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36년 ! 일제로 부터 해방된지 67년 . 세월은 장사도 이긴다고 했던가, 강산을 7번 바뀐세월
어느덧 이렇게 세월이 갔는지 요즘아이들은 광복절의 의미를 알런지
"다행히 각시탈" 드라마 덕분에 광복절이 더 의미가 있는것은 아닐까
잊고싶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 역사
오늘은 일제 침략기에 가장많이 불렀던 찬송가를 기자출신의 오광철권사님의 글을빌려본다
할렐루야! 형제님들 비오는 광복절 건강하시고 10월 파더스드림을 위해 많은기도 ^^
제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작사 남궁억(1863-1939) 작곡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
지난 여름(2007년) 기자는 생각지 못했던 북한에 다녀왔다. 4박5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나름대로 곳곳을 보고 왔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 중에서도 제일 감명 깊었던 것은 그곳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다. 방북 첫날 공항을 빠져나와 우선 만경대에 가고 그곳에서 가까운 칠골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은 예전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여인이 다니던 교회라고 한다. 갓 포장한듯 버스가 겨우 들어갈수 있는 깔끔한 진입로로 들어가니 향나무 울타리 안쪽에 아담한 교회가 있었다.
평양에 봉수교회와 함께 두개의 교회가 있다고 함은 이미 알려진 바이나 그것이 선전용인지 북한 당국이 기독교를 진정 허용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한번의 교회방문으로 알길 없지만 아무튼 남쪽에서 간 일행들만의 예배였는데 어쨌든 감격스러웠다.
그때 평양에서의 뜻깊은 예배에서 부른 찬송이 남궁억 선생 작사의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었다. 비록 북측 성도가 없는 반쪽 예배가 되었지만 남북이 함께 한 예배였더라면 참으로 합당한 찬송가가 되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그때의 방북이 월드비젼의 감자 씨앗 농장의 준공식에 참석키 위한 것이었으니 더 말할것 없다. 머지 않은 장래에 남북통일이 되고 황폐한 북한땅을 재건하기 위해 남북의 동포들이 함께 어깨에 삽을 메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노래하며 행진할 날을 고대한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 동산에 할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곧 이날에 일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 위해/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 찬송가는 우리 민족의 수난시기인 36년간의 일제 침략기에 가장 많이 불리우던 애국찬송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삼천리 강산을 위해 일하러 갈것을 강조하는 내용에 일제의 눈에 거슬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1937년 금지곡이 되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이 찬송가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도 투옥될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찬송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찬의 입에서 입으로 서로의 가슴 가슴으로 퍼져 나갔고 광명을 되찾으면서 다시 돌아온것이다.
남궁선생은 이 찬송가를 통해 독립사상과 신앙심을 바탕으로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그는 원래 고종 황제의 영어 통역으로 관계에 발을 딛어 군수를 지낸 분이다. 문화발전과 민중 계몽에 뜻을 두고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필봉을 휘둘러 일제에 수차례 구속당하기도 했으며 1918년 교육에 뜻을 두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 홍천의 모곡으로 낙향 교회와 학교를 세워 신앙과 민족혼을 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의 보급에도 앞장섰는데 예전에 부녀자들이 수놓았던 한반도 무궁화 자수는 선생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선생은 1939년 일제의 가혹한 옥고로 득병 7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하여 지난 2004년 신문의 날에 대한언론인회가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올릴 헌정자로 선생을 선정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찬송가는 우리 교계에서 불리우는 찬송가 가운데 흔치않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한 찬송이다.
지금은 국내인이 작사 작곡한 찬송가가 여럿 있으나 예전에는 남궁 선생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유일했다.
이 찬송가의 곡은 원래 이탈리아의 작곡가 도니제티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라메르무어의 루치아”에 나오는 결혼축하 합창곡을 편곡한 행진곡이다.
새찬송가 580장 - 삼천리반도금수강산 [다니엘 새찬송가 전집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