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은 1910년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통치권이 일제에게 넘어간 국치일이다.
그래서 이전부터도 이 날은 치욕의 날로만 기억되어 왔고 그 의미는 역으로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피압박민의 고난이 시작된 날로서 그 저항의 앞장에 섰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를 보태는 데에만 역점이 두어졌다.
그런데 역사 분야에서는 1907년의 정미의병처럼 의병활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에 비해
이때는 그리 주목되는 사건도 없이 이 날에 역사의 변곡점이 그어졌고 1919년에 가서야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그려졌다. 이는 물론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미리부터
의병을 탄압해왔고 요주의 인물들을 일일이 지목하여 예비검속을 하는 등의 조처를 취해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춘천의병장이었다가 제천으로 옮겨가 살던 습재 이소응 선생은
이때 청풍감옥으로 연행되어 10여일 감옥(판옥)에 구금되었고, 같은 화서학파였던 지평의
이근원 선생도 마찬가지였던 것과 같다.
당시의 여론은 일제가 통제하여 별 기록 없이 식민당국인 일제의 미사여구만 있었던 암흑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걸 두고 (군대도 경찰도 아닌) 헌병경찰의 무단통치라고 하지만, 올해
3·1운동100주년기념 행사로 국내에 초빙된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조차도
"1910년 이후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일반적인 제국주의-식민지의 관계가 아니라, 침략 국가와 피침략 국가의
관계로 봐야 합니다"(<한겨레신문> 4월 3일자 인터뷰기사)
라며 일본의 조선 합병이 일반적인 식민지화와는 다른 경우이고, 차라리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저항투쟁의 선봉이 되었던 인사들은 피체되거나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국내에 남은
백성들은 식민자들에게 짓밟히고 빼앗기며 차별대우를 받는 식민지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 시발점이 되었던 8월 29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로부터 9년 동안 식민지 백성들이
느끼고 생각한 바가 1919년의 전국적인 봉기인 3·1운동으로 여실히 드러났던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 내용을 알고 있다. 그래서 위에서 인용한 브루스 커밍스도 3·1운동을 두고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400년간의 식민지 역사에서 가장 늦게 식민지가 된 대한민국이 가장
짧은 9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방운동의 문을 열였다는 세계사적 평가의 말을 잊지 않고
해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 필자는 8월 29일의 의미가 이미 1917년의 기록으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음을
주목한 글을 읽게 되었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 특집기사 가운데 인하대 명예교수 최원식의
'왜 지금 문학사인가'란 글의 머리말이다. 여기서 최원식은 촛불 이후 3·1백주년에 새로 이
'국망' 사건의 묘처를 알게 되었다며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을 언급한 것이다. 이 선언
에서는 영토 국민 주권('삼보三寶')을 명확히 언급하며 황제가 이를 포기한 바로 그 시점이
바로 인민 하나하나가 나라가 된 시점이라고 말한 것이다. 조소앙과 신규식 등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장을 직접 읽어보자.
융희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오인(吾人)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기간(其間)에
순간도 정식(停息:숨을 멈춤)이 무(無)함이라. 오인 동지난 완전한 상속자니 피(彼) 제권 소멸의 시(時)가
즉 민권 발생의 시(時)오, 구한(舊韓) 최종의 일일은 즉 신한(新韓) 최초의 일일이니(...) 고로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난 즉 아(我)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니 아(我) 동지난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야
통치할 특권이 잇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유(有)하도다. 고로 이천만의 생령과 삼천리의 구강(舊疆)과
사천년의 주권은 오인 동지가 상속하엿고 상속하난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오인 동지난 차(此)에 대하야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
이 얼마나 빛나는 문장인가!
'아 국민동지'가 제권(帝權)을 넘겨받았다는 말은 국민주권이라는 대의를 명확히 천명한 정말
기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최원식도 지적하듯이 우리가 아는 <3·1독립선언
서>를 뛰어넘는 것이다.
아래는 서울역사박물관의 100주년기념특별전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도록에 실린 것.
이 <대동단결선언>은 이미 '최고기관'인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3·1운동에 의한 상해임시정부의 탄생이라는 도식을 시기적으로도 앞지르고 있다. 이들이
이런 선견지명에 도달한 것은 '슬나브혁명'(1917년의 러시아혁명)의 추이를 유심히 주목한
결과로서 러시아 2월혁명으로 짜르체제가 붕괴되면서 핀란드나 폴란드의 독립으로 귀결되었던
사태를 무심히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들은 당시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이 선언 문건을 작성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선언으로부터의 영향
이전의 일인 것이다. 3·1운동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하기 위한 '계획'에 맞춘 봉기였고
그 결과가 임정의 탄생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이처럼 역사의 추이를 정확히 지적
하며 앞서서 기록으로 남기며 대비한 선각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은 이미 춘천교대에서 국민대로 자리를 옮긴 조동걸 교수에 의해 1987년에
학계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조동걸, <臨時政府 樹立을 위한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 국민대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9집
1986년에 미국에서 온 도산 안창호의 후손이 선생의 유품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 <대동단결선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조동걸 교수가 발견하고 이를 논문으로
소개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것이 "1917년에 임정독립선언"(<동아일보> 1986년 8월
15일자 7면기사)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거나 아래 <경향신문>에서와 같이 더 자세히 보도
되기도 하였었다. 같은 날 1면기사와 6면기사이다. 신정은 신규식, 조용은은 조소앙의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대동단결선언>의 원문은 독립기념관의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koreanhistory.or.kr)에서
직접 찾아볼 수 있는데 12쪽의 활자 인쇄본이다. 수필본 원본이 조소앙의 후손가에 있다고
최근 어느 TV에서 소개한 것도 같으나 일부가 분실되어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기억된다.
1917년이면 그 이전의 의병활동의 대표격이었던 의암 유인석이나 이상설 등이 모두 타계한
시점이자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이후 원세개의 반동 제정이 거꾸러진 시점이기도 하다. 제정에
대한 마지막 기대가 스러지면서 특히 신해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던 신규식 등은 이미 1915년에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망명정부를 기도하기도 했던 인물인데, 이 시점에 와서는 그 추이의
결론을 명확히 짚어내며 독립운동의 대의를 창출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나
천도교 세력에 치우쳐 3·1운동을 해석하는 데에만 우리의 시야를 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첫댓글 100주년 기념으로 당시의 생생한 삶을 느껴보려면 염상섭의 중편소설 <만세전(萬歲前)>을 강추합니다! 나도 얼마 전에 다시 읽어보며 무릎을 쳤습니다.
<만세전>은 말 그대로 만세운동 전후의 당시 현실을 그린 최고의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염상섭 자신을 일약 대표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으로, 1922년에 연재하다가 잡지가 폐간되자 1924년에 <시대일보> 연재를 거쳐 고려공사에서 다른 이름을 써서 개작해 출간한 본이 있고, 해방 뒤인 1948년에 다시 손을 대서 수선사에서 낸 본이 있지요. 지금 문학과지성사판은 1924년본, 창비사판은 1948년본을 대본으로 삼은 걸로 알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