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는 서자에 대한 왕위 계승권이 원칙적으로 전혀 없었습니다. 유럽 중세사에서 각국 왕실 계보도를 보면 심지어 조카나 사촌 등이 왕위를 이을 경우에도 새로운 왕통으로 보았습니다(예컨대 프랑스의 첫 왕조인 카페 왕조는 마지막에 발루아 백작에 있던 사촌동생이 계승함으로써 발루아 왕조로 바뀌는 형태). 어떻게 보면 유럽의 가부장적 가족 관념이 동아시아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영국도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1세로 튜더 왕조가 끊기고, 이후에는 스튜어트 왕조가 이어졌지요. 아 참고로, 이건 왕들만이 아니라 봉건 영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서자밖에 없는 경우 영주의 대가 끊기는 것이 원칙입니다.
물론 외손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도 왕통이 바뀌는 것입니다. 영국과의 100년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있었는데, 프랑스측에서는 사촌을 주장하고 영국측에서는 외손자인 영국왕을 주장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럽 중세사를 국가적 개념으로만 놓고서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중세사 수업을 듣고 알게 된 것이긴 합니다만..
앤불린은 이혼이 아니라 왕비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헨리와 아라곤의 캐서린은 이혼이 아닌 결혼 무효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즉 이전의 결혼은 없었던 것이고 메리는 사생아일 뿐이었고, 둘 관계는 내연이었을 뿐입니다. 앤은 그것을 거부하고 딸을 위해 반역자로서 죽기로 한 것이지요 그러면 딸의 지위는 보장되니까요
성공회는 이혼을 금하고 있지요. 이런 교리 때문에 헨리 팔세가 취한 것은 호적에서 부인 파내기라 들었습니다. 이혼도 아니고 비이혼도 아닌 그런 방식.... 사실 헨리팔세도 딸들 교육이나 생활에는 신경 많이 쓰고 나름 자상했던 아버지라고 들었습니다. 그래봤자 두 딸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만 주었지요... 그 소동을 벌이고 얻은 아들은 20도 못되어 요절... 이 자식들 도중 영국의 중교는 대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격랑에 휘말립니다
첫댓글 이해가 가네요...
헨리 8세는 숙종보다 더 심한 듯..-_- 몇백년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아니 지금도 시끄럽죠..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성공회도 헨리 8세 개인이 이혼하려고 만든 종교죠..
성공회는 이혼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죠. 저 이혼 사건이 없어도 영국은 중교 문제로 떠들석했을 것입니다. 성공회는 이미 당시 가톨릭 개혁자들이 시도하고 있었지요.저 사건으로 인해 폭발한 것일 뿐
케서린과 앤 불린 사이는 서로가 조금만 양보했어도 쉽게 끝날수 있었던 사건입니다. 헨리팔세는 여러 서자가 있었고, 교회에 돈을 먹여서 서자를 적자로 선언했으면 될 일이었지요. 문제는 말이 쉽지 저 양보가....
서자가 많았어요? 몰랐던일인데....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습니다. 문제는 서양의 경우 서자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외를 만들면 되지만 저 때는 그 예외조차 만들기 어려웠지요
아예 왕위계승권이 없었나요?동양처럼?
유럽에서는 서자에 대한 왕위 계승권이 원칙적으로 전혀 없었습니다. 유럽 중세사에서 각국 왕실 계보도를 보면 심지어 조카나 사촌 등이 왕위를 이을 경우에도 새로운 왕통으로 보았습니다(예컨대 프랑스의 첫 왕조인 카페 왕조는 마지막에 발루아 백작에 있던 사촌동생이 계승함으로써 발루아 왕조로 바뀌는 형태). 어떻게 보면 유럽의 가부장적 가족 관념이 동아시아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영국도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1세로 튜더 왕조가 끊기고, 이후에는 스튜어트 왕조가 이어졌지요. 아 참고로, 이건 왕들만이 아니라 봉건 영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서자밖에 없는 경우 영주의 대가 끊기는 것이 원칙입니다.
동양하고 왕위계승권이 아예 다를줄은 몰랐습니다 유럽에서는 여왕이 나와도 뭐라 안하고 카를 5세 처럼 외손자가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얘기를 듣고 의아했었는데 그랬었군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물론 외손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도 왕통이 바뀌는 것입니다. 영국과의 100년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있었는데, 프랑스측에서는 사촌을 주장하고 영국측에서는 외손자인 영국왕을 주장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런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럽 중세사를 국가적 개념으로만 놓고서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중세사 수업을 듣고 알게 된 것이긴 합니다만..
그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영국 하노버 왕조도 같은경우겠네요.
이도형님 말처럼 헨리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고 있을 당시 내연관계의 다른 여자로부터 서자 아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앤불린과 결혼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름 확신(?)했던 거예요.
그럼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복권되었나요? 제가 듣기로는 핸리를 국교회 수장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복권시켜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아니면 메리를 그런 방법으로 복권시킨건가요? 핸리8세를 개인적으로 싫어해서 영국쪽은 튜더왕조대 역사는 보지 않았더니 모르겠네요^^;
앤불린은 이혼이 아니라 왕비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헨리와 아라곤의 캐서린은 이혼이 아닌 결혼 무효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즉 이전의 결혼은 없었던 것이고 메리는 사생아일 뿐이었고, 둘 관계는 내연이었을 뿐입니다. 앤은 그것을 거부하고 딸을 위해 반역자로서 죽기로 한 것이지요 그러면 딸의 지위는 보장되니까요
클로비스의 앤이나 캐서린 파는 부부관계용 부인이 아니라 내명부 다스리기용이었기에 결혼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나 메리는 제인 시모어 시절 공주로서의 지위를 다시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회는 이혼을 금하고 있지요. 이런 교리 때문에 헨리 팔세가 취한 것은 호적에서 부인 파내기라 들었습니다. 이혼도 아니고 비이혼도 아닌 그런 방식.... 사실 헨리팔세도 딸들 교육이나 생활에는 신경 많이 쓰고 나름 자상했던 아버지라고 들었습니다. 그래봤자 두 딸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만 주었지요... 그 소동을 벌이고 얻은 아들은 20도 못되어 요절... 이 자식들 도중 영국의 중교는 대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격랑에 휘말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