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여 전화를 드렸다. 여전히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생각하고 있는 참”이라고 하셨다. 반가움의 표현이거니 생각했는데 “마침 양평에 올라와 있는데 내일 아침에 만날 수 있느냐”는 말씀에 바짝 침이 말랐다.
작년 지리산 매화가 눈을 뜰 무렵에 산청에서 뵈었을 때, 온 힘을 기울여 쓰시던 글이 완성되었음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평생 수행의 결실을 한 권의 책으로나마 남겨 “후배들이 좀 덜 헤매고 밝은 길을 가길 바란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던 것.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아침, 도봉산 언저리에서 성원(性元 85)스님을 만났다. 먼저 A4용지에 꼼꼼하게 쓴 글을 복사하여 묶은 얇은 책 하나를 내놓으셨다. ‘정법송(正法頌)’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 왔다.
조계학인의 바른 수행 길은 정법안장에 있네. 범천왕의 간절한 요청으로 불법이 비로소 시작됐네. 부처님 법의 요지는 세 곳에서 전하셨는데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신 염화미소이고 다자탑 앞에서 나투신 반자리를 나눔이요 사라쌍수 아래서 곽 밖으로 나투신 두 발이시네. 능엄에서 설하신 설산의 대력백우는 진성의 출현 소식이요 진성의 첫 걸음은 두정(頭頂)의 니환궁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네. 업식의 본래 고향은 배꼽아래의 명문이요 업을 벗어나기 위한 첫 출발에는 능엄신주를 반드시 외어야 하고 진성과 업식의 동행쌍수라야 생로병사가 있는 화택을 가히 벗어날 수 있다네. 소를 찾는 목동 조계의 학인아! 삼처전심하신 수행정로에 들어와 용맹정진하여서 환골탈태하는 영방(靈方)을 찾아 나가소서.
삼처전심은 결론 아닌 수행과정 정법안장의 근본원리 설명한 것
-글은 읽겠는데 뜻은 이해할 수 없군요.
“자네가 잘못되었거나 내가 잘못된 것이겠지? 우리가 이 한 구절 글로 말이 필요 없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지난 열반재일에 이 글을 완성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평생 짊어지고 오던 짐을 일순간에 내려놓은 기분이랄까? 아무튼 차근차근 읽어보면 뭔가 열리는 것이 있을 것이네.”
-그동안 생각해 오던 삼처전심(三處傳心)과는 좀 다른 관점이 아니가 싶습니다만?
“그렇게 보이나? 우선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말을 먼저 봐. 뭐가 보여?”
좀 난해했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정법안장이니 삼처전심이니 하는 단어야 기본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콱 막히는 느낌 내지는 목 줄기가 켕겨 오는 기분. 정법안장이야 선불교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부처님의 바른 법이 교외별전의 수단을 통해 전승되어 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삼처전심은 말 그대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니 염화미소를 비롯한 유명한 세 가지의 일화를 뜻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삼처전심은 정법안장의 시원(始原)으로 부처님이 가섭에게 비밀하게, 교외별전으로 전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성원 스님이 지은 ‘정법송’을 눈으로 읽자니 이 두 단어의 개념이 상당히 난해하게 다가왔다. 머리를 긁적이고 물을 한 잔 마셔야 했다.
-글쎄요.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조금 전에 ‘그렇게 보이나’ ‘먼저 봐’ ‘보여’ 라는 말로 자네에게 질문을 했지? 그 짧은 질문에 본다는 말이 세 번이나 들어 있어. 정법안장의 안(眼)자는 눈을 뜻하지? 해석하면 눈에 감춰진 바른 법이 되잖아? 여기에 삼처전심의 의미를 풀어가는 중요한 힌트가 있어. 자, 먼저 염화미소(拈花微笑)야.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시니 가섭이 그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는 이야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부처님이 꽃을 들고 가섭이 웃었다는 것만 생각했지 부처님이 든 꽃이 어떻게 가섭에게 전해졌는가를 생각하지 않았어. 가섭은 눈으로 그 꽃을 본 거야. 부처님이 든 꽃을 눈으로 인식하고 눈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의미를 간파하고 웃었던 것이지. 그렇게 부처님 마음이 가섭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두 분의 마음이 같아졌다는 것이지. 먼저 안장의 단계, 눈 안에 감춰진 진성(眞性)을 파악하는 지혜를 드러낸 단계가 완성된 것이지.”
-그러고 보니 우리는 ‘본다’는 말에 인식하고 느끼는 받아들이는 감각의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있습니다. 팔정도의 맨 처음이 정견(正見)인 것도 그렇고.
“그러니까 육신의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부터 정리가 되어야 하는 거야. 불교는 마음 닦는 종교라고 하지? 너도나도 마음, 마음 하고 입만 열면 마음타령이야. 마음이 어쨌다고? 마음이 저절로 병들고 악해지고 비겁해지고 그러는가? 참마음 이라는 말도 자주 쓰던데 마음에 참 거짓이 따로 있다는 것인가? 아니지. 마음, 그러니까 진성이나 반야는 병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이 병들고 고장 나서 마음작용을 흐리게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마음을 닦는다고 소란피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관계를 잘 알고 몸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마음과 원융하게 하는 것이 수행의 바른 길이야.”
-염화미소의 일화는 진리를 상징하는 꽃을, 눈으로 바로 보아, 본래청정한 마음을 증득하는 소식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무슨 말이 그렇게 장황해?”
잠시 침묵. 그리고 스님이 ‘다자탑전시분반좌(多子塔前示分半坐)’를 설명 했다. 염화미소에서 눈 안에 비밀스럽게 감춰진 진리를 터득했으니 부처의 자리와 가섭의 자리가 하나로 계합되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부처인 나와 제자인 네가 함께 있어야 중생병이 고쳐진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스님이 ‘정법송’ 해설부분에 이렇게 해석되어 있다.
‘염화미소로 얻어진 진성(眞性)을 눈을 통하여 영입(迎入)하여서 사대육신의 현장에 들어오도록 유인하여서 명궁(命宮)에 살고 있는 목녀(木女, 業識의 비유)의 유혹을 받아 명궁에 합궁(合宮)하게 되면서 진기(眞氣)가 발생하고 그 진기의 위력으로 허물어져가는 인체육신을 수리하고 다니는 그 묘상(妙狀)을 그려낸 것이다. 인식을 통해 들어 온 진성과 명문에 살고 있는 업식이 합가(合家)하면서 묘력을 발생하고 그 묘력으로 업장을 소멸해 가는 묘행이 시작된다.’
‘분반좌’의 일화에서 부처는 절대진리 즉 진성이고 가섭은 의식의 상징이니, 중생심을 벗어던진 가섭이 부처의 경지에서 함께 노니는 것이다.
진성과 업식이 한 집에서 만나 묘행의 힘 기르는 것이 수행
-곽시쌍부는 ‘생사의 초월’ 내지는 영원한 진리의 상징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지. 누가 아니라고 하겠나? 진성을 받아들이고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된 다음은 어떻게 되겠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지. 곽이라는 껍질을 깨고 두 발로 나간다 이거야. 사대육신의 인체 안에 저장된 업식의 유전자를 지워가는 것이 수행이야. 그런데도 마음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뭐가 되겠는가? 삼처전심은 그저 세 군데서 비밀히 전한 결론이 아니고 그 자체가 수행의 과정인 것이야. 부처님은 이미 생전에 수행의 길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 속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겉모습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거야. 다시 말하지만 마음도 반야도 병드는 것이 아니야. 육신의 업식이 정화되지 않아서 끌려 다니면서 고통 받는 것이지. <능엄경>에서는 히말라야 설산의 ‘대력백우(大力白牛)’ 얘기가 나오는데, 바로 그 놈이 보리(菩提, 진리)의 종자거든. 알고 보면 우리 몸의 구조 또한 삼처전심의 묘행을 보여주고 있어. 전통 사찰의 가람배치도나 티베트의 태장계도, 우리나라의 지형도 역시 이러한 이치를 도상의 기본으로 하고 있지.”
스님의 설명은 자세했지만 듣는 귀가 어두워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진성과 업식의 계합과 출입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라는 입장에서 들은 바는 이렇다. 두정(頭頂), 즉 정수리에는 진성이 드나드는 문이 있다. 불화에서 불보살의 정수리에서 우주의 온갖 기운이 들어오고 나오는 모습이 그려진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인체로 드나드는 진성의 표현인 것이다. 인체도에서 사람의 머리 부분이 가람배치도의 법당자리이고 불화에서는 부처의 자리다. 한반도지형으로는 백두산 천지에 해당된다.
두 눈을 통해 정법안장이 드러나는 것이니 가람에서는 석등을 밝혀 우주로 빛을 내보내고 불화에서는 좌우의 협시보살을 통해 진성의 빛을 중생계로 비춘다. 한반도는 백두대간의 줄기를 따라 진성이 흐르고 있으니 자장율사의 5대 적멸보궁이 그 기운의 출현이다. 몸의 신장 부분은 가람에서 양쪽 계단으로 설치되어 가교가 되니 불화에는 수많은 보살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으며 한반도에는 끊임이 없이 산맥이 흐르고 이어지며 정맥을 형성한다.
인체의 단전은 가람의 보제루다. 진성과 업식이 합궁하는 곳이라 했으니 명궁(命宮)인 것이다. 불화에서는 보살의 세상에서 중생계로 통하는 부분으로 묘사되고 한반도의 지형상으로 보면 지리산과 영축산 등 대간과 정맥의 기운을 갈무리하는 큰 산이다.
단전에서 융합한 진성과 업식이 두 다리로 내려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가람에서는 계단을 통해 일주문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표현 된다. 곽시쌍부다. 불화에서는 연꽃이 만발한 중생계이니 이미 중생계에 극락이 갖춰져 있음이다. 묘하게도 한반도에는 남쪽에 수많은 섬이 있고 바다멀리 제주도가 솟구쳐 있다.
-뭔가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쉽지는 않습니다.
“자네는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지 설산의 ‘대력백우’를 기르는 목동은 아니잖아. 앞으로는 소를 길러 봐. 이 사람아. 그렇게 세상만사 신경 쓸 것 다 쓰면서 소는 언제 키워? 하하하.”
성원 스님은 1958년 불국사 석굴암으로 출가하여 다음해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대종사의 문하로 입실했다. 1961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은 뒤 30여 년 동안 각종 종무소임을 맡았다. 소임을 맡은 가운데 <금강경> 10년 독송의 발원을 성취했고 일종식과 장좌불와의 관음100일기도 성취, 1000일 간의 <반야심경> 사경과 <금강경> <법화경> 사경 등을 원만 회향 했다. 1988년 이후 제방 선원과 토굴 등지에서 수행에 전념해 오고 있다. <수행 날개를 달다> 등 수행안내서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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