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마 50여 년만인가, 고등학교 3학년 반창회를 종로3가의 어느 횟집에서 가졌는데...나를 빼곤 다들 공부께나 했던 급우들이었으니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나름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자부심이 있었을 터. 그에 비해 난 뭐 저 시골의 어느 골짜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그럭저럭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면서 그 길디 긴 세월을 살아왔으니 당연 찍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참석했을 수밖에...
모두 여덟명이 자리에 앉았네. 나랑 친했던 급우라곤 현직 인문과학 출판사 대표인 L군과 육군 포병사령관을 지냈다는 I군 뿐이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그저 그런 사이였는데...뭐 그렇다 해도 이게 얼마만인가,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먼 지방에서 살다 수십 년만에 올라온 내겐 꿈같은 현실이었으니 매마른 가슴』에 더운 감동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달 수밖에...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으니, 참석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학창시절 중 소위 잘 나가던 친구는 없었다는 것이다. 아항! 한 번 구분지어진 계급은 늙어서도 희석될 수 없는 족쇄(足鎖)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란 걸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으니...에효! 하류층 출신이면 눈치라도 있었음 오죽 좋았을까만, 난 어쩔 수 없는 돌아이일 수밖에 없는가 보다.
어쨌든 소주가 한 순배 돌아가면서 몇몇 참석자들이 조금은 얼굴이 불콰해질 무렵 또 다른 L군이 약간은 흥분한 듯 높은 톤으로 말을 이어간다. 나야 뭐 술만 있으면 간도 쓸개도 다 내다 버리는 넘이니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릴 턱이 없었지만, 그래도 행간의 의미를 이어 붙여 내삽(interpolation)한 바 그의 질곡(桎梏)의 삶, 그 중에서도 눈물겨운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고등학생 시절이 1970년대 초였으니,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한창 시행되고 있었던 때였으리라. 그 시절 먹고 살기 힘들었던 이야기야 뭐 새삼스러울 게 뭐 있을까만, 그 중에서도 L군의 고생담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도 남을 정도였다. 시골에서 자란 내가 보기에 그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임을 알았지만, 흥분된 그의 이야기에 내가 끼어들기는 커녕 맞장구칠 수도 없었으니...
50여 년만에 만난 L군의 옛날 모습은 그저 얌전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는데, 이후 그의 삶이 궁금하여 다른 급우들에게 물어볼 기회가 있어서 대강이나마 그의 삶의 족적 또는 생각의 편린(片鱗)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사범대학을 나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에다 좌파정권에선 금기시되어 왔던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L군은 195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까지의 학창시절을 살아온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당연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를 질타한 것으로 보인다.
해서리 인터넷에서 L군의 글을 찾아 보았는데, '미디어펜'(mediapen.com)이라는 인터넷매체에 실린 그의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L군은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과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들의 이상과 공훈이 후대에 전승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실제 각급 학교 도서관에 이들에 관한 도서를 비치해야 함을 설파하고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 학교 도서관 비치를'이었는데, 이승만과 박정희가 왜 학생들에게 가르쳐져야 하는가를 명쾌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게 L군의 굳은 심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현재도 매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광화문, 삼각지, 또는 강남역에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거리에 나서는 용우군에 더한 L군의 의지 또한 나의 그것과 같으니 그들은 분명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同志)라고 하겠다. 동지 세 명 한데 모여 소줏잔 기울이며 세상사 도모코자 L군은 어디에 은둔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