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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락연재 원문보기 글쓴이: 박희용
만인보 23 조상매 外/ 고은
조상매
아직도 전라도 옥구 들녘
이런 가풍 진득이 남아있구나 오늘이 어제로구니
아들 엄익수가
다른 집 논물 빼돌린 죄로
아버지 엄태우가 벌 받았다
갓 쓴 집안 어른
엄창길
엄명길
엄흥섭 세 분께서
번갈아
망건 쓴 아버지 엄태우의 궁둥이를 쳤다
조상께 무슨 면목이뇨
청해 엄씨 문충공파
이 무슨 면목이뇨
태형 30대
아버지 엄태우의 궁둥이 고약 붙여 싸맸다
밤 이슥토록 소쩍새 울음소리 그칠 줄 모르고
밤 이슥토록 엄익수 피울음 울었다
엄익수의 아내도
머리 풀고 울었다
아버니임
아버니임
아버니임
아버니임
어느 방
저 서대문거리 작은 경무대 부근은 불길이 솟고 있다
영천 종점에는 전차가 올 수 없다
영천 비탈 창녀생활 8년째
세상이 뒤바뀌고 있다
큰 경무대 이승만
서대문 작은 경무대 이기붕의 시대가 가고 있다
그 집 여자
창녀생활 8년째
여자 대꾸하되
이름? 이름은 알아 뭣하게
고향? 고향은 왜 물어? 내 고향은 위대한 대한민국이여
여자 명령하되
어서 벗어
빨랑 싸라구 피스통질해봐야 나 불 안 나
여자 알몸 사내 알몸 얹혀놓고
큰대자로 벌렁 누웠다
사내는 진지하다
진지하다
여자는 심심파적 오른손 손가락 폈다 꼽았다 한다
한참 뒤 숨찬 사내가 물었다
지금 뭐해
여자가 대꾸하되
나 곗돈 계산해 말 시키지 마 어서 싸
사내는 몸 빼내어 방바닥에 백수 몇방울 쏟아버렸다
일어나버렸다
매린(買隣)
고조할아버님께서는
3대 이은 사동집을 내놓으시고
새로 양천으로 이사를 서두르셨다지요
사동집의 운이 다하여
장차 자손들이 곤하다 하여
이사를 서두르셨다지요
사실인즉 사동집 이웃에
청주 한씨를 원수로 여기는
여주 민씨가 살고 있으므로
그 이웃의 독을 피하시려는 것이었다지요
고조할아버님께서는
여덟 번이나
양천마을을 돌아보신 뒤
양천 아랫말 김해 김씨 댁을 사들이셨다지요
그 댁 이웃에
고조할아버님의 마음에 꼭 드신
인동 장씨 형제가 나란히 살고 있으므로
나는 내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사는 것이니라 하셨다지요
내 집이 천금이면
내 이웃은 만금이니라 하셨다지요
한세상 살아가되
원수 없이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세상 살아가되
이웃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하셨다지요
내가 네 이웃
네가 내 이웃
그래야 뜬구름도 이웃이 된다 하셨다지요
지금은 어디나 이웃 없는 사막
남재섭과 심혜옥
제주도 산지포
밤 뱃고동소리 들으면서
잠든 너를 바라본다
멀리 도망쳐와서 너는 이제 어엿이 내 아내이구나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지 않으리
구름 쓴 한라산 밑 귤꽃 피어 있구나
두 몸 꽁꽁 묶어 여기 살리 곧 아기 낳으리
이승만의 개
이승만에게는
미국에서 건너온 개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 마리
짐 루카스
이승만이 중절모자를 쓰면
다음날 그도 중절모자를 썼다
여름날
이승만이 파나마 모자를 쓰면
다음날 그도 파나마 모자를 썼다
이승만이 미8군 사령관과 함께
중부전선 시찰할 때
야전 방한모를 쓰면 그도 방한모를 썼다
1960년 3월
미국 워싱턴데일리뉴스 기자
루카스는
오직 이승만만이 주인이었다
3․15 부정선거 반대운동을
공산당이 주도한 것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소년들을 데모에 내세운 것은
그 배후조종자의 증거라는 기사를 보냈다
조직적 반란이라고
화염병이 경찰서 건물을 태우고
무기를 탈취하고
여당 국회의원 집에 불지르고
투표함을 파괴하고
모든 교통통신시설을 절단한 폭동은
결코 자발적인 시위가 아니라고 기사를 써 보냈다
어째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4선 당선 축하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써 보냈다
이승만은
오직 필리핀 독재자
대만 독재자
베트남 독재자 고 딘 디엠의 위로만을 받고
짐 루카스의 찬양만 받았다
이승만의 개 하나둘 더 있다
이승만이 떠나자
그들도 사라졌다
루카스도 사라졌다
한국에서의 비천하디비천한 영화가 끝났다
김영달의 막걸리
4월 18일 종로4가 천일극장 거리에서
돌아가던 대학생들을 패댔다
반공청년단 깡패들이 쇠갈고리로 몽둥이로 삽으로 벽돌로 패댔다
세상의 분노가 터졌다
4월 19일 전국의 대학생들이 일어났다
세종로와 경무대 앞 거리에서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총 맞아 죽었다
세상의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때까지 한숨만 쉬던 대학교수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서로 오고 갔다
연세대 정석해 권오돈
서울대 이희승
고려대 이종우
성균관대 조윤제
임창순 등이 모였다
4월 25일 대학교수 258명이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였다
선언문을 기초했다
14개항을 발표했다
이 시국선언문이 채택되고 쭈뼛쭈뼛 흩어지려 할 때
동국대 김영달이 벌떡 일어났다
긴급동의
선언문이나 내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 폐회하는 대로 거리에 나섭시다
그러자 박수가 쏟아졌다 참을 수 없는 박수였다
곧장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그 플래카드를 들고
교수들이 거리에 나섰다
종로4가
벌써 학생과 시민 8천명이 뒤따랐다
종로 화신백화점
1만명을 넘었다
계엄군도
경찰도 눈뜨고 서 있었을 뿐
저녁 6시 반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 삼창
애국가를 불렀다
이로써 혁명은 국민의 것이 되어갔다
그날 밤 교수 김영달은
막걸리를 마셨다
당신도 한사발 마시구려
하고
걱정하는 아내에게 권했다
목덜미 흉터도 뿌듯했다
어느 여중생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지났는데
대학생들이 죽었는데
고교생들이
국민학교 어린이가 죽어갔는데
아직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26일 낮 동대문경찰서가 불타고 있었다
다시 학생들과 시민들
구두닦이 소년
동대문 장사꾼
경찰서를 향해 달려갔다
경찰서 옥상에서
무차별 사격의 불을 뿜었다
쓰러지고
쓰러졌다
피의 거리였다
그때였다 부근의 병원에서 한 여중생이 죽었다
임신 6개월
병원에서 낙태수술 뒤
자궁수축이 안되었다
출혈이 심했다
숨졌다
여중생의 부모는
담당 여의사를 매수
사망진단서 조작
4월 19일 시위 도중
경찰의 촌 맞아 죽은 것으로 신고했다
동대문경찰서 부근 전선이 합선되었다 찌지직 불꽃 튀었다
쎄단
1960년 5월
그 총탄 퍼붓던 거리
그 곤봉 날뛰던 거리
그 피의 거리에 신록이 왔다
신록의 가로수들도 살아남아
그 잿빛 거리를 물들였다
그 시위의 거리
이제는 아무나 걸어가는 거리로 돌아왔다
언제 이 거리가
계엄령의 거리였던가
죽음의 거리였던가
혁명의 거리였던가
아무나 오가는 일상이야말로 최고의 삶
그 태평로와 세종로
택시 몇 대
관청 지프 몇 대가 지나가고 있다
그 가운데
으리번쩍 쎄단차가 지나가고 있다
4월 18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려대 반독재선언문 읽던 학생
그가 타고 있었다
옆자리에
어여쁜 여비서가 타고 있었다
신촌의 여자대학생
학생혁명은 혁명 직후
이렇게 망해가기 시작했다
거리의 학생들
더이상 강의실은 시시했다
더이상 지식은 시시했다
어느새 시대의 주역
뻥튀겨진
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현실은 과장되고
현실은 저 밑창의 진실로부터 멀어져갔다
반독재선언문 낭독한 학생
행정학과 이긍철
그는 쎄단차에 타고 지나가고 있다
자유당 간부가 지나갔듯이
과도정부 장관이 지나갔듯이
그가 지나가고 있다
어여쁜 여비서의 다리에 거미손을 얹고
이상관 과장
대한민국 외교부 통상국 통상과장
이상관 과장
아름다운 아내 윤지순 여사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사랑받는 개 해피로
해피
해피 가족
드물게 공과대학 토목과 나와
드물게 미국 콜로라도 광산과 나와
텐버대 나와
돌아와
외교부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외교부 중견간부 34세
이런 사람이
4월혁명의 그날 하필 총에 맞아 죽었다
행복이란
얼마나 아슬아슬 이슬방울 풀 끝인가
그 3천여명
1948년 8월 1일
박정희는 소령으로 승진했다 위스키를 마셨다
그해 가을
제주도의 도민 봉기가 있었다
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 주둔 육군이
제주도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때 육군 속의 남로당은
제주도 상륙명령을 거부하고
여수봉기를 일으켰다
그 여수순천사태 진압을 위하여
박정희가
여수토벌사령부 직전장교로 차출되었다 위스키를 마셨다
우습도다
우습도다
그가 바로 육군 남로당 당책이었다
그해 초겨울 그는 체포되었다
죽음을 앞두었다
그러나 그는 육군 속 남로당원 3천여명 명단을
방첩대장 김창룡에게 불었다
군내 남로당 조직망도 불었다
자신의 죽음 하나와
통째로 3천명의 죽음을 바꿨다
김창룡의 조건은 가혹했다
놈들을 잡으러 갈 때
박정희를 앞세워
그로 하여금
이놈이다
이놈이라고 지적케 하라
이 치욕의 동지 배반 열 번 이상 시키라고
군 수사관들에게 지시했다
박정희는 열번 이상
직접 동지를 하나하나
가려냈다
그런 뒤 그는 살아남았다 위스키를 마셨다
그뒤 3천여명의 명단 없애버렸다
그뒤 3천여명의 무덤도 파헤쳐 아예 없애버렸다 위스키를 마셨다
임용학
쉰살은 넘은 듯
막일꾼인 듯
4월 26일 밤
세브란스 병원에 실려온 주검
다른 주검의 가족들 울음소리로
덩달아 외롭지 않았다
며칠 뒤
누가 와서 임용학이란 이름을 불러주었다
아직 그 주검 누가 찾아가지 않았다
시시한 무관심
시시한 관심
시시껄렁한 타인들이 이 세상 한쪽이었다
바람 왜 부노
어느 석녀
1960년대
인구증가율 30% 육박
1965년 남한 인구 3천만
한말 민영익
오호 2천만 동포들아
그로부터 어느덧 3천만
세계 2위 3위의 인구밀도
그래서
여자는 삼뽕을 사용했다
스펀지도 사용했다
남자는 멍멍한 콘돔을 사용했다
아무것도 없으면
고려 태조 왕건인 양
질외사정도 시도했다
허나 배란기 잘못 알고 임신하는 일이 잦았다
옥돗물로 씻어내고
아예 자궁을 지져버려 석녀가 되는 여자도 있다
석녀가 되어버린
공덕동 정진복이 마누라
해반주그레 엉덩이 흔들어대며
장 보러 가는 길
오늘은 이놈
내일은 저놈
눈맞아 붙었다
나는 괜찮아 나 당신 자식 두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마
청계천 판잣집
제가 무슨
금강산
내금강산
보덕암이라고
받침대 하나에
아스라이 걸터앉은
보덕암이라고
판잣집 받치고 있는 기둥
기둥이기보다
막대기
그 막대기 행여 삭아버리면
판자집 두어 채 와르르
내려앉아
청계천 썩은 물에
폭삭 잠길 터
그 판잣집 끝집에서
낮이나
밤이나 욕밖에 없으니
이 씨팔년아
이 벼락맞아 뒈질 년아
이 오살육실헐 년아
이 갈보년아
이 똥갈보년아
이 능구렁이년 좀 봐
이 칵 뒈질년 좀 봐
뒈져 까마귀밥 될 년 좀 봐
그런 욕 퍼부어대도
서방인데도
밤중에
아이들 잠든 사이
올라타면
속삭이기를
이 씨팔년아
한마디 하고 나서
염치코치 없는
물건을
제 마누라 물건에 쑤셔넣으니
그때서야 욕 나오는 주둥아리에서
흐음흐음
숨찬 신음소리
보덕암 염불소리 나오는구나
야반도주
비가 오다말다 했다
몽달귀신
처녀귀신 나오는
고개를 넘었다
그때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의 밤
형수와 나
아니
내 여자와 나
내 여자가 말했다 이제 나 어떡해
내가 말했다 나만 믿어 아무 일 없어
그렇게 서울 원효로 한강가 무허가집
방 한 칸에
두 사람의 단봇짐 풀었다
이불 없이 잤다
내가 말했다 돌아갈까보다 서울은 살 데가 아니다
내 여자가 말했다
왜 그렇게 약한 소리 나와
우리한테는 여기밖에 없어
모진 삶 밑바닥에서
차츰 내 여자가 나보다 강했다
몇 번쯤
형을 생각했다
나는 형의 아우가 아니라
형의 원수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짐승
이제 나는 나
내 여자의 사내이다
벌써 야반도주 2년
추석이 지났다
설날이 온다
모두 돌아갈 고향이 있다
서울역전 귀성차표 예매로
긴 줄을 이었다
나 임동희
내 여자 구정숙
서울 변두리가 억지로 고향이고
서울 변두리가 억지로 타향이다
아들을 낳았다
호적에 올려야 했다
내 여자의 신분은
아직
내 여자로 되어 있지 않았다
형수였다
부활
칡뿌리 캐먹었다
쑥 뜯어다
쑥잎 훑어다
쑥물 먹었다
빈속이 아리고 아렸다 쓰라렸다
전만 구례군 오동골 당년 49세 이장춘은
어린 자식이
쑥물 마시고
다리 휘청거리는 것 보고
농약 두 모금 마셔버렸다
쓰러졌다
죽었다
그런데 모진 목숨
다시 살아났다
왜 나 살렸느냐고 마을 사람들을 원망했다
이 기사 쓴 지방기자는
바로 당국에 체포 구속되었다
북괴 지령을 받아
이런 비참한 사실 폭로했다는 것
머리칼 장미
윤이상은 물고문을 견디어냈다
윤이상은 전기고문을 견디어냈다
견디어내는 것은
못 견디어내는 것
자살밖에 없었다
취조관 유리재떨이 집어들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쏟아진 피로
유서를 썼다
나의 아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자살미수
병원으로 호송되어
세 사람의 감시 속에 벌렁 누워 있었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다
1967년 9월 17일
50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남편에 이어
감옥에서 남편이 보고 싶어한다고 유인해다가
구속시킨 아내 이수자가
다른 교도소 옥방에서
자른 머리로 장미꽃을 만들어
관제엽서에 붙여
윤이상 옥방으로 보내왔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윤이상 눈으로 울고 코로 울었다
강태원 원장
대전 선천동 일심영아원 강태원 원장은
늘 정장 차림의 신사
늘 정중한 신사 온화한 미소의 신사
주일날
또는 수요일 밤
예장 베다니교회 예배에 꼭 꼭 참석
집사이다가
장로에 오른 돈독한 신앙 간증의 신사
놀라워라
지지난해 이래 2년간
어린 고아들
분유로 자라는 아기들
마흔 다섯인가 여섯인가를
굶겼으니
굶겨죽였으니
군산비행장 미군 장교들의 지원
미국 기독교 선교부의
푸짐한 지원
다 딴 주머니에서 이자 키우며 고리채 놓으며
그 영아원
몇사람 직원의 월급도 반년 가까이
주지 않았으니
아기들
굶겨죽였으니
어휴 찬송가집 찬송가들 콩나물대가리들 할 말 없어라
(* 만인보 23권을 읽고 : 사일구와 오일육 등의 무거운 주제를 많은 등장인물을 통해 詩化하려다보니 역시 매너리즘에 빠져들었다. 역사적 기록성은 확실하나 문학적 감수성은 갈수록 건조해지고 있다. 그 역사의 와중에서 쓰러져간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관심이 가다보니 희생자 모두들의 이름을 올리고 싶었을 것이지만, 대량생산 급히 쓰다 보니 시적 긴장미가 소홀해진 감이 많다.
70세 넘어 뻐쩍 마른 감수성에다가 참여시의 씨앗을 뿌리다보니 싹 나는 게 영 듬성듬성하고 몇 개 자란 것도 그리 훌륭하다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고은이 50세 전에 만인보를 마무리 하였다면 편편마다에 주인공이 펄펄 살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당이 늙다보니 씻김굿이 드라이해져버렸다.
그래도 시는 시적 서정이 물컹해야 하는데, 이 23권속에 들어있는 시들은 인물 나열식, 비슷한 구조, 진부한 언어를 갖는 것들이 많다. 물론, 연일해서 사일구와 오일육을 절규한 시, 그 가슴 아픈 시를 하도 많이 읽다보니 나의 감수성에도 면역이 생겨서 그러하리라. 하지만 좋은 시는 주야장창 읽어도 면역은 생기지 아니하지 않을까? 하여튼 비슷한 주제를 가진 시의 대량생산은 숙고할 일이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의 삶과 죽음을 끈끈하게 읊어대는 고은 시인의 작업은 고가의 지적 상품성을 가짐은 분명하리라.
2008년 2월 1일 09:00 양백산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