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1
7월14일[연중 제1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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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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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yB2zhidWIc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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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박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험하고 악한 세상, 이리 떼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세상 안에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어린양 한 마리가 잔뜩 굶주린 이리들 사이에 둘러 쌓이면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농장 주인이든, 누군가의 개입이 없으면, 어린양의 죽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제자들이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강한 적개심과 미움으로 무장한 적대자들 앞에 제자들은 한 마디로 파리 목숨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제자들은 단 하루도 홀로 설 수 없는 가련한 처지였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마치 농장 주인의 신속한 도움을 기다리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매일 매 순간 그저 하느님만 바라봤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적대자들로부터의 공격 앞에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제한된 조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슬기와 지혜를 발휘하면서 복음 선포를 위해 매진했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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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5K1F_Hzs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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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무섭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신앙인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방법으로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나의 것을 말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야 합니다.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를 하거나 연설하거나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거부당하는 두려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사제가 강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는 강론의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미사 울렁증까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안과 걱정, 두려움은 ‘나’ 때문에 생깁니다. 내가 한 말 때문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내가 죽을 위험에 놓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유 없는 불안증을 조사한 결과 그 사람들이 ‘나’라는 말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쓴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불안하지 않으려면 나를 없애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로켓맨’(2019)은 팝 록 뮤지션 엘튼 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단호한 어머니와 자신에게 전혀 관심 없는 아버지 사이에서 사랑을 목말라하며 성장합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음악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해서인지 동성애자가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마음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이 드러나게 될까 봐 무대공포증을 일으킵니다.
그가 어떻게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우선 사랑받지 못해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무대 위의 과장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듭니다. 무대 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려한 의상과 안경을 착용하고 예명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연약한 자신과 대중이 보는 자기 페르소나와 거리를 두고 수줍은 레지 드와이트에서 화려한 엘튼 존으로 변신하면서 자신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려다가는 거부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를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한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제가 신학생 때 어리석은 생각으로 동료 신학생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해를 보고 있었는데 파도가 매우 높게 일고 있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파도가 저렇게 치는 이유는 바람의 영향이라고 했고 저는 달의 인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습니다.
사실 달의 인력 때문에는 밀물과 썰물이 생기는 것이고 파도는 바람의 영향이 더 큽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생각을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어차피 틀려도 내가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이런 경우 좌절에 빠지지 않고 쉽게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 말씀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일 때에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 것입니다.
강론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것을 하면 부담이 없습니다. “주님, 이번에는 신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라고 묻고 묵상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묵상에서 나온 것을 강의할 때는 부담이 사라집니다.
내 생각을 말하면 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평가당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나중에는 미사가 무서워집니다.
기도로 받은 말만 전합시다. 그러면 강론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미사가 편하고 즐거워집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의 공연입니다. 나를 보여주지 말고 내 안의 그리스도를 들려주고 보여줍시다. 그러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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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야외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야외미사가 잘 진행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날씨’도 큰 몫을 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았는데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기예보의 예측대신에 화창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야외미사에 온 교우들도 모두 환한 모습으로 미사가 있는 공원으로 모였습니다. 작년에도 화창한 날씨를 주셨는데 올해에도 하느님께서는 좋은 날씨를 주셨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50%는 이미 성공한 셈입니다. 미사를 마친 후 각 구역별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LA갈비와 삼겹살로 모두가 풍족히 먹고도 남았습니다. 각 구역마다 전을 부치고, 맛있는 밑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저는 구역마다 돌아다니면서 준비한 음식을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청을 받아들여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혼인잔치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소주에 맥주를 섞어서 ‘소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각 구역별로 신나는 노래잔치를 하였고, 야외미사의 꽃인 보물찾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교우들은 공원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서 무척이나 기뻐하였습니다. 성당에서 마련한 기념품인 ‘수건과 우산’을 나눠드리고 야외미사는 내년을 기약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작년과 달리 이번 야외미사에는 1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마침 그날이 생일인 친구가 있었고, 지난번 종신부제서품 축하식에 함께 했던 청년들이 이번에는 생일축하를 한다며 모였습니다. 이제 막 결혼한 청년도 왔고, 결혼을 앞둔 청년도 왔습니다. 고백성사를 청한 청년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습니다. 먼 바다로 갔던 연어들이 다시 태어난 강으로 오듯이 대학과 직장생활로 바빠서 성당에 오지 못했던 청년들이 이제 다시 복사를 하고, 한국학교에 다녔던 성당으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청년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였던 종신부제님이 있으니 청년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면 성당은 더욱 활기를 찾을 것 같습니다. 넓은 공원에 분명 보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물이 없다고 불평이 있었지만 열심히 찾는 사람들에게 보물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곱은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출발하였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마치 이집트로 ‘야외미사’를 가는 것 같습니다. 사목위원들이 선발대로 가서 야외미사를 할 수 있도록 제대를 마련하고, 의자를 준비했던 것처럼 요셉은 선발대가 되어서 이집트에서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였고,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약 안내서’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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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박해를 당해왔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미움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박해를 면치 못했고(요한 3,17; 15,18), 수난에서 절정을 이룬다.(마태 23,31-32)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이 박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 역사 안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16,1-3) 그들 역시 그분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하고 그분이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한다(마르 10,38-39; 마태 20, 22-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를 당하신다.(사도 9,4-5; 콜로 1,24) 제자들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며(필립 1,29) 기쁘게 생각하였다.(1베드 4,12-14)
자기 동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신뢰하셨으며(마태 26,53; 요한 16,32),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루카 23,34) 예수께서는 박해를 참아 견디는 최고의 표양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보여주신 태도를 제자들도 스승처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마태 5,44; 루카 6,27-28; 로마 12,14), 이겨내라 하신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마태 10,23; 사도 13,50-51) 그러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을 항상 각오하여야 한다.(마태 10,16-39; 요한 16,1-4) 이것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끊고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한 16,33)
제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을 받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참조: 마태 10,19-20)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할 때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지혜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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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리 떼를 변화시켜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16-23)
예수님께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은, 이리 떼와 싸우라고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리 떼를 회개시켜서 양들로 변화시키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지혜나 처세술을 발휘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를 잘 판단해서 허무한 것은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출세하고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허무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은 온유, 자비, 평화, 겸손이다.”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전쟁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선교활동을 전투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박해하더라도 신앙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최고의회가 사도들을 위협하면서 ‘신앙의 증언’을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8-20)
아마도 최고의회는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대답은, “우리를 죽인다고 해도 우리는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단호한 대답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의 멸망만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렇게 용감한 모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는,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애쓰지 마라.”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1-5)
말을 잘한다고 해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과 “말하는 이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말재주를 주실 것이라는 뜻도 아니고, 성령께서 대신 말씀하실 것이라는 뜻도 아니고, ‘성령으로 가득 찬 삶’ 자체가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1절-22절의 ‘가족의 박해’와 ‘모든 사람의 미움’은 박해의 극한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죽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킨 이”입니다. 실제 상황에서 ‘나의’ 인내력과 의지의 한계가 어떤지는 ‘나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니 함부로 장담하면 안 되고,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으면 옮겨가라.”, 또 “박해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순교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순교는 신앙을 증언하는 방법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방법인데,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은총으로 ‘선택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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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는 경고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닥칠 박해를 예고합니다. 유다인들은 제자들을 박해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박해에도 그리스도교는 많은 이에게 전해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해는 점점 거세어지고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라는 미카서 7장 6절을 떠올립니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입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불행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더 크고 무겁습니다.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이러한 결과는 그만큼 박해가 심해질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런 표상은 종말론적인 재앙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깝게는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름은 그 사람 전체를 나타냅니다.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박해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 책들이 많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종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리라고 예고합니다. 이럴 때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꼭 박해가 아니더라도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이러한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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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갖고 오신 그 능력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예수님께 아주 요긴하고 필요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모인 우리 교회는 즐기기 위한 사교모임일 수 없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해관계로 모인 단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삶의 공동체란 그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이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의 집단이며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잠겨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바는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어리석다하면 틀림없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잘나지 않았다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더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겁먹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뽑으실 때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넓히시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힘을 쏟아 주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힘을 믿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 드리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영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기에”, “예수님이기에”, “내 이웃이기에”
비록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랑하는 것. 참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누렸던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이 용서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그 수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얼만큼의 잔꽃송이를 드렸는지 계산해 보도록 합시다. 못난 내 마음을 꺾어 그분의 부드러움을 접목시킨 그 자리마다 고운 꽃 한 송이 피어 있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그분 앞에 그 꽃다발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로운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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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열 사도요한 신부님]
1.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에 맞는 처세술이 있습니다. 이 모든 처세술은 결국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이처럼 치열한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몹시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처세술을 가르쳐 주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뱀은 교활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솔직함과 소박함의 상징이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예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데 뱀같이 슬기로와야 합니다. 즉, 슬기로움으로 미움을 사거나 원망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비둘기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함과 소박한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 같은 이치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앙인은 예수님의 사명을 받아 우상 가득한 세상에 파견된 양입니다. 우상은 신앙인을 유혹합니다. 자신을 따르라고, 그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동원하면서 유혹합니다.
돈, 자본, 권력, 지위 등등 온갖 우상들이 날뛰면서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라고 달려듭니다. 자신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댑니다.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상들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은근슬쩍 우상에게 자기 몸을 맡기면서 적당히 살아갈 것이냐?
우상을 거부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이 판치는 세상의 변두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쫓겨남으로써 참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감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이 우상에 몸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면서, 한술 더 떠 우상의 선전부대가 되어 '우상'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박해’가 아니겠습니까!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심정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상의 늪에 허우적대고 때때로 우상과 함께 놀아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느님의 성령이 너를 지켜주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간절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이 이리가 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결코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순교자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1서 5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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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권일 도나도 신부님]
<하이터치>
지금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거나 통치자들 앞에 끌려 나가 증언해야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돈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절대적 가치나 신적 존재를 부인하는 상대주의와 세속주의 등은 사람들에게 성스러움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그리고 복음적 가치들을 외면하게 한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현실 속으로 나를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를 하이테크 시대라 부른다. 존 나이스비트는 하이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하이터치’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제공해 주는 편리함과 빠른 속도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칠 줄 모르는 경쟁과 속도감에 지친 사람들은 그 내면에서 느린 삶의 형태가 가져다줄 수 있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갈망하고 있다.
복음서를 보면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러한 손길을 현대인들은 원한다. 현대인들의 갈망을 고려한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오늘 복음은 말한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체화되어 온유하고 따뜻한 태도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바로 현대인들을 위한 복음 전파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덕경에서는 “최고의 선은 물처럼 부드럽다.”라고 말한다.
무한 경쟁 구도에서 현대인들은 지쳐 있고 마음이 병들어 있다.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가 그들을 섬기고자 할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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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항상 참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때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용수철을 누르듯이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신앙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은 휘어집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드러내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앞에 성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넘어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 주신다.’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상황이 변화되길 바란다면“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 하고 마음속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모함이나 수군거리는 소리에 속상해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상처받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로 승리를 거두신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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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옆집 남편과 자기 남편을, 옆집 아내와 자기 아내를, 옆집 아이와 자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느 자매는 이 비교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서는 능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아내의 비교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옆집 남편은 퇴근하면 아이들과 놀아주는데, 우리 남편은 항상 늦게 들어와서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휴일에는 쉬어야 한다면서 종일 잠만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 옆집 남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남편을 믿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함께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만약 사이코패스 흉악범이 옆집 남편이라면 이때도 비교할까요? 즉, 내 남편이 저런 흉악범이 아니라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식의 비교는 하지 않습니다. 비교 대상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서, 가까운 나의 사람이 볼품없어지고 결국 자기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비교 대상과 나의 행복은 연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해줄 뿐입니다. 행복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상황…. 그러다 보니 행복은 신기루처럼 집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항상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제자들을 박해할 사람이지요.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바로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나의 마음을 똑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걱정한다고 나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을 굳게 믿고 함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군대 갈 때가 생각납니다. 낯선 곳, 낯선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커다란 장벽이 느껴졌고,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의 시간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들,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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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사는 세상>
마태오 10,16-23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불신이 아니라
믿음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이 아니라
희망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미움이 아니라
사랑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이 아니라
기쁨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불의가 아니라
정의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이 아니라
평화인 세상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이 아니라
살림인 세상
하느님께서
당신 닮은 사람
지으심으로
첫걸음 내디딘
사람 사는 세상
하느님 닮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
거스름으로
비틀거리는
사람 사는 세상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
새롭게 나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이루려는
사람인 사람으로
영글어 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거스르는
사람 아닌 사람으로
시들어가는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하느님 닮은 사람이
오롯이 하나 되어
마침내 활짝 피어날
사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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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정 조심하고 두려워할 것>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의사항을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다 보면 반드시 박해받게 되는데 그것을 대비하라는 거지요.
그것은 마치 양이 이리 떼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그렇기에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뱀처럼 슬기롭다는 것은 어떤 슬기로움일까요? 좋은 의미일까요?
여기서 슬기로움은 박해상황에서의 슬기로움입니다. 그러니 죽음의 위험이 늘 있는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개죽음당하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개죽음이란 의미 없는 죽음이요 무가치한 죽음입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많은 사람을 살리고 죽는 것은 의미 있지만 조심치 않아 죽거나 치킨게임이나 러시안룰렛 게임 하다 죽는 것은 무의미하지요.
생명은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내놓는 것은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내놔야지만 가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사랑뿐이고 그것도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하며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씀은 이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을 사람인지 식별하여,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하다가 그로 인해 박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 6)
복음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되거나 더 나아가 그들에게 짓밟히는 것이 되게 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개와 돼지와 같은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신 다음 그러나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하지는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는 말라는 말씀인데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앞에 서게 되면 예를 들어, 밀고자를 그리 조심했는데도 박해자들 앞에 서게 되면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밀고자나 박해자는 조심하는 정도지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이며 그들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면서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가 박해받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짓밟힐까 조심하라는 것이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이지 내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 말씀이고 나는 다만 전하는 사람이니 선포의 주체자는 하느님이지 내가 아니라는 말이고 어떻게 전할지는 내 걱정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늘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고 마음 자세여야 합니다. 곧 어떤 일이 내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면 그 일 걱정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나의 복음 선포가 내 말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도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관건은 내가 하는 어떤 일이 내 일인지 하느님의 일인지, 내가 하는 말이 내 말인지 하느님의 말씀인지 그것이겠습니다.
그러니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도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내 일이나 하고 내 말이나 지껄이는 내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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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다>
- 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성령충만한 삶 -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 37;3,5)
어제 하루가 참 은혜로운 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안에 펼쳐진 하루임에 감사했습니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세상을 떠난 요한 형님의 장례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평화롭고 감사로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오전 7시 청담동성당 장례미사 참석을 위한 차량봉사를 위해 밤 01:30분에 일어나 대전에서 02시에 출발한 조카 프란치스코가 수도원에 05시 전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다가 청담동성당에 여유 있게 안내하여 주임신부님과 함께 만101세로 선종한 요한 형님의 조촐하고 아름다운 장례미사를 봉헌하니 얼마나 고맙던지요!
“요한 형님! 축하드립니다.”라는 장례미사 강론 제목입니다.
정말 판란만장했던 세상살이 충실히 끝내고 아버지의 집에 귀향한 요한 형님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귀향의 여정을 끝내면 아버지의 집에 귀향할 것이고 이렇게 축하를 받으며 떠날 이들이 얼마나 될는지요. 이어 수원교구의 안성 공원묘지에서 잔잔히 내리는 우중의 하관식도 은혜로웠습니다.
마지막 기도문입니다. “영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요한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천국에 들게 하시며, 성인들과 함께 영원히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이미 지상에서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관식까지 조용히 내리던 비가 마치 참았듯이 끝나자마자 억수 같은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고 오후 내내 많은 비가 내렸으니 이 또한 자비로운 하느님의 배려 은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조카와 베로니카 형수님이 시종여일 충실히 함께해 주었고 오후 1시 수도원까지 잘 도착하니 얼마나 산뜻하고 기분 좋은 하루였던지요! 대전에 무사히 도착한 조카의 답신이었습니다.
“삼촌 신부님을 오랜만에 뵈니 좋네요! 저 대전집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삼촌 신부님과 숙모님 뵙고 많은 대화 나눌 수 있어 좋았고, 유족분들에게 큰 위로를 주신 삼촌 신부님의 장례미사 강론과 하관식에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고맙습니다. 저녁 밥맛이 꿀맛이네요.”
밤 01:30분에 기상하여 오후 6시 대전집에 도착하기까지 온전히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한 프란치스코 조카에게도 축복 가득한 하루였을 것입니다.
차에서 나눈 조카의 아버지인 셋째 형님의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한문 선생님이 가훈을 써오라 했을 때 아버지는 ‘정직, 효도, 우애’ 세 단어를 써주셨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중 수신제가(修身齊家)까지 해당하는 덕목입니다. 당시는 몰랐는데 나이 들어 세월지나 갈수록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마음속에 심어졌다가 싹이 트고 계속 자라는 듯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보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셋째 형님이 얼마나 성실하고 충실했는지 조카인 3형제의 아들들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정말 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정 넘치게 매사 최선을 다해 살면서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 퇴직 후 12년 전에 돌아가신, 저를 가장 사랑해 줬던 바로 윗 형님입니다. 형님은 세상을 떠나셨어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난 삼 형제 아들들이 형님의 뒤를 잇고 있으니 하느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 136장, 1절부터 26절까지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후렴은 얼마나 은혜로운지 평생 부르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자비도 은혜롭기 한이 없습니다. 청년 시절 형 에사우의 보복이 두려워 피신하여 브에르 세바를 떠나던중 하느님을 만났던 야곱이 노년에 이집트의 요셉을 만나러 가던 중 브에르 세바에서 제사를 드렸고 또 하느님을 만납니다.
“야곱아, 야곱아!”
“예, 여기 있습니다.”
다정한 부름과 응답을 통해 하느님과 한결같은 사랑의 친교를 나눠 온 야곱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과 한결같은 친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마침내 하느님의 인도로 요셉을 만나 목을 껴안은 채 우는 야곱의 고백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네가 살아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평생 하느님과 함께 살아온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에게서 하느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 없는, 예수님 없는 삶은 상상불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처럼 주님과 한결같은 끊임없는 신뢰와 사랑의 삶이었는지 반성하게 되고 심기일전 다시 각오를 새롭게 합니다.
이들 이스라엘의 선조들처럼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당신과 제자들과의 친밀한 관계와 더불어 아버지의 영이 늘 함께하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영적 전쟁터에서 치열한 영적전투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충고 말씀으로 큰 위로와 힘이, 격려가 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줄 것이니,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주님과 한결같은, 끊임없는 친교의 나눔이, 지혜롭고 순박한 처신이, 끝까지 견뎌내어 인내로 구원을 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해주는 아버지의 영, 성령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해 주시며, 성령충만한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내 주 하느님 안에서 춤추겠나이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박 3,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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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견딤의 신앙!'>
오늘 복음(마태 10,16-23)은 계속 이어지는 '파견사화'로써, 사도들이 만나게 될 박해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도들이 '채찍질 당하고, 끌려가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앙은 견딤의 신앙'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승리하는 신앙'입니다. '늘 지금 첫째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견디는 신앙'입니다.
점점 더 신앙생활하기가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신앙생활의 근본이신 하느님께서 자리를 빼앗기셨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이념이라는 세상 가치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누구는 "하느님도 까불면 죽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고 있는 이들을 박해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신자들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힘든 세상입니다. 복음 대로 사는 것도 힘들고, 복음을 너와 세상에 전하는 것도 힘든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충 사는 신앙생활을 원하지 않으시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는 '끼리끼리의 신앙생활'을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박해의 상황입니다.
고통과 박해는 나의 부족함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너와 세상을 통해 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너머에 구원이 있으니, 이 고통과 박해를 견디어 내라고, 끝까지 견디어 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끝까지 견디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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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t7iWYhdH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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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22)
주님의 말씀이
생활 속에서
피어납니다.
덧없는
우리의
미움을
바라봅니다.
미움을 통해
우리의 관계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미움과 괴로움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우리의
미움을 없애는
십자가의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빛이
미움을 밝힙니다.
우리의 삶이란
지혜와 인내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우리의
믿음을 살리고
길러내는
신앙의 기본임을
알게 됩니다.
미움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미움이
아닌 믿음을
보십니다.
인생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미움과 믿음
시련과 인내로
인생의 균형감을
배웁니다.
미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우리이길
기도드립니다.
미움을 버리고
우리의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기쁘게 즐기고
받아들이시는
슬기로운 믿음
순박한 믿음의
순간순간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끝까지 견디는
믿음을
십자가에서
배우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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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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