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슬픈 역사
라면 먹고 갈래요? 아가씨의 이 한마디에, 밤의 뜨거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라면은 종종 일탈을 부르는 사랑이었다.
아내가 집을 비웠을 남편은 끼니를 무엇으로 때웠을까?
야근을 마친 후나, 술 마시고 쓰린 속은 어떻게 달랬을까?
라면이 없었더라면 100만 자취생은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라면은 생존이고 위안이었다.
쌀이 부족하여 잡곡을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백성을 굶기지 말라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지에 따라, 설립한 삼양식품이, 종로 네거리에서 라면 시식회를 열었다.
한국 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를 더 넣으면 좋겠다. 매우면 물을 더 켜니 포만감이 생겨, 식량 절약정책에 부합되지 않느냐? 박정희 대통령의 말이다.
바지락 칼국수나 국밥보다, 닭고기 냄새가 나는 라면이 상전 대우를 받은 시절이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10원이었는데. 라면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으로 30원이나 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63년 9월 15일, 삼양식품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 죽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았다.
"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일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라면을 제조설비를, 일본에서 들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화가 부족한 때라 들여오기는 불가능했다.
또한 한 라인에 6만 달러나 되는 가격도 문제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당시 중앙정보 부장이던 김종필(JP) 씨를 찾아갔다,
국민들을 배 곯리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나는 새도 떨어 떨어뜨린다는 JP는, 농림부 보유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사용하도록 주선했다.
그래서 신용장을 개설하고 일본에 갔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했다.
라면 제조설비를 한국에 선뜻 팔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묘조(明星)식품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한국전쟁이 일본경제를 재건해 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전후 복구를 했습니다.
라면 제조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한 라인에 6만 달러 하던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만 5.000 달러에 공급받았다.
일본 기술자들은 면과 수프 배합 비율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봉투 하나를 전했다.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니, 기술자들이 비밀로 하던,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이 적혀 있었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시절, 라면은 이렇게 눈물겨운 사연을 안고 삼양 ‘치킨라면’ 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 선수가 라면만 먹고 3관왕이 된 것은 낭설이었다.
유머
라면과 여자의 공통점
라면은 면발, 여자는 화장발
달콤한 라면은? 함께 라면
끓여놓고 그대로 두면 통통 붓는다.
먹을수록 더 먹고 싶다.
부연하여
형 강호동과 동생 이승기 그리고 막내 배인혁이 라면의 본고장 일본에서 형제라면이라는 식당을 오픈했다.
케치프레이스는 “미쳐버린 라면의 변신”이다.
나영석 PD가 기획했다.
첫댓글 올려주신 글
감사히 잘 보고갑니다
라면을 먹을 때면
슬픈 사연이 생각나겠어요 ..
가끔 먹고 싶을 때가 있지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셔요 ~
추천하고갑니다
라면의 슬픈역사 슬픈사연 잘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