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등학교 친구들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고척동의 고척국민학교(초등학교)를 나왔다. 나의 유년 시절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다.내가 5살때 우리 부모님은 충남 당진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때 누이 동생이 3살, 막내가 갓 태어났으니 정말 서울에는 고모님 외에는 아무 연고도 없엇다. 그래서 처음 둥지를 튼 곳이 고척동이다.아버지는 당시에 슬리퍼 공장인 “우일화학”‘에 다니셨고 어머니는 남의 집에 파출부로 일하셨다. 일찍이 5남매의 막내이신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큰 형 밑에서 작대기로 맞아가면서 농삿일을 했는데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큰 형을 피해서 올라 오셨다. 주머니에는 정말 무일푼이었다. 그래서 두분은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서 닥치는데로 일하셨다. 당시 우리는 2살 터울이라 한참 부산하고 정신 없는 5,3.1살의 나이라서 어디로 나갈 것 같아서 밖에서 문을 잠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방 가운데는 요강 하나만 있었을 뿐이다. 정말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었다. 부모님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지냈는데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나마 외모를 외가쪽을 닮아서 못 먹었지만 키는 컸다. 대신 별명이 와루바시(나무젓가락)였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사진과 중학 사진이 별로 없다. 깡마르고 키만 커서 나는 사진 찍기를 싫어 했다. 간혹 있더라도 찢어버렸다. 그래서 초등학교, 중학교는 단체 사진 밖에는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는 조금 했었던 것 같다. 그때의 통지표를 보면 거의 다 수였고, 간혹 우가 보일 정도이니 공부는 했었는데 초등학교의 성적은 뭐 믿을 것이 못 되었다. 나의 초등학교 단짝은 양경석이다. 그는 작은 키였지만 5,6학년때 서로 반장과 부반장을 번 갈아 했으므로 그냥 친했다. 그의 집도 우리 집만큼 가난 했다. 그래서 더 친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고창석.강민구, 박웅수 등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렇게 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학생은 채경옥이가 마음에 남는다. 그녀의 집은 부유했고 부족함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홍성표도 친했다.박종현친구는 3학년때 8반으로 같이 동문수학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 일은 정말 도시락을 난로에 올려놓고 따뜻하게 먹으려다 밥을 태워 먹었던 기억과,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시 우리에겐 기생충이 많아서 하얗고 긴 회충이 교실에서 나와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걸 잡아서 깨끗하게 없앤다고 생각해서 당시의 조개탄 난로에 그것을 집어 넣었다가 그 회충이 타는 냄새의 악취로 수업을 못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치마를 들추던 개구쟁이도 있었다. 그는 아마도 부유층 집의 자녀로 집에서 유모의 치마를 들추던 습관이 남아서 선생님에게도 그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튼 그냥 웃어 넘길 수 만은 없는 개구쟁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생 중학교인 오류중학교로 진학 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 아버지가 공무원이여서 영등포구청에서 새로 생긴 관악구청으로 옮기게 되어서 부득이 집을 노량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래서 오류중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새로 배치된 곳이 봉천동의 봉천중학교였다. 내가 초등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 가물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계속해서 초등친구들과 중학교, 고등학교에 갔다면 그들과의 유대관계도 높았을 것이지만 나는 중1까지만 이어지니 초등친구들이 몇몇은 생생하지만 많이 모르는 편이다.하지만 그 어릴적 기억들은 아주 생생해서 조금 지나고 만나고 보니 그때의 기억이 살아나기는 한다 그래서 내가 2001년 초부터 보험을 시작했는데 그후로 몇 해가 지나서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친구 찾는 것이 생겨나서 내가 주선을 해서 영등포의 지금은 없어진 시계탑 다방에서 10명이 모였다. 그때에 모인 멤버가 강영민, 박웅수, 어용덕, 이근환, 김종진, 봉미경, 이영성, 오깟네, 순임이(성은 몰것다), 손향순등 10명이었다. 이 멤버가 고칠회의 최초 모임 멤버였다. 만나서 이름을 짓자는 나의 제안에 나름 생각해보니 고척조등학교7회 졸업생이고, 삐뚤어진 이 세상을 고쳐보자는 의미로 이니셜을 따서 “고칠회”라고 내가 이름을 지어서 사용한 것이 지금의 고칠회의 효시이다. 이리하여 고칠회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때가 약 2003년이니 벌써 고칠회도 약 15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 15년 동안 사연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아직까지도 이어져 오는 것은 유년시절 그 천진난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아직도 변함이 없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가 이제는 40여년이 흘렀다. 초중고를 같이한 친구들은 약 40년 이상을 같이했을 것이고, 나는 15년전에 같이 했다. 친구들과의 살아온 gap(시간차)이 크다. 하지만 마치 우리는 40여년전의 친구들처럼 초등학교 친구라는 의미로 거리낌이 없고 아주 가깝다. 서로 조금은 모르더라도 그 어렵던 유년시절을 같이 보내고 잘 견뎌냈다는 생각으로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었으면 한다. 서로 수십년 이상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을 하였으므로 서로를 모르는게 당연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금씩 양보하면서 서로를 이해하자.20년 넘게 같은 이불을 덮고 잔 부부도 서로를 잘 모를때가 많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하는 김국환의 노래처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가난과 부유함을 서로 감싸주고 인정하자. 그 이유는 우리는 초등친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