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미카제와 소년비행병
1944년 10월 연이은 패전으로 물자와 장비 면에서 수세에 몰린 일본은 필리핀에 사령부를 둔 제1항공함대 사령관 오오시니 다키지로(大西瀧治?)의 제안에 따라 신푸(神風) 특별공격대라 명명한 특공부대를 편성하고 레이테만 전투에서 미군 함대에 자살공격작전을 펼쳤다. 이른바 가미카제(神風)였다. 13세기 여몽연합군이 일본으로 침입할 때 태풍이 불어 연합군의 함대를 격파한 전례를 들어 명명한 것이다. 오오시니는 해군병학교 출신으로 해군항공대를 조직한 인물이다. 일본 해군 제11비행단의 참모장을 역임한 뒤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군수성에 근무하던 그는 미국과의 국력 차이를 들어 개전에 반대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가미카제라는 비인도적인 자살공격을 창안했던 것이다.
계획에 의한 자살 공격 , 이른바 가미카제(神風)의 첫 격침 기록은 그달 24일, 미 해군의 1,120톤급 예인선이었다. 이튿날에는 7,800톤짜리 호위 항공모함 세인트로 호가 격침되었다. 미군과 일본군이 닷새 동안 도합 250만 톤이 넘는 함정을 동원해 사상 최대 규모의 공방전을 벌였던 레이테 만 해전에서 5척 격침, 23척 대파, 12척 파손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패전에도 불구하고 가미카제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긴 일본은 이 작전을 모든 전선에서 시행하였다.당시 ‘확실한 죽음’을 의미하는 특공작전의 장비는 비행기와 어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어디에도 탑승원을 위한 안전장치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특공대가 조종한 ‘제로센(零戰)’ 단발엔진 탑재 함상전투기는 고도 2만 피트(약 6,100m)를 최고시속 372마일(약 600km)로 비행할 수 있었고, 250kg의 폭탄 탑재가 가능하였다. 제로센은 폭탄의 무게와 가속도로 인해 일단 급강하하기 시작하면 제어가 불가능하였다. 미국 군함을 향해 한번 하강하면 그길로 곧 군함에 부딪히거나 바다에 빠져 죽는 길뿐이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자 패닉 상태에 빠진 일본은 가미카제 작전으로 5천여 명의 미군을 살상하기도 하였다. 초창기에 가미카제 특공대는 미군을 공포에 빠뜨렸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위력은 미미해졌다. 파괴력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폭탄이 무거워 특공대원들이 탄 비행기를 제어하지 못해 바다에 추락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정규 항공모함이나 대형 전함 같은 주력함정은 단 한 척도 침몰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 도중 가미카제에 동원되어 희생된 일본인은 3,812명(미국 자료), 혹은 1만4,009명(일본 자료)이었다. 연합군의 피해는 함정 50척 침몰, 사망 4,907명, 부상 4,824명이었다.
한국인 희생자들 첫째, 신체검사와 학과시험을 통과한 만 15~17세(초등교육 수료자)의 합격자들은 육군 소년비행병학교에서 무료로 기초교육 1년과 상급교육 2년을 받은 후 병장으로 졸업하고, 부대배치 6개월 후에 오장(하사, 분대장 역할)이 되었다. 둘째, 항공기승원양소가 있다. 이곳은 원래 민간파일럿을 양성하는 기관이었지만 1938년 2월 항공국 관제 공포에 의해 군 파일럿 양성을 위한 새로운 코스가 만들어졌다. 응시자격은 중학교 3년 수료 또는 졸업자로 8개월간 국비로 교육받고 나서 6개월 후에 오장이 된다. 셋째, 1943년 항공전력의 긴급확충을 담은 각의 결정 후 급조된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이다. 같은 해 7월 3일의 ‘육군항공관계예비역장교 보충복무임시특령’(칙령 566호)에 의해 시행된 이 제도의 대상은 대학교, 고등학교고등과, 전문학교, 고등사범학교 등의 졸업(예정)자들로 합격하면 바로 조장(상사)으로 교육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하여 항공부대로 배속되었다. 넷째, 1944년에 신설된 특별간부후보생제도가 있다. 이는 항공?선박?통신 등 현역하사관을 보충할 특별조치로 중학교 3학년 수료 이상의 학력을 지닌 15~20세를 대상으로 시행되었는데 1년만에 병장, 1년 반만에 오장으로 진급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국인 가미카제 희생자는 소비(8명), 특조(5명)가 대부분이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최정근 단 1명뿐이다. 가고시마의 지란 마을에 있는 지란특공평화회관에 있는 한국인 병사들의 추모비에는 한국인 탁경현, 김상필, 노용우, 이현재, 박동훈, 최정근, 이윤범, 김광영, 한정실, 임장수 등 총 1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면면은 표와 같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수많은 한국인 비행사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였고 가미카제로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례로 센다이항공기승원양성소 10기 출신의 몬도 하쿠에이(近藤白英)는 이바라키현 호코타 교도비행사단에서 일방적으로 편성한 반다(万朶)대의 가미카제 요원으로 선발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용인되지 못한 채 1944년 11월 15일 마닐라 북쪽 칼루칸비행장에서 이륙 도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민영락, 윤응렬 등 수많은 소년비행병 출신들이 결전의 날에 대비하여 가미카제 훈련을 받았다. 종전 직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연일 가미카제로 숨져간 영광의 얼굴들이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일제의 광기는 순진한 조선 청년들을 부추겨 죽음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한국인임에도 일본군 신분으로 일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더러는 일본의 전쟁영웅들과 함께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버젓이 위패가 모셔져 있다. 꽃다운 청춘을 이역만리 바다에 던지고 물고기 밥이 된 한국인 가미카제 청년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어서 차별대우를 받고, 한국에서는 일왕을 위해 죽었다 하여 친일파로 낙인찍힌 그들. 죽어서조차도 고국 땅 부모형제의 품에 안기지 못한 채 고혼으로 떠도는 그들이야말로 처참한 전쟁의 피해자일 것이다.
▲노용우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일기를 다 태워라.’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평생 황민화교육을 받고 이제는 죽음을 눈앞에 둔 24살의 엘리트 청년 노용우가 고향에 있는 누이동생 노경자에게 사진과 일기장 세 권과 함께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한국 최고의 엘리트로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가미카제의 희생양이 된 그의 내면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노용우는 본토 폭격을 위해 내습한 미군 B-29기를 맨몸으로 들이받아 격추시킨 ‘황군의 영웅’ 가와다 세이지(河田淸治)로 기억된다. 하지만 조국인 한국에서는 일본군에 지원하였다는 이유로 아직까지도 친일의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다. 1941년 경성법전의 교장으로 취임한 마스다 미치요시는 철저한 황민화교육의 신봉자로서 경성법전 재학생 76명 전원을 특별지원병에 지원시켰다. 같은 시기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던 가라시마 다케시는 1965년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에 ‘1943년 11월이 되니 각 전문학교장은 다시 소집돼 결정적인 통고를 받았다. ‘지원이지만 적격자 전원을 지원시킬 것. 미지원자는 이유를 엄중히 추궁 당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되면 강제나 마찬가지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하였다. 1943년 10월 노용우는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 1기로 선발돼 전투기 조종사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1800명에 이르는 특조 1기생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한국인은 노용우, 김상필, 탁경현, 이시바시 시로오(石橋志郞) 등 4명이다. 노용우는 규슈 후쿠오카현에 본부가 있던 다치아라이비행학교 군산 분교 등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1944년 10월1일 정식 소위로 임관하였다. 노용우가 배치된 곳은 ‘하늘의 요새’라 불리던 B-29 폭격기의 수도권 공습의 길목에 해당하는 아이치현 기요스비행기지 제5전대였다. 1945년 5월 29일 오전 8시 노용우는 B-29 편대의 기습 통보를 받고 출격하였다. 시즈오카현 가와네초 부근에서 B-29 대부대와 조우한 노용우의 비행기는 적기의 공격으로 날개가 꺾인 상태에서 M. R. 클라크 주니어 중위가 조종하는 B-29를 몸체로 들이받아 격추시켰다. 노용우는 살고 싶었던 듯 추락 직전에 탈출했지만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이틀 뒤 히가시가와네 마을 남쪽 야산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사후 노용우의 유골은 패전 때까지 하늘을 지키는 ‘군신’으로 중부군사령부 등에 쪼개져 안치되다가 1958년 11월 후생성 원호국에 이관되었다. 다른 한국 출신 군인·군속들의 유골과 함께 후생성 2층 창고에 방치되던 그의 유골은 1971년 6월 도쿄 메구로구의 사찰 유텐지로 옮겨졌다. 1970년대 한국 외무부가 작성한 유골관계 문서철에서 찾아낸 ‘태평양전쟁 한국인전몰자 유골 명부’ 속에는 그의 이름이 ‘1036번’(관리번호)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5년 6월 16일 여동생 노경자 씨는 그의 유골을 가져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였다.
▲탁경현 ‘젖 매달리던 어머니의 근황이 마음에 걸리니, 3월의 하늘이라 봄 안개가 끼었는가.’ 입대한 뒤 그는 육군 특별지정식당 토메야의 여주인 토리하마 토메, 그의 딸 레이코와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출격 전날 탁경현은 여느 때처럼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토리하마에게 자신의 사진 한 장을 맡기고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5월 11일 탁경현은 오키나와 해상에서 자살특공대용으로 츠루기공격전용기에 몸을 싣고 미국 함대로 돌진함으로써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2001년 그의 비극적 삶을 다룬 영화 ‘호타루(ホタル)’가 상영돼 일본 전역에서 적잖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호타루’는 우리말로 ‘반딧불이’라는 뜻이다. 현재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일본의 극우파들에게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2007년 5월 일본 여성 방송인 구로다 후쿠미(?田福美)가 그의 고향인 경남 사천에 위령비를 건립하려다 광복회와 시민단체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인재웅 지란의 추모비 맨 마지막에 새겨진 가미카제 특공대원 마쓰이 히데오는 개성 출신의 청년 인재웅(松井伍長)이다. 그가 제로센 비행기를 이끌고 출격한 뒤 돌아오지 않자 일제는 천황을 위해서 감연히 희생하였다며 대대적으로 선전공세를 벌였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송정 오장을 따르자는 사설을 싣기도 하였다.
소년비행병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 병탄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그해 10월 22일 칙령 제599호로 ‘도쿄육군항공학교령’을 공포하고 소년비행병 교육을 전담하는 도쿄육군항공학교를 신설하였다. 이 학교는 사이타마(埼玉) 현 구마가야(熊谷)의 육군비행학교 내에 설치하였다가 1938년 11월 도쿄 북쪽에 있는 다치가와(立川)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1942년에는 10월 교토(京都)와 가까운 비와코(琵琶湖) 인근에 오오츠(大津) 분교를 설립하였다. 1943년 매일신보의 소년비행병 모집기사에 따르면 소년병 시험에 합격한 청년들은 제일 먼저 다치가와 시에 있는 도쿄육군소년비행학교와 오오츠 육군소년비행병학교에 각각 입학한다. 이곳에서 1년 동안 항공의 기본교육을 받고 졸업한 뒤 조종, 통신, 정비의 3개 분과로 나뉜다. 조종과는 구마가야(熊谷)와 우쓰노미야(宇都宮) 등지에 있는 비행학교로, 통신과는 미토(水戶)에 있는 육군항공통신학교에, 기술과는 도코로자와와 기후(岐阜)에 있는 육군정비학교에 입학한다. 각 학교에서 또 1년의 훈련을 마치고 나면 소년비행병은 상등병이 되고, 또 전문훈련을 마치면 일반 하사관병이 많이 있는 군대에 배속되어 다시 훈련을 받는다. 1년 남짓 지나면 소년비행병은 육군오장이 되어 본격적인 군무를 행하게 되어 있다. 오오츠소년비행학교의 소비15기을(少飛15期乙) 출신이었던 윤응렬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이전에는 정원이 400명 남짓이었는데 1943년경 무려 2천 명이 입교하였고, 그 중에 한국인이 6십여 명이었다고 한다. 자신은 후쿠오카의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아마키(甘木)생도대에서 훈련하였다고 한다. 당시 다치아라이육군비행학교는 소년비행병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에 경성교육대, 대전교육대, 군산교육대, 대구교육대 등 4개의 분교를 운용하였고, 본토에는 교토교육대, 오카야마교육대, 구마모토 교육대, 다치아라이 본교의 아마키생도대, 지란교육대, 타마나 교육대 등 무려 14개의 분교를 운용하였다.
지상교육은 군사교련, 글라이더 활공훈련, 특수체조, 검도, 급보(急步), 행군 등으로 이루어졌고 국어, 수학, 항공학, 정비학을 비롯해 기재취급, 항공기상학, 군대교육령, 작전요무령, 군대내무령, 군대예식령, 항공병조전, 육군형법, 구급법, 항공전술 등을 속성으로 주입시켰다. 또 일본군의 정신적 상징이라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통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켰다. 소년비행학교 학생들은 본래 2년의 정규교육과정을 마치면 육군항공사관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종사 양성이 시급해지자 교육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본토결전을 위한 항공대 및 특공부대로 돌렸다. 윤응렬 장군의 경우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규슈 사가현에 있는 메타바라(目達原)비행교육대에 들어가 독일제 융구망 연습기로 본격적인 비행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40시간의 기본비행을 시킨 다음 급히 전선에 배치했던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은 한국인을 받지 않았지만 일본 육군은 한국인들을 비교적 많이 받아들였다. 때문에 해방 후 소년비행병 출신 가운데 가장 모집인원이 많았던 소비15기을 동기생들은 남쪽과 북쪽에서 공군 창설의 핵심요원이 되었다. 남한의 경우 국방장관 1명, 공군참모총장 3명, 작전사령관 5명, 공사 교장 4명을 낳았다. 일제 말기에 비행학교에 들어간 한국인 소년비행병들은 인원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 창씨명을 썼으므로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서로 간에 국적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현재 ‘차츰차츰 고향산천이 가까워온다. 일요일마다 놀러갔던 강변의 모래만이 보일까. 토끼 잡으러 갔던 그 산봉우리가 어떤 모양일까. 우리 모교의 운동장은 얼마나 크게 보이며 우리 집 뜰에는 올해도 꽃을 심었을까.’ 어려운 집안환경 탓에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조선 학생들에게 비행병이란 고등교육과 출세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그날 오후 12시 30분 여의도비행장에 안착한 이들은 곧장 고향집과 학교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때 이현재의 모교인 한영중학교에서는 전교생을 여의도비행장으로 동원해 선배를 환영하였다. 김광영의 모교인 창신국민학교 학생들은 선배의 비행기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운동장에 창신(昌新)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보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빈곤에 시달리던 수재 소년들이 비행병이 됨으로써 일약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1945년 5월 13일 매일신보는 ‘염원은 거함의 격침, 담담한 대의에 순하는 심경’이란 제하에 죽음을 각오하고 육탄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그들의 각오를 실었다. 그로부터 2주일 뒤인 5월 28일과 29일, 이현재와 김광영은 각각 연합군 함대에 자살공격을 감행하고 고혼이 되었다. 일제는 이들의 계급을 오장에서 소위로 올려주고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하였다. 그들의 일본식 이름은 히로오카 겐사이(廣岡賢宰)와 가네다 코오에이(金田光永)였다. 그해 12월 모윤숙은 [신시대]에 ‘어린 날개-히로오카소년항공병(廣岡少年航空兵)에게’란 시를 발표하여 이현재의 죽음을 극구 찬미하였다. ‘고운 피 고운 뼈에/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사막이나 열대나/솟아솟아 날아가라./사나운 국경에도/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꽃은 웃으리./잎은 춤추리.’
▲박동훈 박동훈은 1927년 4월 21일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부 서호리 202번지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창씨명은 오카와 마사하키(大河正明),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아버지의 도장을 몰래 훔쳐내 소년비행병에 지원하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5년 4월 15일자의 ‘나하 해상에 산화한 네 번째 신뢰(神鷲. 신령스런 독수리), 부뢰특공대의 오카와 오장’이란 기사에서 그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젖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 아들이 지금은 훌륭한 제국군으로서 그 중에서도 용맹스러운 아라와시(荒鷲. 황야의 독수리. 용맹스럽다는 뜻)로 성공해 버린 것을 눈앞에 보고 만족스런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라고 묘사하였다.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 문서보관소에는 과거 일본군 관동군사령부에서 제작한 박동훈의 육성이 담긴 LP판을 보관하고 있다. 여기에는 17세 박동훈의 가미카제 출격 직전 목소리가 담겨있다. ‘전투에 나가는 것이 너무 가슴 벅차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특공대로 뽑혀 명예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적군 함대에 돌격하여 그들을 가루를 내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역사를 지키는 동포들이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특공대가 되어 이 역사를 영원히 지켜주세요. 젊은이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라.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세요. 걱정을 끼쳐드린 것은 불효이고 죄송합니다. 저 마사아키를 용서해주실 걸로 믿고 씩씩하게 나가겠습니다. 야스쿠니에 모셔질 전우들이여, 안녕!’ 하지만 이것은 일본 군인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는 공식발언이다. 그렇다면 박동훈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그는 소년비행병 동기였던 한국인 김산(金山) 오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내선일체라고 하지만 거짓말이다. 일본은 거짓말쟁이다. 나는 조선인의 담력을 보여주겠다.” 그는 현재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이라는 이름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어 있다. 2000년 일본을 지키는 회 등 일본의 극우파들은 유족들의 동의도 없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세운 대동아성전대비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가미카제에 동원된 한국인 청년들은 어린 나이에 남들이 선망하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지만 차별과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군다나 그들처럼 명석한 인재들이 일제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조국과 겨레의 현실에 무지하였다고 볼 수 없다. 일례로 일본육사 출신으로 가미카제에 동원되었던 최정근은 동기인 오카바야시 타츠유키(岡林龍之)에게 ‘나는 천황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고 토로하였다. 어쩌면 그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에게 뒤질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 특조 출신의 가미카제 희생자 김상필이 탈주를 권유하는 형 김상열에게 했다는 말을 복기하면 그런 추측에 어느 정도 부합될 듯싶다. “나는 조선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도망치거나 하면 조국이 비루해집니다. 많은 동포가 한층 더 굴욕을 참아야 합니다. 나는 일본인이 되고 일본을 위해 죽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형의 의지를 잇기 위해, 일본을 승리로 이끌고 그로써 우리 무훈을 인정하게 하고 독립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대동아공영권으로서 버마, 인도네시아, 조선 모두 독립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지하의 독립운동은 무력해집니다. 그보다는 일본에 협력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쪽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이 싫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나는 소년비행병 출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고, 오늘 함께 와준 사토 상사는 장비를 정비해 주었습니다. 전우와 부하는 일심동체이니 민족의 응어리나 벽은 없습니다. 민족의 혼은 팔아먹고 있지 않습니다. 조선의 영혼으로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나의 생각은 반드시 조상님도 허락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제국의 2등 국민으로서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왔던 그들은 나름대로 뚜렷한 민족관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동서 이데올로기의 결전장이 된 한반도에서 애당초 그들이 품었던 열정이나 의지는 소명할 길이 없었다. 연령이나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죽은 자는 친일의 너울을 뒤집어썼고 살아남은 자는 그 너울을 벗어던지기 위해 또 다른 가미카제를 감행했던 것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항공장교 일제강점기 일본 육사에 입교하여 항공장교가 된 사람은 모두 14명이다. 그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9명이다. 그 중에 한 명은 한국전쟁 때 사망하였고, 한 명은 군대와 거리를 두었다. 남은 7명 가운데 해방 이후 공군에 투신해 4명이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승승장구한 인물은 육사 56기 김정렬이다. 그는 해방 이후의 행적이 더욱 분명하므로 4부의 ‘공군 7인 간부’ 부문에서 박범집과 함께 상술하기로 한다. 한국인으로 일본 육사 출신 최선임 장교는 50기 지인태였다. 전국 옥구 출신으로 군산중학 4학년 때 육사에 입학하였다. 1937년 10월 일본육사에서 항공사관학교가 분리되었으므로 항사 1기는 1938년 6월 육사본과를 졸업한 육사 50기가 된다. 그는 조종술도 뛰어났지만 독서를 즐기는 사색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1939년 7월 일본과 소련의 국경분쟁을 벌였던 노몬한 전투에서 정찰기를 몰다가 외몽고 지역에서 조난당하자 자폭하여 사망하였다. 육사 52기 최명하는 경상북도 선산 출신으로 경북중학을 졸업했는데 동기생 6백 명 중에 완력이 가장 셌다고 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가 소속된 비행 제64전대는 사이공, 프놈펜, 말레이시아 등지로 이동해 작전을 펼쳤다. 당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제일의 유전지대와 정유시설이 있는 수마트라 섬 일대를 공습하였다. 1942년 1월 17일 최명하는 팔렘방비행장을 공습하다 피격되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원주민의 집에 숨어 있다가 1월 20일 네덜란드 부대에게 발각되어 교전 끝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육사 55기 김창규는 경기도 시흥 출신으로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중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경기중학 4학년 때 시험을 치렀지만 낙방하였고, 5학년 때 재도전하여 일본육사에 합격하였다. 일본육사 출신 항공장교 명단은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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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미래없는 꼬르마딜리오의 역사거시기 원문보기 글쓴이: 꼬르마딜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