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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는 왜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는가?
고린도전서 11:2-16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고등학교 때 시화전이 열렸는데, 제가 너울을 쓰고 기도하는 소녀 그림을 그려서 진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아무 의미 없이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여서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이들이 내용이 아니라 겉모습만 보고 영적인 음녀가 된 가톨릭 교회에 끌리는 것을 봅니다. 가톨릭에서는 여자들이 너울를 쓰고 미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예배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성경적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너울을 쓰라는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반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쓰라고 했는데, 개신교도 너울을 써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찰스 크래프트 박사가 나이지리아에서 선교 사역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새 신자들이 "서양의 크리스천들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에는 순종하면서 왜 너울에 대한 명령은 순종하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의문입니다. 심지어 실력 있는 학자인 권연경 교수님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두 건에 관한 바울의 명령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예배 시 여성들의 복장에 관한 논의가 나온다. 바울을 결론은 여성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라는 것이었다(5-6절). 어쩌면 머리를 길게 하라는 명령일 수도 있다(15절). 본문 자체가 다소 모호하여 문제가 되는 것이 긴 머리인지 두건인지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바울은 이것이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안임을 분명히 한다.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바울은 창조의 질서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전거(8-9절) 외에도, 본성의 논리(14절)와 교회의 관습(16절)까지 동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바울은 달리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 바울의 말을 좀 쉽게 풀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의 논조에 가깝다. 여자들은 예배 시에 머리에 두건을 반드시 써야 한다. 이것이 바울을 가르침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바울의 강한 어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도 이에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 써야 한다'고 명령하는데, 이 무슨 배짱일까? 이러한 우리의 강단(剛斷)은 소위 '문화상대주의'적 판단에 근거한 것일까? ...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신학은 문화상대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는 세심한 적용의 필요보다는 상대주의적 논리가 복음의 절대성을 훼손할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
그러기에 성경에 단호한 명령에 대한 이런 태연한 '무시'는 더욱 놀랍다. ... 두건을 쓰라는 바울의 명령이 우리에게 적용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명령을 가볍게 무시한다."
저도 이 글을 읽고 그러지 않아도 의문이었는데, '정말 우리 교회라도 너울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고민했었습니다. 진지한 성경연구자들과 목회자들 중 이런 고민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총신대 이한수 교수님은 본문에 대해 매우 이채로운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 여자가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고 할 때 바울은 어떤 '베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바울은 직접적으로 '수건'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머리 위에 드리운'(카타 케팔레스 에콘, 11:4) 또는 '가리운'(카타칼립토스, 11:6, 7, 13)이란 표현들을 사용한다. 바울은 이렇게 베일의 성격을 명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리운 것을 반드시 수건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15절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덮을 또 다른 수건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거절한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긴 머리로 족하다는 바울의 생각이 강하게 개진되기 때문에 그는 그에 관해 변론하려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자신이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관습이 없다고 주장한다. ... 아마도 바울의 결론적 진술은 여자가 독특한 머리를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수건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린도의 보수적인 신자들을 겨냥한 말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들에게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수건을 쓰는 것과 같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이 구절은 머리를 길게 하면 너울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김세윤 교수님이 옳게 지적한 대로 바울이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기 때문에 자연적인 것 - 여자의 긴 머리채: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 - 을 하나님의 뜻의 반영으로 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여자는 머리를 덮어야 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더구나 15절은 13절로부터 시작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가리지 않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타칼륍토스'는 '쓰거나 가라우지 않은', '덮지 않은'(uncovered), '벗은'(unveiled)이라는 뜻입니다. 즉 너울에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수님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반드시 예배 때 여 성도님들이 너울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이 문제를 풀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선은 성경이 이것을 명시적으로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성도님들이 가톨릭에 미혹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본문을 꼼꼼히 따져보고 연구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 너울을 쓰는 것에 대한 본문 연구
우리가 여 성도들이 예배 때 너울을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를 결정하려면,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본문의 각 절을 순서대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비록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있었으나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이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전한 복음과 진리 그리고 지침들을 대개는 받아들이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그 점을 칭찬하였습니다. 여러분도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그리고 순종하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일반적인 순종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책망해야 할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책망하기 전 책망의 근거가 되는 원리부터 진술합니다. 왜냐하면 원리에 동의하게 함으로써 그 원리에 나오는 결론에도 동의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3절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가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머리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은 오래도록 뜨거운 논쟁을 했습니다.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3절과 12절의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라는 구절을 고려할 때, 머리가 우월한 계급과 지배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가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고든 피(Gordon D. Fee)는 8절과 12절에 근거하여 머리가 원천(source) 또는 기원(origin)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면에서 가부장적인 구조를 없애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바울의 말에 대한 계급적인 해석에 불편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기 있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머리에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머리에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주어진 역할의 차이에서 오는 권위의 의미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11:10).
크레이그 블롬버그는 "우리의 문제의 일부는 복종과 동등성을 동시에 가능한 것으로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얼리 엘리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동등성과 복종'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두고 계급과 서열의 구분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은 대단히 현대적인 현상이다. ... 일반적으로 바울은 신약성경처럼 가치의 평등성과 계급의 다양성을 꽤 조화롭게 묶어두고, 현대의 평등주의와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다양성의 문제를 해결한다. 다른 것들처럼 이런 이슈에서 바울 사도는 그의 기독론으로부터 문제의 열쇠를 발견한다. ...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역할을 이룸으로써 보여주셨다."
실제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하지만 성부 하나님께 부여된 역할과 위치는 성자 하나님께 부여된 것과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도 평등합니다. 동시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유사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크레이그 블롬버그는 이것을 본문에 나오는 진술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습니다.
"비유적으로 언급되었을 때, 머리의 두 주요한 의미는 '근원'이나 '권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 두 의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예를 들어, 엡4:15은 '근원'이고, 엡1:22은 '권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인접한 문맥에 달려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여기서 바울은 8-9, 12절에서 남자와 여자의 기원으로부터 논증을 하면서 10절에서 권위(헬. '엑수시아')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함으로써 혼합된 표시를 전달하고 있다. 바울이 여자 위에 있는 '머리'로 남자를 칭하는 다른 단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역시 가리킴으로(엡5:22-24) 여기서도 역시 '권위'가 약간 더 가능해 보인다."
이한수 교수님도 이와 일치하는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머리라는 말이 '권위'와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첫 번째 예로, 바울은 머리라는 말을 에베소서 5:23과 1:22-23 두 군데서 사용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남편이 모두 '머리'라고 지칭되며, 따라서 교회 또는 아내는 그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또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1장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인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이제 그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20절).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된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기 때문에 만물과 교회를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만드셨다(22절). 이 구절이 머리와 발의 언어를 사용한 것은 머리 되신 예수께서 만물을 통치하실 수 있고 또 만물은 마땅히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었다.
그 다음에 5:23을 살펴보자. 이 구절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근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이 남편도 아내의 머리 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어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권위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다스림과 복종의 동일한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이처럼 '머리'라는 단어에는 근원뿐 아니라 권위라는 의미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권위'가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여성에 관한 질문들』이라는 책에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인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입니까?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다음 성경 말씀에서 명백한 진술인 듯합니다.
고전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But I would have you know, that the head of every man is Christ; and the head of the woman is the man; and the head of Christ is God.)
그러나 킹 제임스 외의 몇 가지 다른 번역들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이 구절이 실제로는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5:23 말씀과 같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 11:3 (웨이머스 역)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그의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I would have you know, however, that of every man, Christ is the Head, that of a woman her husband is the Head, and that God is Christ's Head.)
고전 11:3 (워렐 역)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바라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But I wish you to know that the head of every man is Christ, and the head of the wife is the husband, and the head of Christ is God.)
자,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의 머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한 명의(one) 여자, 즉 자신의 아내의 머리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every) 여자의 머리는 아닙니다."
또 같은 책에서 해긴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남자'와 '남편'에 쓰인 헬라어는 아네르(aner)라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에는 '남편'이라는 단어가 따로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아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라는 뜻의 헬라어 귀네(gyne)는 '여자'로도 '아내'로도 번역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이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그것이 여성 일반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오직 아내들에 대한 이야기인지를 문맥으로 가려내야만 합니다. 바울은 때로 여성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다른 때는 오직 아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단락들은 아내의 역할과 관련하여 번역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본문 말씀(고전 11:3)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모든 남자들의 머리가 되시듯이, 모든 남자들이 모든 여자들과 그런 관계를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과연 그런가?' 하고 헬라어 원문을 찾아보았는데, 실제로 본문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가 '아네르'와 '귀네'로 각각 같은 단어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크레이그 블롬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10절에서의 또 다른 논쟁의 이슈는 NIV가 일관되게 '남자'('아네르')와 '여자'('귀네')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의 번역과 관련이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용어가 동시에 나오는 다른 모든 곳에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2:8-15을 제외하고서 그 용어를 남편과 아내를 가리키는 것으로 언급한다. 바울이 모든 여성에 대한 권위가 모든 남자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렵고, 그 단락을 남편과 아내를 의미하는 것으로 계속 해석한다면(예를 들어, 5절) 훨씬 더 쉽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에 대한 언급(8-9절)은 전자 곧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으로 이해할 만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전형적인 남자와 여자일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결혼한' 커플이다. 바울이 7장에서 독신과 과부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서의 모든 여성이 심지어 족장사회에서조차도 필연적으로 모든 경우에 구체적인 남성의 권위 - 즉, 남편이나 아버지 - 아래 살고 있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따라서 NRSV가 3절의 중간 어절을 '남편은 아내의 머리다'라고 번역한 것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의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는 말씀을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마땅합니다.
한편,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던 중 조용기 목사님의 『희망목회 45년』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난 글을 읽었습니다.
"성경은 여성들의 리더십을 인정하되 그것은 항상 한 남자의 권위, 특히 사도의 권위 아래에 놓여있었다. 예를 들자면 바울은 여성들이 예언을 할 때(고전11:5) 머리를 가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은 그녀의 머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예언하는 것은 자유였고 예언이 하나의 설교의 형태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에는 그들이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
나는 여자들에게 한 가지 재미있는 요구를 했다. 나는 마치 바울이 여자들은 예언을 할 때 자신의 머리들을 가려야만 한다고 명령한 것처럼, 최 전도사와 모든 구역장들이 나의 권위 아래 있다는 표시로 모자를 쓸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이에게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의 권위 아래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상황을 적용해보니 괜찮아 보였다."
이것은 문제가 될 만한 심각한 오류는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옳게 파악하지 못해서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입니다. 즉 여기서 남자와 여자가 남편과 아내를 의미한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즉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는 구절의 의미가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라는 것은 우리에게 '머리'가 뜻하는 '권위'의 특성을 옳게 파악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오는 머리가 뜻하는 권위는 힘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희생하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에베소서 5:22-33)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권위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 됨은 평등과 반드시 양립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인 것처럼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면 성부와 성자가 평등하신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머리 됨은 어느 정도의 지도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지도력은 '권위'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표현된다."
같은 책에서 그는 권위에 대해 더 자세하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권위적인' 남편에 대해 모든 결정과 명령을 자신이 내리고, 순종을 기대하며, 아내를 억누르고, 그녀가 성숙한 혹은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을 막는 권세를 부리는 인물로 상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이 묘사하는 '머리 됨' - 그것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 이 아니다. 분명 '머리 됨'은 그리스도가 자기 신부에게 구애하고 애정을 얻기 위해 오신 때에 보이는 어느 정도의 지도력과 주도권을 의미한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신부에게 자신을 바치셨을 때처럼, 사랑하는 자를 위한 희생, 자신을 바침을 의미한다. 만일 '머리 됨'이 어떤 의미에서든 '힘'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짓밟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힘, 자기 성취를 좌절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남편의 사랑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신부를 위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죽기까지 자신을 복종시키셨다."
에베소서 5장에서 예수님이 머리 됨의 권위를 어떻게 행사하셨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그것이 남편들이 권위를 가지고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것은 한국의 가부장적 가장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권위주의에 사로잡혀서 독선적이고 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고 희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권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2-45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남편들뿐 아니라 모든 권위 있는 자들 즉 모든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역자 그리고 모든 셀장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권위를 남용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