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아직 푸른 행성이 크게 보이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우연스럽게도 우리와 별 다른 차이 없는 걸 먹어서 다행이었다. 역이나 공항이 그렇듯 맨 위의 정거장으로 올라오자 불꺼진 상가들이 수도 없이 들어차 있었는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다.
"흐응."
오자마자 지쳐 곯아떨어진 제느는 중간에 일어나 통 조림 몇 개를 쓱싹 해치우더니 또 마냥 잤다. 나한테 업혀서 왔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피곤해 한다.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뭐가 나타날지 몰라 눈을 뜨고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여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워낙에 심심해서 제느의 머리카락으로 장난도 치고 가슴도 주물럭거리고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정말 가질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렇게나 뼈저릴 줄은 몰랐는데 다음부턴 게임기나 컴퓨터라도 하나 가지고 다녀야겠다.
"후암."
제느가 몸을 뒤척이더니 살짝 눈을 떴다. 멍하니 천장을 보는 것도 지겨워 막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눈이 딱 마주쳤다.
혀를 쏙 내밀어 날름거린 제느가 일어나 엎드렸다. 행성의 빛에 파랗게 빛나는 은색 실들이 물결치고 헐렁하게 입은 티셔츠 안쪽으로 우윳빛 살결이 흔들리는 것이 보여 얼굴이 뜨거워졌다.
"일어났을 때 우리 자기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라는 건 당신을 잃고 나서 처음 알았어."
"어, 그래."
언제는 또 몰랐나. 그런 생각을 해도 입 밖에 내지 않은 건 빙그레 미소를 짓는 제느의 입술 때문이었다. 하도 실컷 자서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일부러 망치고 싶지는 않다.
제느는 무미건조한 내 대답에 입술을 삐죽이며 잔뜩 불만 있다는 듯 으르렁대다가 다시 얼굴이 바뀌어선 히히히 웃었다.
"자기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일주일 동안 어땠어?"
일주일? 무슨 일주일이지? 슬쩍 눈치를 보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뭔지모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설마, 그 일주일을 말하는 건가?
"어, 그…."
어찌하여 잊으랴. 얼렁뚱땅 이상하게 맺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난생 첫 여자친구가 그렇게 갔으니 정말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때 정말 넋을 잃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잘 버텼다. 그런데 진짜로 하늘로 갔으면 정말 슬프디 슬픈 연애이야기가 되었을 텐데 지금 이렇게 살아서 눈앞에 있는 개구쟁이를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뭐야? 웬 한숨?"
여신님 치마폭에 폭 싸여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요즘에 그래도 여자친구, 혹은 마누라라고 있는 게 여신이니 험한 꼴 보더라도 영영 이별할 걱정은 별로 없어 다행이다만 그런 일은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차마 앓아 누웠다고 하긴 부끄러워서 싫었다. 고고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 골탕먹이길 너무나도 좋아하는 이 아가씨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간 도대체 얼마나 더 털릴 지 알 수가 없다.
"그 때야 뭐, 그냥 그랬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슬쩍 눈치를 보니 제느의 팔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야!"
몇 일 전에 쇳덩어리를 맞을 때도 아프지 않았는데 꼬집는 게 왜 이리 아픈지 모르겠다. 그 손에는 강철 손톱이 달린거 아냐?
"다시 말해봐."
하지만 제느의 표정이 정말 무서웠다. 날카롭게 눈을 치켜 뜨고 바라보는데 은색 눈동자가 명백히 화 나 있었다. 그냥 평소처럼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걸 보니 가슴속이 뜨끔거렸다.
"아, 저. 그게."
당황해서 얼버무리려고 하니 제느가 빠드득 이를 간다. 엄청나게 무섭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나 저기."
"그게 아니면 뭔데? 똑바로 말해."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이 목구멍에서 막혀 올라오지 않았다. 뱀을 대한 쥐의 기분이 이럴까? 혀가 오그라드는 것 같아 침도 삼킬 수 없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기백을 담고 똑바로 노려보는데 저게 사람 맞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살벌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미안해. 그냥 아무것도 못했어."
"흐응?"
솔직히 이실직고하자마자 울고 싶어졌다. 순식간에 제느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옥죄어오던 분위기가 다 사라지고 빙긋 웃으며 자기가 승리했다는 듯 으스댄다. 진짜로 정말 같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는 걸 보면 능수능란한 술수에 그대로 놀아났다는 것이 된다. 6만 5천년이나 살았다고 하더니 속 안에 능구렁이가 수백만 마리는 살고 있는 것 같다.
"진짜 너!"
"응? 왜요오?"
뒤늦게 억울해서 소리쳤더니 애교 부리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제느가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전혀 모르겠다는 투에 열불이 치솟았는데 얘는 한술 더 떠서 입을 봉하려는 수작인지 위로 올라와 가슴으로 얼굴을 덮었다.
"우픕."
"우리 자기 많이 힘들지? 자기가 힘들어하면 나는 가슴이 아파. 그러니까 내 품에서 쉬어."
"어, 윽! 너!"
허우적대다가 가슴을 잡고 밀어내자 제느는 외려 더 좋아했다.
"아앙. 좀 더 부드럽게 잡아줘."
그 사이에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정말 남자 녹이는데는 천재라니까.
"쳇. 나 삐질거야."
제느의 허리를 붙잡고 사랑스러운 계곡 속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힘이 약해 사람이나 다름없는 분신이라 몸에서 나던 향기가 미약하다. 짙게 뿌린 화장품 냄새와 달리 아무리 짙어도 상쾌했던 그 냄새가 정말 미칠 듯 그리웠다.
"제느야. 우리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돌아갈 수 있어. 아니면 내가 찾으러 올 거야. 나는 절대 포기 안 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느는 확신을 담아 말한다. 그 단호한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미안해."
"뭐가?"
제느는 자주 뜬금 없이 모르는 말을 한다. 성격이 원래 그런건지 여자들은 다 그런건지, 여자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같이 다닌지 오래 되서 그런지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분간이 간다.
"자기가 그냥 그랬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화가 났어. 당연히 그럴 수 있는데 자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라고 느끼니까 마음이 이상해지는 거야. 나한테는 6만년이지만 당신한테는 겨우 한 달이나 지났을 때인데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한 것 같아. 미안해."
그냥 농담 한번 한 거라고 말하려다 생각이 다른 곳으로 미쳤다. 내 궁색한 변명을 제느는 진짜로 알아듣고 마음이 상한 것이다. 아까 그 눈빛은 진짜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는데, 말이 이렇게 어려운 건가 보다. 가까운 사이라서 더 크게 실수한 것 같다.
"그럼, 말야. 아무 기억도 못하는 나를 처음 봤을 때는 어땠어?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물어보았다. 대체 살아 온 생애동안 기약도 없이 찾아다닌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제느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일어나서 티셔츠를 벗었다. 푸른빛에 나신이 드러나자 그 윤곽만으로도 아찔하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모은 제느가 여보라는 듯 은빛 실들을 앞으로 넘겼다. 길다란 끝이 나에게까지 닿아 간지럽혔다.
"자기는 나를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어?"
입술 끝을 길게 늘이며 제느는 다시 물었다. 말하기 싫은 건가? 하지만 그냥 답해주기에는 손해보는 느낌이라 싫은데. 그래도 아까처럼 그럴까봐 또 무섭다. 난 벌써 단단히 잡혀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일단 튕겨본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자꾸 그러면 더 삐진다?"
제느의 손이 아래로 가더니 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자기 혹시 생각해 본 적 있어?"
"뭐, 뭘?"
단추를 끄르던 손이 안으로 기어 들어와 몸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고 나긋해야할 손길이 어째 차갑다.
"실은 나는 당신의 영혼과 정기를 뺏으러 온 악마이고 지금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는 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데 뭘 말하는지 못 알아먹겠다. 제느는 빙그레 웃는 그대로 내 손을 잡아 끌어 풍만한 가슴에 대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것의 감촉이 손안 가득 잡힌다. 갑자기 이건 무슨 수작이지?
"내 몸을 봐. 딱 당신 취향이지 않아?"
"웬만한 사람이면 다 좋아할 것 같은데."
모든 여자들이 질투할 축복 받은 몸매와 얼굴인데 당연하지 않을까? 길거리 걸어가면 교통사고 정도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당신.
하지만 제느의 결론은 달랐다.
"내 어디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어? 말해봐. 딱 당신의 이상형 아냐."
"이상형치곤 너무 예쁘다."
그랬다. 제느는 어디 하나 눈에 안 차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혼이 쏙 빠진 거겠지. 어딘가 본 듯한 느낌 같은 건 들지 않았지만 처음엔 정말 눈이 부셨다.
"흐흥. 의심 한번 해보지 않은 눈치네. 뭐 그런 점이 귀엽기야 하지."
제느는 천천히 엎드리더니 맨살을 맞댔다. 보드라운 살결과 함께 묵직한 살덩이가 가슴을 압박해왔다.
"어쩌면 아침에 일어났더니 염라대왕을 목전에 두고 있을지도 몰라."
"무슨 그런 소릴."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라며 제느를 봤지만 눈빛이 진지하다. 이러면 또 정말 그런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뜨끔해진다. 얘가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진짜인거야?
"후. 말이 안돼는 게 어디있어. 내 배에 이따시만한 구멍이 뚫렸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말이 돼?"
"어, 그."
"이런 모든 게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수도 있어. 당신은 여름날 운동장에 아직 멍하니 서있는 거야. 지금까지 있던 일들은 모두 거짓인거지."
눈앞에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제느가 뭐라 형용키 어려운 미소를 짓는다.
거기까지 듣고 보니 주위에 가득 찬 푸른빛이 갑자기 음산해 보인다. 이래버리면 나로서는 정말 헷갈리고 불안하다. 진짜 나와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떨어질 때마다 전적으로 제느에게 의지해왔는데 제느가 막상 이건 다 개꿈이야 해버리고 진짜 꿈이면 다 뭐가 되는 거야?
"실은 난 능력 같은 건 있지도 않고 누군가 당신을 잡아 와서 머리에 장난을 치는 것일 수도 있지. 나는 적응하라고 맛보기로 넣어준 프로그램일 수도 있어."
제느의 말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현실성이 있어서 가슴이 떨렸다. 언젠가 교과서에서 본 장자의 꿈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분위기와 맞물리니 불안해지는 것이다.
얼굴 가득 이상한 웃음을 띄운 제느가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큰 가슴 때문에 입술이 닿지는 않았지만 안 그래도 바싹 졸은 심장이 그 입술을 핥는 붉은 혀를 보니 멈춰버릴 것 같았다.
"후후후. 가련한 양 같으니. 바들바들 떠는 심장을 보니 군침이 도는 걸?"
"어, 어어?"
"간은 얼마나 맛있을까? 이번이 몇 번째더라? 99번째?"
진짜로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희번득 빛내던 제느가 입술을 고양이처럼 말더니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입가가 실룩거렸다.
"우와. 푸흣! 진짜 이렇게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사람은 풉! 자기뿐인 것 같아. 푸헤헤헤!"
놀려먹는다고 말은 하는데 눈빛에 칼날 같은 예기가 아직 서려있어서 웃음소리에 찔끔 놀랐다. 그런데 푸헤헤가 뭐야?
"정말로 꿈이면 어쩔거야?"
제느가 키스를 원하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그 혀에 혀를 댔다간 그대로 죽을 것 같아 무섭다.
"정말로 내가 여신이 아니라 악마라면 어떻게 할거야?"
뭉클하게 와 닿는 가슴도 꼭 이야기 속 괴물의 촉수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진실 된 세상은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라면 어쩔거야?"
귀를 녹일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는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와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여 등골이 저절로 오싹했다.
"우후후후! 잘 차려진 밥상! 맛있게 먹을게요!"
"으악!"
혀를 날름거리며 제느가 휙 다가오기에 깜짝 놀라 그만 비명이 나왔다.
"우후후. 농담이야 농담. 자기 몸 정말 따뜻하다. 이대로 안겨있어도 돼지?"
"아, 진짜. 사람 놀리지 좀 마!"
진짜 다 좋은데 사람을 너무 놀려먹어서 탈이야. 그것도 딴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이러니 정말 미래가 걱정된다. 성격은 사근사근하고 좋은데 어디서 물이 잘못 들어서 이렇게 짓궂은 거야?
"예나한테도 이렇게 놀릴래? 너 너무 장난 좋아해."
핀잔을 주니 입을 삐죽거린 제느는 일어나서 브래지어를 들어 입더니 등을 내밀었다. 우와, 저 뻔뻔한 태도 좀 봐. 반성도 하나 안한다 이거지? 여신님 콧대 정말 높네.
"채워줘."
"싫어."
일부러 꽉 당겨서 켁켁 거리게 해줬다. 쌤통이다.
잘 때 입던 헐렁한 티셔츠는 어디론가 버려 두고 몸에 아주 꽉 끼는 작은 티셔츠를 찾아 입은 제느의 모습은 영락없이 철없이 뛰어다닐 그 또래 소녀다. 자기 딴에는 65218세니까 18세라고 우기는데 저러고 싶을까 싶다. 옷 입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 가슴이 푹 파여서 가슴선이 그대로 보이는 걸 보면 나는 참 난감하다.
빤히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나라서 그런지 민망해 하지도 않는다.
"내가 왜 그런 말했는지 알아?"
"불쌍한 남편 놀려먹으려고."
"흐응. 칫. 알았어. 미안해요 서방님."
일어나자마자 루렁어라는 괴상한 이름의 물고기 통조림을 퍼먹던 제느가 키스하려고 입을 가까이 댔다.
"으악! 그거 먹고 하지마!"
"이게 뭐 어때서!"
꼭 냄새가, 이걸 말해야 해 말아야해?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는 거 아냐?
재빨리 얼굴을 밀어버리고 엉덩이를 들어 자리를 옮겼다.
"먹는 건 좋은데 필히 양치질 할 것! 피자 먹고 키스한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우와. 내가 요즘 상황이 이래서 그렇지 아무리 저절로 깨끗해진다고 해도 하루 한번씩은 꼭꼭 씻던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내가 질겁을 하자 먹던 깡통을 내려놓으며 열심히 성질을 돋구는 마나님은 얼음이라도 녹일 듯한 사근사근했던 목소리마저 바뀌었다. 억울한 것 같기는 한데 자기보다 내가 더 억울하다.
"씻을 때마다 유혹해서 덮치면서. 제대로 침대에 누운 게 몇 번이냐?"
"흥! 내가 오죽하면 덮쳐야겠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런 여신님이 바로 옆에서 자면 덮쳐야 정상 아냐?"
"와. 너 되게 뻔뻔하다. 소리나는 것도 민망해 죽겠는데 그렇게 하고 싶니?"
"내가 어디 성녀라도 되는 줄 알아? 내 나이 반수를 혼자 지냈으면 됐지 궁상떨며 보낼 건 또 뭐람?"
전혀 낯 하나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하는데 내가 오히려 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얘는 같이 목욕하면 당연히 덮칠거라고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데 막무가내라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같이 잔다고 해도 매일 같이 하는 건 좀 무리지 않나? 진짜 팔팔한 나이대인 나도 제느가 요구하는 데로 다 들어주다간 그대로 골로 갈 것 같은데 지금 뭘 어쩌라는 건가?
"너 오고 나서부터 몸이 많이 허해졌어. 오랫동안 독수공방한건 알겠는데 제발 말려 죽이지만 말아 줘."
"그렇게 힘들어 자기? 우리 돌아가면 장어 먹으러 갈까?"
갑자기 또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진다.
"장어? 그러고 나 말려 죽이려고 그러지?"
"누가 그렇데? 우리 자기 몸이 튼튼해야 나나 예나나 듬직할거 아냐. 호호호."
정말 입에 발린 소리만 하네. 심술이 나서 먹고 있던 통조림을 빼앗자 볼이 뿌루퉁해졌다. 정말 우리 둘 다 미적지근하지 않고 바로바로 반응이 나오는 건 똑 같네. 그래도 사귄지 1년. 어떻게 이런 것만 닮아가냐?
"칫. 먹을거 가지고 장난치면 천벌 받는 댔어."
"여신님이 잘도 그런 말을 한다."
몸에 쫙 달라붙는 티셔츠 입은 여신님은 도대체 어디의 고결한 여신님이기에 천벌 운운을 하는 걸까? 몸매가 아주 고스란히 드러나는 얇은 티셔츠를 입은 목적은 분명히 우월감과 허영심, 질투와 분노를 얻으려고 저렇게 입는게 분명하다. 자신감 하난 정말 대단하다니까.
"자기야."
"왜."
"나 이거 어울리지?"
새삼 물어볼 계제가 아닌데도 물어본다는 건 입에 발린 말이어도 듣고 싶다는 뜻이다.
원래 모르는 사람한테 이러면 뺨맞겠지만 대놓고 훑어 보자 제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슴을 내밀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 터질 것 같다. 그렇게 입으면 답답하지 않아?"
"흐흥. 내 몸매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거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아."
고개를 내젓고 통조림을 마저 먹었다. 저 자신감이야 나도 인정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여기로 떨어트린 악마들은 미모보고 탄복할 놈들이 아니란 거다. 솔직히 제느가 예쁘긴 해도 처제도 있고 예나도 비슷하게 닮았는데 더 예쁜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잖아? 물론 저기서 더 예쁘려면 도대체 어떤 개념이 있어야 할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아, 당신 때문에 삼천포로 빠졌잖아. 내가 말한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으음."
솔직히 말해 도저히 모르겠는데. 고등학생의 학력 수준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거 아닌가 싶다. 내가 수능도 잘 치고 머리도 좋아진 것 같지만 배운건 그게 그건데 나올게 있어야지. 허구언날 이 시의 작자는 이런 감상을 어쩌구 이런 것만 달달 외어놓으면 공자가 와도 멍청해지겠다.
"내 이야기는 생각의 지평을 넓혀보란 이야기야. 자기 아직도 날지 못하잖아. 날 수 있었으면 이 고생을 할 필요 있었을까? 여기까지 이틀 걸려 뛰어올라올 필요도 없었어. 조금만 당신이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훨씬 빠르게 돌아갈 수 있어."
"알았어."
생각의 지평이라. 얘도 갑자기 철학자가 된 모양이다. 제느는 다른 통조림을 뜯어먹다가 곁눈질을 하더니 설명을 추가했다.
"간단하고 쉬운 생각의 전환이야.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라거나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건 기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전제가 잘못된 거라구. 불가능한 건 없어. 가능하게 만드는 게 조금 힘들뿐이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관념의 전제를 깨서 전환하면 어떤 것도 가능해."
"…."
"하나도 모르겠다는 표정 짓지 말고. 간단한 건데 모르면 어려운 거라 아직 아리송할 거야. 이거 다 먹고 정리하자. 아직 못 본 데가 남아있잖아."
"응."
등산용 배낭에 짐을 챙겨 일어나 직원통로를 찾아 들어갔다. 우주정거장이라고 해서 일반 건물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 표식이나 안내도도 없고 복도도 다들 비슷비슷해서 잔뜩 헤멜 줄 알았지만 이게 웬걸, 문마다 이름이 써있고 어느 구역, 부서로 통하는 길이라는 표지판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거기다가 가끔가다 전체 층에 대한 안내도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아무래도 주 상황실로 가는 게 제일 빠를 거야. 파괴되면서 주 전원이 차단된 것 같지만 보조전력 정도는 충분히 가동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상황도 상정하고 만들었을 테니까."
"게임하곤 틀리네. 미래 세계는 다 그럴 것 같았는데."
"그런 게임은 일부러 긴장감을 더하려고 그렇게 만드는 거야. 여기가면 보스 있소 라고 써놓은 게임 봤어?"
"그런건 못 봤지."
"그래. 여기는 공포영화의 낡은 집도 아니고 액션 영화의 미로도 아니야. 그냥 편하게 생각해."
주 상황실이라고 써 있는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많은 콘솔이 집중되어 있는 넓은 방이 나왔다. 조명과 계기는 모두 꺼져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그 커다란 공간감은 그대로 느껴졌다. 제느가 손전등으로 여기저기를 비추자 대충 보아도 넓이가 운동장 만하고 천장은 까마득하니 보이지도 않았다.
"아, 이런. 역시나 살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네. 이럼 조금 골치 아픈데."
"아까 발전실로 가는 길이라고 써 있는 복도가 있었어."
"거기든 주동력이라 이런 상황에서는 가동하기도 힘들어. 시동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거야. 지금은 이 정거장이 어떤 위치에 있는 지도 모르잖아. 일단 뭐라도 없을까?"
방 중앙으로 가서 이리저리 전등을 비춰보던 제느는 턱을 괴고 고민을 하다가 가까이에 있던 콘솔 하나를 건드렸다.
"그런거 누른다고 영화처럼 팍 켜질 것 같아?"
"우웅. 모르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거 아냐. 어, 저거?"
뾰로통하게 날 바라보다 뭔가 발견한건지 제느가 한쪽 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분명 아무 것도 없이 패널로 짜 맞춰진 벽인데 거기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고 틈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뭔데? 어? 열리잖아?"
"이 패널만 빛 반사 각도가 조금 틀리더라고. 자기 이것 좀 열어봐! 보지만 말고!"
제느가 손가락 끝만 겨우 집어넣어 덜그럭거리던 패널이 내가 손가락을 들이밀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말려 들어갔다. 찰흙처럼 우그러진 사이로 손을 넣어 패널을 잡고 힘을 주자 뻑하는 소리와 함께 경첩이 아예 부러졌다. 내가 한 거지만 정말 믿기지 않는다.
안에는 온갖 배선과 금속상자, 꺼진 화면 등이 얽혀있어 정글을 방불케 했다.
"뭐가 나간 걸까. 보조동력으로 전환하는 스위치가 어디 있을텐데."
제느는 아무런 겁도 없이 안에 있는 것들을 이리저리 헤집더니 굵은 전선 몇 가닥을 끊어 전등을 연결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화면이 살아나며 무언가 하얀 글씨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오. 된다!"
내 손전등이 이렇게 만능이었단 말이야? 난 저런 기능 따위 생각도 안 했는데?
"뭐, 어떻게 한 거야?"
"대충."
제느는 이것저것 전선들을 만져서 가닥가닥을 전등에 연결했다. 그러자 곳곳에서 불빛이 살아나며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려온다. 겨우 손바닥만한 전등 하나가 이곳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빛이 되살아난 콘솔 쪽으로 달려간 제느가 뭔가를 움직이자 어두웠던 한쪽 벽면이 밝아지면서 뱃고동 같은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이 완전히 화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온갖 붉은 빛과 경고표시가 가득 차 있었다.
"이리와! 자기야!"
모니터 화면에는 각종 경고표시들이 가득 떠올라 있고 정거장의 현재 위치인 듯한 그림이 움직이고 있었다. 앞에 있는 키보드를 두드려 다른 정보를 띄운 제느는 얼굴을 찌푸렸다.
"반대편 행성으로 추락하고 있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네. 어디 비상용 우주선이 있는데 없나?"
"떨어지는데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거야?"
"한두 시간쯤. 예상보다 충격이 컸나봐. 이웃 행성의 중력권에 잡혀 있었어. 자기는 휴대용 컴퓨터 같은 거 봐서 있으면 죄다 가져다줘. 성도 같은걸 다 복사해 가야해."
"큰일났네."
제느가 키보드를 이리저리 두드리자 경고음이 꺼지더니 화면이 반전되며 바깥의 상황이 드러났다. 화면 한가득 파란 대기권과 대륙이 보였다. 저기 떨어지는데 이제 겨우 한시간 남은 거란 말야?
"으아. 큰일이다. 이거 알았으면 맘놓고 자지 않았을 텐데."
제느가 머리를 벅벅 긁어댄다. 어쩐지 잔뜩 풀어져서 잔다 했어. 혀를 한번 차니 입을 삐죽이며 노려보기에 옆의 통제실이라고 써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들 위에 흩어진 서류들이며 공구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당장 별로 쓸모 있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구석에 있는 잠겨진 서랍장에서 노트북 비슷한 것을 여러 개 찾았다.
"자기야! 자기야!"
조용한 사이로 제느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왜 그래?"
"1만키로 밖에 외계인 우주선이 나타났어!"
"뭐?"
귀찮아서 그대로 대답하다가 식겁해서 달려가보니 제느가 다른 자리로 옮겨가 부산하게 뭔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뭐야? 어디서 나타난거야?"
"레이더를 켜니까 뿅하고 나타났어. 안 가고 숨어 있었나봐. 어어? 공격한다!"
제느가 꺄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허공에 떠오른 구형 화면에 붉은색으로 반짝이는 기호 하나가 떠있더니 거기에서 조그만 기호 세 개가 분리되어 중앙으로 오기 시작했다.
"으악! 10분 내로 도달한데! 자기 뭐 찾은 거 있어?"
"컴퓨터 같은 거 몇 개만…."
"당장 짐 싸! 도망쳐야해!"
제느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나 달렸다. 금방 방안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대피안내방송이 시작되고 한쪽 벽면을 차지한 화면에 레이더 영상이 비춰지면서 경고등이 빨갛게 점멸했다.
"아이 참! 멍하니 있지 말고! 하나 맞았다간 그대로 빼도박도 못해!"
"어디로 갈건데?"
"7층 공항대합실에 비상용 탈출 우주선이 있대! 일단 공항에 우주선이 한대도 없으면 그리로 갈 거야! 9분 남았어!"
어쩌다가 또 이렇게 된거야! 이제 좀 목숨 걸 일 없다 싶더니만 이제는 외계인의 공격이라니!
허겁지겁 어디론가 달려가는 제느를 따라 뛰었다. 밖으로 나온 상가와 공항에도 온통 경고 표식이 번쩍이며 서둘러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쉴새 없이 들렸다.
"가져온 거, 그거 줘봐!"
주워 온 노트북 하나를 건네자 제느는 그걸 켜서 이것저것 조작하더니 기겁을 했다.
"엎드려! 엎드려! 5초 후에 미사일이 직격한데!"
"어엉?"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제느가 슬라이딩하며 옆에 있던 벤치 아래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따라 가려는 순간 정거장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무거운 폭음과 함께 발 밑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엄청난 초대형 거인이 해머를 전력으로 휘둘러 정거장을 때린 것 같다!
"으아아!"
바닥에 납죽 엎드려 주위의 아무거나 붙잡으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넓디넓은 공항 복도에 난간이나 잡을만한 적당한 기둥이 있을 리가 없다.
"아르벤! 이리 와!"
조명이 일제히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이로 제느가 애타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발 밑이 흔들리다보니 중심을 잡고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으윽!"
간신히 손을 잡고 몸을 숨긴 순간 다시 거센 충격이 정거장 전체를 덮쳤다. 이번에는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천장이 이상한 각도로 기울면서 금속이 뒤틀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온 곳을 덮었다. 그러더니 밖의 우주공간이 그대로 보이는 유리창이 일제히 박살났다. 순식간에 공기가 빠져나가며 온갓 물건들이 밖으로 쓸려 날아갔다.
"일어나! 어서 가야해!"
"어디로!"
"정박된 배를 찾아봐!"
바로 눈앞에서 천장이 우그러들며 가라앉더니 표지판 따위의 물체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더구나 중력장치가 고장났는지 몸이 가벼워진다. 신기하게도 나는 몸이 가벼워지든 말든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있었지만 손을 잡고 앞장서던 제느는 당장 바람에 떠밀려 붕 떠올랐다.
"꺄악!"
"이리 잡아!"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천장에서부터 육중한 셔터들이 내려왔지만 뒤틀린 프레임 때문에 불꽃과 연기를 내며 삐그덕 거렸다. 그 사이로 제느를 팔에 끌어안아 품에 단단히 안고 날아다니는 파편을 피해 뛰었다.
"미사일은 세 발이야! 감압되고 있으니까 일단 아무거나 잡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시 거대한 충격이 바닥을 따라 전해져왔다. 공기는 거의 빠져나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치명적인 일격임에는 분명했다. 바깥이 번쩍하더니 말 그대로 정거장이 공중분해되어 파편들이 창이 있던 자리를 통해 날려 가는 것이 보였다. 불타는 장갑판들과 금속 파편, 책더미나 상자들이 날려가고 수많은 별들과 태양, 행성이 느릿느릿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우."
"야. 괜찮아?"
"젠장. 완전히 날아갔네. 레이더를 켜는게 아니었는데."
제느는 품안에서 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하곤 한탄을 했다. 옆의 아직 살아있는 구획에서는 붉은 경고등이 켜진 체 육중한 셔터가 닫히고 있었다. 바람이 그 안에서 빠져나오다가 문이 닫히자 경고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저기 들어가 봤자 우리한텐 소용없어. 공항구획이 아직 무사하면 좋겠는데."
"계속 가자. 무슨 수가 나오겠지."
우리가 있는 곳은 창이 깨져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갖 파편들이 바깥으로 지나가고 제느의 말도 또렷이 들리는데 그 외에는 완전한 정적이 주변을 지배하고 있는데 정말 너무나도 신기하다.
더구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조금 지나자 검은 우주 속에서 수많은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정말 별의 바다라는 말이 그대로 와 닿았다. 발을 내밀면 거기에 빠져버릴 것 같이 황홀한 광경이다.
"움직여. 멍하니 있을 때가 아냐."
"응."
중력은 완전히 사라져 잘못 발을 디디면 우주 속으로 튕겨 나갈 판이었다. 그래도 공기하나 없는데 나와 제느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없고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별들의 빛 사이로 부옇게 보이는 강렬한 빛들이 내리 쬐고 있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지금 이게 진공인거 맞아?"
"맞아. 별로 실감이 안가지? 하지만 보통인간이 이런 진공 속에 노출되면 말야."
제느가 품에서 뭔가 꺼냈다. 조그만 통조림이었는데 제느가 손을 떼자 아무런 소리 없이 부풀어올랐다. 가슴 사이에 저런거 넣어 가지고 다니면 안 아프나?
"이렇게 죽어버려. 피 속에서 공기가 끓어올라서 순식간에 의식을 잃지."
"좀 끔찍하겠다."
"우리는 괜찮아. 자기야 애초에 영향을 안 받고 나는 자기의 힘으로 보호받거든. 밖으로 나가야해. 여긴 길이 없잖아."
형편없이 구겨진 창 쪽으로 나오자 정거장이 어떻게 됐는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갔을까?"
"이렇게 부서졌으니 뭐."
정거장의 상황은 끔찍했다.
동그랗게 생긴 정거장은 거인이 파먹은 것처럼 푹푹 파이고 녹아버리거나 금이 간 철판들 사이로 온갖 내부의 방이며 복도, 시설들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미사일을 맞고 회전을 시작한 정거장이 마침 행성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떨어져나간 궤도엘리베이터의 나머지 시설이 붉은 불꽃에 휩싸인 채 대륙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론 두 조각으로 갈라지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다.
"저쪽인 것 같아. 보여? 날개 같은 게 보이지?"
"으음."
제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안쪽으로 푹 파고든 항구의 도크 같은 형상이었는데 주위에 거미줄처럼 얽힌 균열 때문에 처음에는 공격받아 생긴 구멍인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눈을 굴려보니 반짝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맞네. 가보자. 잘 잡고 있어."
아직 상당한 수의 우주선이 있는 것 같다. 방금 전 공격에 얼마나 파괴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느라면 저런 것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인지 모른다며 어떻게 갈 방향을 정하는 거야?"
"대중의 방향을 잡아서 계속 점프할거야. 이 분신은 너무 약하고 보잘것 없어서 본신하고 연락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은하계 10개 거리까지는 접근해야해. 혹시나 그쪽에서 찾아 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거야."
"왜 없는데?"
제느는 질문에 잠시간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내 볼을 꼬집었다.
"자기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여신인줄 아는거야? 나는 하급여신이라 좀 만만한 녀석이 아니면 대응을 할 수가 없단 말야. 내가 괜히 전생하는 짓까지 하며 옮겨다녔는 줄 알아? 흔적 안 남기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야, 그런 정도야?"
"자기 마누라 연약하고 가녀린 여신이거든요? 내가 사랑의 여신님처럼 빵빵했으면 진작에 다 때려 부쉈지."
그러며 옆구리를 또 꼬집혔다. 얘는 정말 빵빵한건 가슴 밖에 없나봐. 그래도 예쁘니 봐준다.
"우리도 참 답이 없네."
폭발로 갈라진 균열을 뛰어넘자 파편으로 가득한 항구가 나타났다.
"그래도 좀 멀쩡하게 생긴 배 좀 찾아봐."
제느가 벽의 끝에서 발돋움을 해 파편들 사이로 날아갔다. 그냥 무작정 가는 듯 싶더니 중간에서 금속판 파편을 딛고 몸을 탄력 있게 한바퀴 돌려 방향을 바꿔 뒷 부분이 없어진 우주선으로 향했다.
"휘유."
저거 완전히 아크로바틱 묘기인데? 달인 수준인거 아냐? 말만 가녀리지 실상은 안 그렇잖아?
"빨리 와!"
공기가 없음에도 제느의 말소리는 뚜렷하게 잘 들린다. 중력조차 느껴지지 않는 우주공간인데도 발 밑을 내려다보자 수직으로 깍아 지른 벽이 눈을 위협했다.
"휴우."
심호흡을 한번하고 제느가 있는 우주선을 노려 뛰었다. 몸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뛴 자세 그대로 둥둥 떠간다. 하늘 높이 뛸 때와는 또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어, 읏차."
파편을 피하려고 몸을 비틀자 의도한대로 움직인다. 멀리서 볼 때는 묘기 같았는데 의외로 쉽네? 하지만 금속 판 하나를 피하려고 옆에 있는 파편을 손으로 민 순간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온 세상이 거꾸로 돌았다.
"자기야! 뭐해! 지금 노는거지!"
"으악!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줘!"
허우적대며 주변에 흩어진 것들을 잡아보려 했지만 힘이 실릴 만큼 큰 파편이 없었다.
"처음이니까 봐줄게."
어느새 옆으로 온 제느가 내 몸을 잡더니 어떻게 한건지 몰라도 바로 세웠다.
"어? 뭐야. 어떻게 한거야?"
"이리 오기나 해."
제느의 손에 뒷목을 잡혀 뒤가 없어져 구멍이 뻥 뚫린 우주선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드러난 내부로 보면 거의 건물 10층 크기에 달하는 커다란 우주선이다.
"함선의 조종실로 가면 성도가 있을 거야. 그 다음엔 적당한 우주선을 찾아야 하는데 만약 없으면 여기 있는 재료로 만들어야 해."
"뭘 만드는데?"
"우주선 하나를 복구해서 점프엔진을 달아야지. 당신이 힘 좀 넣어주면 쌩쌩하게 잘 날거야."
"내가 배터리냐?"
"잘 부탁해요. 서방님."
일부러 한 듯 쪽 소리나게 뽀뽀한 제느가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정말 미워할 수 없게 만드네. 가끔은 강하게 화를 내야 무섭기도 하다는 걸 알텐데. 설마 눈치채고 막는 건가? 저 정도 고단수라면 충분히 그럴만 한데.
"근데 조종실은 어떻게 찾는 거야?"
"대게 깊숙한 곳에 있더라고. 대게 중앙 컴퓨터실하고 같이 붙어 있어. 여태까지 다녀본 바로는 설계사상은 다들 비슷한 모양이야. 꼭꼭 감춰놓았더라고."
"그래?"
그 말 그대로 이리저리 통로를 꺾어 들어가며 틀어막힌 문들을 뜯어내고 망가진 통로를 뚫으며 전진하자 정거장의 주상황실처럼 커다란 방이 나왔다. 갈림길도 미로 같이 많았는데 어떻게 헤메지도 않고 한번에 왔는지 감탄이 나와 쳐다보니 제느는 턱을 으쓱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자기야. 전등 하나만 만들어봐."
"응."
손안에 빛을 모아 하얗게 빛나는 막대기를 만들었다. 제느는 계속 전등이라 부르는데 이름이 맘에 드는 모양이다.
"흐음. 그래도 간단해서 다행이다."
불이 꺼진 조종실의 패널 하나를 뜯어낸 제느는 안쪽에 있는 회로기판을 뜯어내 살펴보더니 그런 소리를 했다. 내가 보기에는 실낱만큼 가느다란 전선이 얽힌 기판은 그냥 장난감인데 제느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이리저리 몇 가지 기판을 더 꺼내 전선들을 살펴보더니 전등을 이용해 이리저리 자르고 붙이고 구성을 고쳤다. 그리고 안쪽에 팔을 깊숙이 넣어 굵은 케이블 하나를 꺼내더니 전등을 연결했다.
"자아. 이제 켜진다."
하얀 전등 몸체를 슬슬 만지자 바로 위 콘솔에 있던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컴퓨터가 켜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냥 깨작거린 거 같고 저렇게 할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한 거야?"
"후후. 잘. 이런 큰 우주선이라면 분명 항해지도가 있을 거야. 군용배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걸로 참아야지."
"군용 배?"
"어떤 문명을 가든 군용이 항상 유용한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거든. 흔히 있잖아. 기밀로 분류되는 부류 같은 거."
"그렇구나."
잘 모르겠지만 그런가 보네. 제느는 켜진 화면을 붙잡고 조금 씨름을 하더니 가져 온 노트북을 꺼내 어찌어찌 연결을 하고 데이터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냥 전선 가닥을 대충 손으로 꼬아 연결하는데도 잘 되는데 도대체 저건 어디의 오버테크놀로지인지 참 궁금하다.
"꽤 방대하네. 다운받으려면 한 시간쯤 걸린데. 다른 우주선을 찾아보자."
"다른 우주선?"
"여기는 뒤가 다 날아가서 엔진이 없잖아. 기관실 구획도 날아간 것 같은데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없는 걸 다시 만들어낼 능력은 없어. 그렇다고 이런 수준의 우주선을 철판 엮어서 대충 때울 수도 없는 노릇이란 말야."
"그래?"
하기사 손으로 이거 어떻게 복구하냐. 해도 내가 해야 할텐데 파편 끌어 모으는 것도 일이겠다.
제느를 따라 밖으로 다시 나오니 눈앞이 파랗게 물들었다.
다시 보고 또 다시 보아도 이 광경은 잊지 못할 거다. 진짜 아름다운 거란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지구도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까?
살짝 눈을 돌리니 웅장할 정도로 커다란 폭풍 하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밑은 분명히 난리도 아니겠지만 위에서는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모양도 고요할 뿐이다.
"저거 어떨까? 응? 아르벤?"
"어?"
제느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잔해더미들 사이로 조그맣게 보이는 파란색 물체가 보였다. 주변의 것들로 크기를 추정해보아도 대략 버스보다 조금 큰 크기라고 여겨지는 작은 우주선이었다.
"멀쩡해 보이기는 한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일단 주워오자."
주워오는 거야 문제는 아니지만. 멀리 떠 있던 파편들이 반짝반짝거리다가 이내 대기권으로 빨려 들어가 붉게 타오르는 게 보였다. 죽지는 않겠지만 저렇게 떨어지면 얼마나 뜨거울까?
"어딜 또 딴데봐. 손 제대로 안 잡으면 영영 잃어버려."
날아가는 도중에 추락하는 파편들을 봤더니 제느가 팔을 당겨 팔짱을 꼈다. 딴데 본게 영 불만이라는 표정이다.
"잘 잡고 있잖아. 그런데 여기 추락할 위험은 없는 거야?"
"아직은. 그렇지만 감속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오래 있을 건 못되는 것 같아. 최대한 쓸 수 있는 걸 모아서 탈출하자."
"가면 갈수록 산이네."
"산이 앞에 있으면 옮겨야지. 넋 놓고 자빠질 수는 없는 노릇 아냐."
이 사람은 정말 어떤 역경이 앞에 놓여 있어도 코웃음치면서 헤치고 지나갈 사람 같다. 주위에는 온통 부서진 파편뿐인 절망적인 상황 아래에서도 전혀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하는 얼굴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나는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도 불안한데 저렇게 절대 포기 안할 것 같은 표정이 나오는 건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연륜일까? 아니면 매사에 자신을 갖고 대하는 태도일까?
"그런데 말야. 이런데 와본적 많아?"
"몇번 있어. 이름 모를 행성에 떨어졌더니 규소 덩어리가 꾸물거린다든가 가스 안에서 헤엄치는 해파리 같은 건 너무나도 흔해. 멀리 심우주로 나가면 수소와 헬륨만으로도 사고를 하는 구름덩어리도 있단 말야. 이런 우주 안에는 생명이 말 그대로 넘쳐나."
"그래? 그런데 왜 여태 외계인을 몰랐을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가 보기에 가까운 곳에 문명이 하나 있었긴 한데 인간의 개념으로 접촉할 수 있는 문명이 아니었어. 거기는 말하자면 시골벽촌이야. 호기심에 가보는 사람은 있어도 일부러 가보는 사람은 없지. 진짜 밀도가 높은 데는 같은 성계 내에 네 개의 문명이 바글거리는 것도 봤어."
"장난 아니겠다."
"밥 먹고 하는 게 전쟁이더라."
제느의 말을 들어보면 다들 자기 종족이 아니면 적대적인 모양이다. 여기도 그렇고 어떻게 툭 하면 전쟁인지 모르겠단 말야. 이렇게 엄청난 우주정거장에 우주선들을 만들어놓고 다 때려부수면 그게 무슨 낭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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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심기일전!
요새 극도로 스테미나가 떨어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정말 손에 잡히는게 아무 것도 없더군요.
그래도 이번엔 올리고 자야 연재 할 수 있을 것 같아........
돌 던지진 마시구요. 엣헴!
아 씁. 진짜. 열심히 정진해야지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되지....여러분 힘을 주세요! 원기옥 만들게!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 힘을..
제 기를 빨아가세요 !
우주 삼라만상의 기를 드립지요. 예.
원기옥~~~!!!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