이런 기막힌(신나는)‘사제의 만남’도 있었답니다
지난주 뜬금없이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전화로 “내가 내년이면 아흔이네. 죽기 전에 제자집을 가 자네 춘부장도 뵙고 싶네.”라고 하신다. 으잉? 웬 열? “아니, 선생님 뜻이 정 그러시면 전주로 모시러 갈 게요” “아니, 그렇게 번잡떨 필요없네. 기차로 갈테니 오수역으로 마중을 나오소” 하도 단호해 알겠다며 시간만 알려달라고 한 날이 바로 어제였다. 35년생, 올해 89세.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싶었다. 아무튼, 역에 나갔는데 도착시간쯤 전화가 왔다. “제자님, 미안하네. 내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기차를 놓쳤네. 새마을호로 남원역으로 오소” 하하. 남원에 사는 친구(같은 반)에게 마중을 나가 선생님을 산서의 보리밥집으로 모셔 오라고 부탁하는 한편, 임실 운암에 사는 친구(같은 문과)에게 "이런 만남이 있으니 별 일 없으면 같이 만나세"라고 하니 "좋다"고 한다.
그렇게 선생님과 제자 3명이 11시 40분 맛집에서 만났다. 넙죽 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로서는 졸업 20주년, 30주년 기념행사때와 몇 년만에 한번씩 연락하여 전주에서 밥을 사드린 적이 있었지만(왜냐하면 세상에 내가 존경하는 유일한 선생님이기 때문), 두 친구는 졸업 47년만에 처음으로 뵙는 은사恩師였으니, 감회도 감회였지만 틀림없이 뜻깊은 만남이었을 터. 나에게 연신 잘한 일이고 고맙다는 치사를 했으니. 선생님의 '총기'는 그 나이에도 정말 믿기지 않게 여전했다. 지리담당, 수업을 들어올 때마다 뿔잣대와 지리부도 한 권만 덜렁덜렁 가지고와 떠들어보지도 않고 칠판에 판서를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라고 하자. 인구는? 면적은? 종교는? 특산물은? 언어는? 역사는? 줄줄줄 외워 써내려가는 '각나라 제원諸元'에 우리는 깜빡 죽었었다. 법대를 나와 사시를 세 번 떨어지자 교사임용시험을 봤다고 했다. 키도 작지만 야리야리, 호리호리, 약하게 보였지만, 뭔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강단’이 있어 보였다.
그런 선생님이, 하하, 우리집에 오셨다. 우리 아버지께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셨냐?’는 말을 하고 싶었단다.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이다. 남원 서예가친구는 예전에 선생님이 부탁한 ‘권태신망倦怠身亡’(게으르면 몸을 망친다. 게으름은 생활의 적이다.)이란 문구를 예서체로 정갈하게 써 족자표구까지 해 갖고 왔고, 운암 친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경옥고瓊玉膏’(조선시대 지황, 인삼, 복영, 꿀, 구기자를 넣어 만드는 임금만 드시던 귀한 보약. 조선왕조실록에 500번도 넘게 언급됐다)를 가져왔다. 나는 졸문의 생활글 몇 편을 묶어 펴낸 책자를 드렸더니, 옥서玉書라는, 말도 안되는 칭찬을 하셨다. 본채와 사랑채 편액 <애일당愛日堂>과 <구경재久敬齋> 뜻을 물으시는 것이 역시 선생님이시다. 친절한 답변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된다. 전라고6회 동창회 | [新너더리통신 2/161023]애일당(愛日堂)과 구경재(久敬齋) - Daum 카페
원두커피를 한 잔씩 마신 후 선생님의 얘기가 무려 4시간이나 펼쳐졌다. 모처럼 제자들을 만나니 기분이 너무 좋으신 것같다. 당신이 35여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시면서 펼친 ‘놀라운 제자 사랑’ 얘기를 지칠 줄 모르게 하시는데, 중간에 말씀을 끊을 도리가 없다. '꼰대'는 절대로 아니다. 제목을 달자면 ‘불량제자 구하기’쯤 될까. 제적과 유급이 능사가 아니라고 교장한테 대들어 살려낸 제자들이 무릇 기하였을까? 듣지 않아도 짐작할만큼, 결기가 있으신 분이다(그러니까 내가 평생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용기와 제자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태연히 하고도 잰 체 하지 않았단다. 아예 특유의 전북 사투리로 당시의 상황을 ‘실황 중계’하시는 데야 두 손 들밖에.
아무튼, 몇 년 전엔 살짝 인지장애(치매) 약을 드셨다지만, 지금 컨디션은 최상이란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댁에서 30분쯤 떨어진 건지산을 걸어가 두 시간 동안 산책을 한다며 건강을 자랑하신다. 78세에 지리산 천왕봉 등정에 성공한 체력이시니. 다만, 87세 사모님이 허리가 아파 잘 걷지 못한 게 걱정이라는 우리 선생님. 부디 백년해로하시길 빌 뿐이다.
중학교 2학년때 전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님 연설을 들었던 것을 지금도 뚜렷히 기억한다. ‘남북통일이 돼야 하는데, 죽기 전에 그것을 봐야 하는데’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다. 여당도 야당도 싫다며 ‘남북 한동포 우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신다. 아니, 한 동포인 북한주민이 굶어 죽어가는데, 남한의 정부미가 썩어가는 현실을 개탄한다. 우국지사가 따로 없다. 우리는 선생님이 펼치는 3시간 특강을 공짜로 들었다. 강의 도중 분단된 삼팔선을 한탄하는 노래도 즉석에서 뽑았다. 녹음을 못한 게 너무 아쉬워 한번만 더 불러달라고 간청했지만, 다음을 기약하셨다. 서열 위주에다 경직된 교육계에서 ‘아니면 아니다’고 목소리 내기가 어디 쉬운 일일까? 선생님 시대에 전교조가 생겼다면 일등으로 앞장설 우리 선생님. 대입을 준비하는 고3 학생 담임을 맡으며 종회때마다 <나그네 설움>을 부르게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노래를 따라부르면서도, 우리는 다른 반 친구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을 기웃거리는 게 조금은 재밌으면서도 창피했었다. 하여, 언제가 어느 신문에 “유행가를 부르게 한 우리 선생님”이란 제목의 칼럼을 써 실기도 했다.
내년 춘삼월, 미국에 사는 같은반 친구(황의찬)가 일시 귀국하면 선생님과 다시 회동하기로 약속하고 오후 4시 기차표를 끊어드렸다. 3명이 10만원씩 준비한 봉투를 드리려하자 발끈 화를 내셨고, 점심 감자옹심이와 보리밥도 당신이 사지 않으면 거부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아이고, 글먼 선생님이 사시오”라고 양보할 수 밖에. 그런데도 밤 9시 “오늘 참말 행복하네. 자네들한테 민폐를 끼쳤구만. 잘 지내소”라는 안부전화까지 주셨으니, 이런 황감할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진짜 '참 스승'이신 우리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마구마구 자랑하고 싶은 우리 선생님. "저희도 선생님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내내 강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