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즐기는 이들에게 최고의 호사는 단연 '황제골프'다. 여느 국내 골프장들의 경우 팀 간 티업 간격이 좁아 한 홀이 끝나고 다음 홀로 이동하면 앞 팀이 페어웨이에서 사라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플레이가 지연되는 건 물론이고, 게임 리듬도 깨진다. 초보 골퍼들은 밀려드는 뒷 조의 압박에 연습샷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공만 날린다. 이런 골퍼들이 골프장을 홀로 전세 낸 것처럼 한산한 동남아 골프장에서 느긋하게 라운딩 하는 '황제골프'를 맛보고 나면, 골프가 원래 양치기들이 심심풀이 삼아 즐기던 놀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불볕더위에 앉아만 있어도 숨이 컥컥 막히는 요즈음,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산행에 나서면 "이 더운 날씨에 미쳤다고 산을 올라가나?"하는 타박을 많이 받는다. 편안히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계곡에서 물놀이나 즐기는 게 최고라는 거다. 하지만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다. 이즈음 조금 이름난 계곡은 추석 전날 대중목욕탕처럼 물 반 사람 반이다. 늦게 갔다가는 두 발 뻗을 자리 하나 구하기조차 어렵다. 반면 계곡을 거슬러 산속으로 들어가면 인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호젓하다. 산을 타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면 마음에 드는 계곡이나 소, 폭포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데, 사람 때 타지 않은 청정 계곡수를 남들보다 먼저 맛볼 수 있는 셈이다. 말 그대로 '황제산행'이다.
녹음 우거진 숲터널·시원한 계곡물 따라 산행
비수같이 솟은 암봉 오르면 탁 트인 사방 조망
인적 드문 시흥폭포서 황제 부럽지 않은 여유 만끽
18m 높이 장쾌한 용추폭포 보기만 해도 온몸이 서늘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위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기백산(箕白山·1,331m)은 깊은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용추계곡과 용추폭포로 이름나 있다. 용추계곡은 금원산 기백산 거망산 황석산 등 1천m급 이상의 고봉준령이 말발굽 모양으로 에워싼 골짜기다. 산자락을 따라 15㎞를 이어 계곡수가 세차게 쏟아져 흐르고,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예부터 시인묵객들의 풍류처로 유명했다. 이즈음 용추계곡가는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다. 레고 블록 쌓듯 촘촘히 세워진 물놀이객들의 텐트와 밀려드는 차량들로 번잡한 시골 장터를 연상케 한다.
반면 일단 산속에 발을 들여다 놓으면 분위기가 돌변한다. 한여름 대낮인데도 짙은 숲 터널을 이루고 녹음으로 우거진 골짜기는 서늘하다. 은둔거사처럼 심산유곡에 몸을 감춘 '비밀의 폭포'가 장쾌하게 폭포수를 쏟아낸다.
구체적인 등로는 용추사 일주문을 출발해 도수골~정상~누룩덤~전망 데크~기백산·금원산 분기점~시흥골~시흥폭포~사평마을~용추사~용추폭포를 거쳐 일주문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방식이다. 총 산행거리 11.6㎞에 순수 이동시간은 4시간 20분이 걸렸다.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용추사 입구 삼거리의 용추사 일주문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원래 신라 때 창건된 장수사의 일주문이었는데, 6·25전쟁 때 사찰이 전소된 뒤 그 자리에 지금의 용추사가 중건되면서 용추사 일주문이 됐다고 한다.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 옆을 지나 제법 넓은 도로를 따라 5분여 걸으면 길은 두 갈래다. 포장로를 계속 이어 걸으면 용추산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이다. 우측 기백산 등산로 안내판을 따라 용추계곡의 지계곡인 도수골 등산로로 들어선다. 북적거리던 계곡과 달리 이내 사위가 적막에 휩싸인다. 진달래 철쭉 단풍 산죽 때죽나무 보리수 고로쇠 나무 등이 초록의 스펙트럼을 연출하는 숲 터널이다. 숲 그늘에 들어왔지만 후텁지근한 지열 때문에 이내 땀범벅이다. 10분 뒤 벤치 쉼터를 지나면 돌연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와 감긴다. 우측으로 쉼 없이 콸콸거리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도수골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다. 계곡가에 붙으니 어둠과 시원함이 더해져 으스스한 기분마저 든다. 우렁찬 계곡물 소리에 산새 소리마저 파묻혀버린다.
세찬 계곡수에 흙이 씻겨 내려가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바위 너덜길을 50분쯤 오른 뒤 계곡을 잇달아 건넌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바위 사이로 부서지던 계곡수가 소를 만나 햇빛에 영롱하게 반짝인다. 계곡을 건너면 본격적인 능선이 시작되므로 식수는 충분히 채워두자. 기백산 정상 1.3㎞ 이정표가 서 있는 곳이 1천m 고지로, 지능선과 합류하는 안부다.
숲 터널을 따라 본격적인 가풀막이 시작된다. 숨을 몰아쉬며 지그재그로 능선을 치고 오른다. 50분 뒤 정상 200m 이정표를 지나면 잘 벼린 비수 같은 암봉이 날카롭게 일어선다. 동시에 조망도 시원하게 터진다. 왼쪽으로는 황석산과 거망산이, 오른쪽에는 남덕유산에서 시작해 금원산 기백산 황매산 자굴산을 거쳐 진주 남강으로 빠져드는 진양기맥의 마루금이 말발굽처럼 휘어진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서도 사방팔방의 전망이 막힘없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금원산 월봉산 덕유산 능선이, 서쪽으로는 칼날처럼 뾰족한 황석산과 피바위, 거망산 그 아래로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수도했다는 은신암이 둥지를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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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부 암릉 능선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누룩덤. |
정상 왼편으로 거대한 판석형 암석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듯한 암봉인 '누룩덤'으로 향한다. 봉우리의 바위들이 마치 누룩더미로 쌓은 여러 층의 탑처럼 생겼다 하여 누룩덤이라 불린다. 금원산으로 이어지는 칼바위 능선 위로 이 같은 누룩덤 2개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나란히 솟아 있다.
로프를 잡고 경사진 슬래브를 지나 데크 전망대를 거치면 기백산과 금원산의 능선이 갈리는 능선 삼거리다. 누룩덤에서 35분 소요. 가던 방향 그대로 계속 진행하면 금원산, 월봉산 산릉을 타고 덕유산까지 이어진다.
이정표상 왼쪽 시흥골 입구로 꺾어 내려가면 본격적인 하산이다. 다소 가파른 비탈과 너덜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40분 뒤 칠푼 능선 이정표에 닿으면 왼쪽 너른 반석 위로 세차게 계곡 물이 쏟아져 흐른다. 계곡을 건넌 뒤 오푼 능선 이정표에 이르면 우레 같은 계류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다. 무심코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데 이정표에서 우측 산사면을 따라 30m쯤 내려가면 '비밀의 폭포'인 시흥폭포가 있다.
평평한 반석을 따라 와폭을 이뤄 완만히 흐르다가 10여m 높이의 직벽을 만나 세상을 삼킬 기세로 세차게 쏟아져 내린다. 내리꽂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받고 서니 몸이 와류에 휩쓸려 그대로 떠밀려 갈 듯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폭포수에 이가 딱딱 떨리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폭포 옆에 너른 반석이 있어 느긋하게 누워서 몸을 말리기에도 그만이다. 로마황제 부럽지 않은 '황제탕'이다.
시흥골 물줄기를 따라 20분쯤 내려가면 민박집과 식당 등이 밀집한 사평마을이다. 그대로 직진하면 거망산으로 들어선다. 등산로 안내도 왼쪽 지장골 방면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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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m 높이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압권인 용추폭포. |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진리 삼매경에 빠졌던 곳이라 하여 심진동이라고도 불렸던 용추계곡은 그 경관이 수려하다. 철제 구름다리를 건너면 하얀 암벽인 피바위를 병풍처럼 두른 용추사에 이른다. 포장로를 따라 내려가면 10분 뒤 용추폭포가 위엄을 드러낸다. 18m 높이에서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쾌하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폭포 근처에만 가도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최고 수심이 7m에 이르러 물놀이는 아무래도 어렵다. 다시 10분여 걸으면 종점인 용추사 일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