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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
16포병대대장 김 성 소령 ※ 출처 : 신인호, 국방일보(2002. 8. 27) `춘천대첩' 성공 이끌어
북한은 1950년 전면 남침을 일으키면서 72시간(3일) 이내 서울지구를 남과 북으로 대포위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적 3, 4사단은 의정부 방위선을 돌파해 서울에 진입하는 것이고, 2사단과 7사단은 춘천과 홍천을 통과한 후 이천·수원선에 진입해 국군 주력 퇴로를 차단해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출처: 6사단 청성 전우회 휴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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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원주(84.07.11~86.10.16)
이른바 `3일작전'으로 불리는 적의 이 선제타격계획은 춘천지역을 방어하는 국군 6사단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서부전선에서는 적의 의도대로 돌파가 이뤄진 반면 이곳에서는 3일간이나 발이 묶였다. 이는 아군이 효과적인 지연전을 펴며 반격할 힘을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기회가 된 반면, 적으로서는 빨리 끝낼 수 있는 전쟁계획을 수포로 돌려버린 계기가 되었다.
현재 춘천대첩으로 일컬어지는 춘천지구에서의 국군 6사단의 선전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포병의 효과적인 운용과 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 6월27일 북한군 2군단이 총공세를 폈을 때 북한군 2사단의 손실은 40%에 달했고, 이 피해의 대부분은 국군의 105㎜ 곡사포에 의한 것이었다.
국군 6사단의 포병은 김성(金聖·사진)소령이 지휘하는 16포병대대였다. 대대의 화력은 적보다 열세에 있었으나 개전 전 갖춘 준비태세는 확고했다. 대대장 김성 소령은 평상시 대대 장병들로부터 너무 가혹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주야간 훈련을 강행하며 사격술을 연마시켰다. 심지어 대대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대장은 적의 전투력이 모일 주요 접근로상에는 사전에 화력을 계획해 대비했고, 보병과 포병이 협동한 화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6월25일 적은 SU-76 자주포를 앞세워 5번 도로를 따라 침공해 왔다. 오전 10시쯤 적의 선두가 옥산포까지 도달했으며 12시가 되자 주력이 옥산포를 통과하게 되었다. 아군 7연대와 16포병대대의 화력이 집중됐다. 무풍지대를 가듯 의기양양하게 남하하던 적은 우왕좌왕하다가 시체를 남겨 놓은 채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군 보병은 반격을 개시, 지내리선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 1시 적은 SU-76 자주포 10대를 몰고 다시 옥산포로 밀려들어왔다. 이때 심일 소위는 특공대를 조직해 자주포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적은 이제 5번 도로 양측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소천을 따라 공격을 계속해 왔다. 이곳은 은폐나 차폐물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보병의 전 중화기 ·개인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는 가운데 16대대도 화력을 퍼부었다.
16대대는 관측할 사이도 없이 목측으로 맹격을 가했다. 정확히 조준하고 사격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적은 완전히 도가니에 빠진 격이었지만 1개 부대가 격멸되면 다시 후속 제대를 투입하는 등 정면에서 밀어붙이는 전술로 시종일관하였다. 포병은 사정거리가 짧은 관계로 대대와 전진 후퇴를 같이 하면서 보병과 동열에서 보 ·포 협동으로 포격을 계속, 적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기세가 꺾인 적은 마침내 역골로 퇴각했다.
26일 12시 이후 북한군은 옥산포~마전리까지 진출, 소양강을 도하할 태세였다. 김성 소령은 금강봉 남쪽과 가래모기 사이를 살상지역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적은 아군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무모하게 공격을 가해왔으나 16대대의 집중포화에 걸려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제2, 제3 제대를 똑같은 방법으로 재투입했으나 결국 소양강 도하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김성 소령이 이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금강봉 남방은 우리 포병이 항상 훈련하던 곳인데 이곳의 누런 보리밭이 어느덧 청흑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목격한 사람 외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포병 2개 포대 8문이 포격을 개시했다. 연속적으로 10분 하면 황색이 되고 중지하면 청색이 되고 해 숨박꼭질하는 느낌이었다.'
27일에는 홍천 말고개에서 2연대의 상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김성 소령은 대대 일부를 전환해 연대를 지원하는 등 극히 제한된 화력을 적절하게 집중·분배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 사단의 혁혁한 전공을 뒷받침했다. 사단이 이 지역을 철수할 때까지 포병이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주 : 춘천을 점령하고 난 적들은 제6사단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의 하숙집 주인을 '국군 포병대대장을 하숙시켰다는 죄목으로 반동으로 몰아 체포하였는데 다행히도 탈출하여 피신하고 있다가 수복후 김성 소령을 만났을 때, 그가 말하기를 "그 놈(김성 소령) 때문에 1개 연대가 전멸당하였다"는 말을 여러 북한군들 한테서 들었다고 하였다.(출처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제3권("춘천-홍천전투", p.280), 1970년.))
육사3기로 임관, 16대대장을 역임하면서 이렇게 큰 공을 세운 김성(1923년생)소령은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3회)을 받았으며 1961년 준장 진급 후 35사단장을 역임했다. 장군은 93년 6월에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