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독일, 그리고 존재의 가벼움
7월의 태양, 그 열기를 무색케 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이제 잦아들었다. 물론 한국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어느 월드컵 때보다 냉랭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조기에 탈락해 버린 대표팀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이 그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구의 수많은 나라 중에 32개 나라에 뽑혀 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2년의 성취에 한국인들의 기대치는 너무 높아져 버렸다.
난 한국의 조기탈락에도 불구하고 쓰릴 넘치는 축구시합에 기꺼이 밤잠을 설쳤다. 무엇보다 독일 때문이었다. 여전히 독일을 제2의 고향쯤으로 여기고 있는 내게 독일 경기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내 응원에 힘입어 독일은 승승장구하여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24년 만에 금빛 월드컵을 베를린으로 가져 온 독일 선수들은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축구라면 누구 못지 않은 열렬 팬인 메르켈 총리는 경기를 보러 두 번이나 브라질로 날아갔다. 여기에 대해 정치적 반대 진영의 몇 몇 경우를 제외하면 독일 언론은 거의 태클을 걸지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은 오히려 환호했다. 비행기 기름값까지 따지던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기실 요즘 메르켈 총리에게 태클을 거는 게 쉽지 않다. 메르켈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2005년 이후 요즘처럼 인기가 높던 적이 없었다. 그가 이끄는 독일은 통독 후유증을 극복하고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데 이견을 들이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외교적으로도 독일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해마다 BBC가 조사해 발표하는 국가평판 서열을 보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독일이 1위를 차지했다.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방글라데시에서는 희한한 장면이 하나 연출되었다. 3.5km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크기의 독일 국기가 한 운동장에 펼쳐진 것이다. 호세인이라는 63세의 방글라데시 농부가 만든 것이다. 그는 예전에 신장병이 걸려 죽기 직전이었는데 독일 약을 먹고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가 월드컵을 앞두고 땅을 팔아 독일국기를 만들어 독일의 승리를 기원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3세계에 대한 독일의 막대한 지원과 관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세계가 그러한 독일을 부러워하고 있고 독일인들도 드디어 독일인임을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시작했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님을 말한다.
브라질에서 독일팀이 시합하는 날이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은 'Schwarz-Rot-Gold'의 삼색 독일 국기가 하늘을 메웠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최소한 14년 전 지난 세기까지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나치 원죄 때문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독일인들이 범국민적으로 자국의 국기를 들고 퍼블릭 뷰잉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02년부터일 것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나도 뮌헨에서 생생히 체험한 일이지만, 축구시합이 있는 날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집단으로 응원을 했다. 그때 클린스만이 이끄는 독일 팀은 3위를 했다. 독일 사람들은 이 월드컵을 '여름동화Sommermaerchen'라고 명명할 만큼 행복한 경험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3위라는 축구성적 때문만은 아니다. 세 번이나 우승한 전력이 있는 독일에게 3위는 사실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21세기에 치른 월드컵은 전후 독일인들이 범국민적으로 그리고 세계를 향해 대놓고 국기를 흔들며(심지어 국가까지 함창하기도) 꺼리낌 없이hemmungslos 독일을 외치는 계기를 제공했다. 여기에 대해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언론이 나치 원죄로부터 결별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독일인들에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은 '여름동화'를 넘어 '여름전설Sommerlegende'이 아닌가 싶다. 2006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방식으로 독일들은 대놓고 열광하며 독일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단순히 24년 만에 따온 월드컵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이고 이 상징의 휘장 너머에는 새로운 독일의 부각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있다고 식자들은 분석한다.
실제로 요즘 독일은 전에 없이 상한가를 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최고의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중소기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구조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유로화 위기에도 끄떡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유럽 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자국에서는 '독일의 어머니Mutter Deutschlands'로 칭송받는가 하면 밖으로는 '유럽의 여제Kaiserin von Europa'로 불릴 정도이다. 메르켈의 여유와 자신감은 소위 전통적인 우파이면서도 좌파인 가우크 대통령을 브라질 축구장에 대동하고 나타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독일의 부상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여전히 나치의 악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독일을 향해 쉬지 않고 옐로우 카드를 날리고 있는 이유이다. 가령, 메르켈을 ‘유럽의 여황제’로 표현한데는 노골적인 경계심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독일은 서서히 과거사로부터 탈피하고 있는 모양새다. 대표적인 진보 매체인 슈피겔은 7월 14일자 판에서 이러한 현상을 “이완된 민족 Die entkrampfte Nation”, “新가벼움 Die neue Leichtigkeit”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영어판에서는 “참을 만한 존재의 가벼움 The 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란 표현을 썼다. 이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1984년에 나온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따온 표현이다.
축구와 독일을 이야기하는데 어찌 저런 철학적인 표현을 대동하는가? 과연 독일답다. 그런데 꾼데라가 원래 쓴 ‘가벼움’에 대한 불어Légèreté가 어떤 뜻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독일어 Leichtigkeit나 영어 Lightness는 분명히 그 뜻이 이중적이다. 즉, ‘하찮고 경박하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명랑하고 경쾌하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작금에 독일인이 보여주는 ‘방방 뛰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천하에 몹쓸 죄를 지은 민족으로서 진중치 못하고 경박한, 더 나아가 위험하기까지 한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독일인들도 기쁠 때 기뻐하고 잘 했을 때 자랑하고픈,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나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방방 뛰는 것, 위태롭기도 하지만 이제는 '참아줘야 하는, 참을 수 밖에 없는 가벼움' 아닐까?
‘축구와 독일’이라는 화두와는 별도로 나는 슈피겔의 글을 읽다가 쿤데라의 화두에 잠시 발목이 잡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못 참으면 어쩌겠단 말인가. 쿤데라의 생각을 확대 해석하면 존재가, 즉 삶이 가벼운 것은 두 가지 상반되는 전제에 근거한다. 존재는 영원히 회귀하거나 철저히 일회적이거나. 두 경우 다 가볍다. 전자의 경우,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에 굳이 무게와 의미를 둘 이유가 없다. 반면에 인생이 일회적이고 결코 연습을 허용하지 않는 일회성 그 자체라고 하면 어떤가? 한 없이 무거워야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삶, 딱 한 번으로 끝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무슨 무게가 있겠나? 가벼움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독일 속담에 ‘한 번은 번이 아니다 Einmal ist keinmal.’라는 말이 있다. 소설 속에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인생, 그래서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이놈의 인생, 가볍게 경쾌하게 살 수밖에는. 참을 수 없기는커녕 참을 거리도 없는 것.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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