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50장 17절 – 20절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시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하여 비전을 보이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랜드마크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배를 타고 갈 때 중요한 바위나 나무들이 랜드마크가 됩니다. 바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랜드마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즉 낮에 구름기등이 떠오르지 아니하면 모세는 진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불신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자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구름기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여 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는데 우리는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된 자들 두세사람이 모여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거기에 임하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두세사람이 모여 기도하면 주님이 당연히 그곳에 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얼굴을 구하여 설 때 하나님은 그곳에 임하십니다. 주의 임재에 민감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랜드마크로 능력의 역사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버리고 떠났어도 여전히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님께 예민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지만 그 징계는 심판과 다릅니다. 징계는 회복을 목적으로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은 멸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회복의 기회조차 없는 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 그 징계는 무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자비하시며 긍휼하시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긍휼이 있는 심판이지만 심판은 긍휼이 없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다가 다시 그 상처를 싸메어 주실 즉 회복하여 주실 랜드마크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애굽에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열재앙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바벨론포로된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바로 바사국의 왕을 통해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랜드마크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기도하는 자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포로된 기간이 칠십년으로 마치리라 하신 말씀을 읽다가 그 때가 가까워 짐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시대에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바벨론은 영원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행하실 회복의 역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앗수르의 멸망을 알았습니다. 앗수르는 강대국으로 당할 자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 앗수르가 하나님의 백성들인 북이스라엘에게 행한 악을 인하여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그 일이 괴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앗수르의 멸망은 앗수르의 자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앗수르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이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 먼 장래의 일이지만 앗수르의 심판이 랜드마크가 된 것처럼 언제가 다시 바벨론을 심판하셔서 그 바벨론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의 랜드마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후에 바벨론에 포로되었던 사람들은 포로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 삶이 그들의 죄와 그 조상들의 죄인 것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요시아왕이 율법서를 백성들 앞에서 읽게 하였을 때 회개의 역사가 이루어 진 것처럼 그리고 에스라가 율법서를 낭독할 때 수문앞에 모인 자들이 회개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정직함으로 설 때 회개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때가 바로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오늘날 강단에서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복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강단에서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복을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