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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시가 다 되어 술판을 파하니 살아남은 자는 호연과 가산 그리고 바람뿐이다.
군산 바둑의 태산준령격인 호연의 내공과 진포 서예의 자존심격인 가산이야 그렇다 치고
천하 무지랭이에 약골인 바람이 살아 남았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비틀거리는 몸을 돌려 주루를 나서는데 어둠은 간데 없고 미풍만 살랑거린다.
매월 바둑 동호회 모임일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진부한 풍경이지만 오늘은 소정회 멤버와
입암산에 오르기로 한 날이니 좀 심하다 싶다.
집으로 돌아와 씿지도 앉고 그대로 골아 떨어지니 아침 8시경 예정된 시간에 어김없이 영욱으로부터 전화 벨이 울린다. 비몽사몽간에 길을 나서니 경수와 유석 그리고 영욱이 근심스레 바람을 맞이한다.
이들 또한 면역이 된 탓인지 구차한 사연 묻지 않아 좋다.
바람처럼 달리는 들녘엔 날로 푸르름을 더하고 보리 수확후 모내기를 기다리는 논들이
시집갈 날 받아둔 새악시처럼 군데 군데 눈에 띈다.
염치도 좋게 먹거리는 없냐고 물으니 영욱이 김밥을 내어 준다. 속은 쓰려오는데 입맛은 소태같다
두어개 먹다 말고 깜빡 잠이 들었나 싶은데 어느새 집결지인 백양사 인터체인지 부근에 이른다.
언제 보아도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난 내장산 국립공원 일원이다.
밭에는 옥수수 어느새 키를 재려하고 애호박이 열매를 달고 있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숱한 기인 열사가 태어나고 홍길동이 이곳 장성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더우기 백양사에는 숱한 고승대덕들이 배출되어 조선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로 길라잡이를 했으니 해방후에도 고불총림으로 만암과 서옹대선사가 종정으로 주석했던 곳이다.
일찌기 바람 또한 2002년 무차선 대회에 일지죽장을 짚고 홀로 다녀간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잠시 산천경개에 취해 묵상에 젖어 있는데 남은일행이 도착한다.
지선과 창영, 홍규와 반가이 손을 잡는다. 오늘따라 길동무가 더 줄어들었다.
삶이 바쁘고 고달프니 여유가 없음인가? 소득에 비례해 삶의 질 또한 개선되는 게 순리언만 역비례로 가는 듯 싶어 씁쓸하기만하다.
오늘의 가이드는 지선이다. 현재 전주에서 동창회 총무로써 청량제 역할을 맡고 있다.
군산에서 택시공제조합 지사장으로 있는데 따님이 금년도 서울대 인문학부에 합격해 주변에 부러움을 산다. 온화하고 치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성품이다.
평소 등산을 즐긴다하여 좋은 산 하나 추천해 달랬더니 기꺼이 응해 오늘의 작품이 탄생한터이다
우선 인터넷으로 입암산의 대강을 알아본다.
입암산(626.1m)이란 정상의 바위가 사람이 갓을 쓴 것 같다는 말과 능선위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입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로지르는 이 산은 골짜기 깊숙한 곳이 분지를 이루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입암산은 옛부터 왜적의 침입을 막던 항쟁의 장소였다. 고려시대는 송고비장군이 몽고의 6차 침입을 맞아 이곳에서 몽고군을 물리쳤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윤진이 소서행장과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다.
입암산들머리는 전남대학교수련원이 있는 남창골에서 새재골 _> 입암산성 -> 갓바위 -> 은선골 -> 남창골로 산성을 한바퀴 도는 길과, 전남대수련원에서 산성골 -> 남문 -> 남쪽능선 성을 타고 정상을 거처 북문에서 산성골로타고 내려오는 길이 있다.
전남대학교수련원에서 은선골 -> 삼나무군락지 -> 늪지대 -> 갓바위 -> 북문 -> 입압산을 오른 후 남쪽능선 성을따라 내려 가다가 남문 -> 산성골로 내려가기도 한다.
정읍시에서는 하부리에서 원하부 -. 장부 -> 북문 -> 입암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입암산은 능선보다는 남창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이름나 있다. 입암산과 갓바위 능선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성골과 은선 골, 입암산과 백암산을 가로지르며 흘러내리는 새재골, 시루봉 남쪽의 자하동, 사자봉 서쪽의 하곡동, 사자봉 남서쪽의 내인동 등, 남창계곡을 이루는 여러 지계곡들은 모두 골이 깊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선인들의 은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창마을 전남대수련원 앞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자귀나무, 작살나무, 난티잎개암나무 등 활엽수들이 무성하여 숲터널을 이루고 있다. 남창마을에서 장성새재를 넘어 정읍까지는 임도가 나 있으나 남부관리소에서 통제하고 있다.
새재길 역시 숲터널. 전형적인 산책로다. 간혹 먹거리도 나타난다. 다래가 길바닥에 널려 있고, '한국 바나나' 라는 으름 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나무만 흔들어 대면 활짝 벌어진 열매의 알맹이가 우수수 떨어진다.
입암산과 갓바위 능선으로 둘러싸인 산성골은 마치 비행기 활주로처럼 완경사 로 길게 뻗어 있다. '성안리' 라고 불리는 이곳은 공자의 유교를 다시 밝힌다는 갱정유도 교인들이 살던 곳이다.
입암산성
입암산성 전투는 고종 43년(1256) 정월 장성의 입암산성에서 벌어졌는데, 다른 지역의 전투와는 달리 관군이 주도하였다. 몽고병이 여러 섬을 공격하려고 모의한다는 말을 듣고 장군 이광(李廣)·송군비(宋君斐)를 보내어 선사(船師) 3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영광에 도착한 이들은 길을 나누어 몽고군을 협공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시도하지 못하고 이광은 다시 섬으로 들어가고 송군비는 입암산성에 입보(入保)하게 되었다. 입암산성은 분지형의 산성으로, 성내에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상당한 경작지도 형성되어 있어 장기적인 입보가 가능한 지역이었다. 당시 입암산성 내에는 장정들은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노인과 어린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송군비가 짐직 약한 자 몇사람을 성밖으로 내어 보내니 몽고병이 성안의 식량이 다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성아래에 이르렀다. 이에 송군비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들이쳐 이를 격파하니, 살상이 심히 많았고 4명의 몽고관원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장성읍지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시작된 다음 해인 선조26년(1593년)에 장성현감 이귀가 장성사는 윤진과 더불어 개축했으며, 정유재란(1597년)때 왜장 소서행장의 예하 부대가 북상하는 것을 당시 산성별장 윤진이 관군, 의병, 승병 등을 지휘하여 가로막고 싸우다가 장열히 순절하였다. 지금도 산성 안에 장군의 순의비가 잡초에 쌓여 말없이 서 있다.
구후 효종4년(1653년) 현감 이유형이 성체가 낮고 주위가 협착하다는 건의를 하여 조정에서는 군을 발하여 개, 중측하였는데 둘레가 2천7백95보, 포루4, 성문2, 암문3, 여울1, 연못9(큰방죽3, 작은 못6), 샘물14(큰샘5, 작은샘9)개였으며, 숙종3년(1677년) 부사 홍석구가 다시 95파(1파=양팔의 길이)를 더 쌓았다.
왼쪽버튼 : 삼나무도 피톤치드를 얼마나 품나? 피톤치드의 생산공장 삼나무
일본 원산의 상록침엽수 교목으로 나무높이 40m, 지름 1∼2m에 이르고 가지가 많으며 위로 곧게 자란다.
1924년에 수입되어 전남, 경남이남의 주요 조림수종으로 많이 심고 있으며 제주도에서는 방풍림으로도 심는다.
나무 껍질은 적갈색으로 세로로 길게 갈라지고 줄기가 곧바르게 자라는 수종으로 유명하다.
삼나무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심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이나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도 심기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높여 잡아도 임진왜란 이후로 생각되어 옛 문헌에 나오는 삼(杉)은 전나무로 보아야 한다.
잎은 3∼4각형으로 모가나고 길이 1∼2cm로 송곳처럼 차츰 가늘어져 끝이 예리하다. 꽃은 1가화이고 솔방울은 적갈색으로 직경 2cm정도로 둥글며 종자는 각각의 실편에 3∼6개씩 들어있다. 꽃은 3월에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목재는 재질이 좋아 건축, 토목, 선박, 가구재 등으로 사용된다
어느새 우린 입암산 입구에 다다른다. 주변에 특별한 민박업소나 음식점 편의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남창골 주차장에서 지선으로 부터 간단히 산행길 설명을 듣는다.
해발 687미터에 여느산과 다름없으리라 짐작하고 입구에 들어서니 수림이 울창하다.
간간이 이어지는 탐방객들로 적막감은 덜하다.
초입부터 산오디 까맣게 익어가 군침을 돋운다. 이름 모를 산새들 분주히 나르고 계곡물 소리 그윽하다. 상큼한 풀내음을 맡으며 잠시 걷다가 계곡옆 너럭 바위에 걸터앉아 지선이 준비해온 떡과 과일을 나눠먹는다. 짧지 않은 길이니 요기를 해 두라며 초콜릿등을 나눠준다.
자상하고 섬세한 지선의 넉넉한 품성이 읽혀진다.
녹음이 짙어 유월의 작열하는 태양은 간데없고 피톤치드의 이름모를 향기에 취한다.
등반로치곤 꽤 넓다했더니 안내문을 읽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음이 넘치는 홍규와 창영, 지선, 영욱은 앞서 가버리고 간밤에 과음한 바람과 경수만이 터덕이며 느릿 느릿 걷는데 들꽃을 닮은 여인 둘이 배낭을 둘러메고 바람결을 스치며 추월하려한다. 몸매가 단정하고 거침없는 매무새로 보아 산길에 익숙한 듯 싶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광주에서 왔단다.
친구 사이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데 뜻이 잘 통해 주말엔 주로 명산 대천을 찾는다 한다.
아직 30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로 보이는데 여유와 낭만이 넘쳐 보여 좋다
입암산은 광주에서 30-40십분 거리며 볼수록 정이 들어 자주 찾는단다.
우린 초행길이니 길동무나 하자고 제안하니 미소로 화답하며 오이며 과자등 준비해온 음식을 내어준다. 왜 빈손이냐고 묻길래 바람은 천성이 무거운 걸 싫어해 그렇다하니 파안대소한다.
신랑과는 취미가 달라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준단다.
경애는 광주생이고 미아는 부산 생이니 영.호남이 친구 되어 등산과 취미 생활등을 함께하며 우정을 나눈다한다. 비록 10년 연하지만 삶을 음미하며 여유가 운치가 넘치니 바람에 비할바 아니다. 바닷가 출신의 미아는 야성이 넘치고 적극적이며 무등벌의 경애는 여성스럽고 단정하며 재색이 빼어나다. 뜻 밖의 들꽃 여인들을 만나 호젓한 산길을 걷는데 도처에 산뽕나무와 산딸기 탐스럽게 익어간다. 중도 하산을 염려했던 경수도 활력을 되찾고 이따금 무등댁과 해운댁은 산열매를 입에 넣으며 즐거워한다.
이들이 건네주던 산 오디의 싸아한 맛은 생각만해도 군침이 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곡따라 오르는 길에 삼나무 군락지가 이어진다. 하이얀 속살에 곧게 치솟은 삼나무는 여느 나무와는 다른 기품을 보여준다.
명산엔 명인만 찾는게 아니고 나무 또한 설 땅을 아나 보다.
지난해 보성 차밭에서 사정상 삼나무 숲길을 두고 돌아서 아쉬웠는데 이 곳에서 실컷 만끽한다. 계곡 바위는 기암괴석이고 청아한 물소리며 기화이초 그윽하니 백담사 계곡과 치악산 계곡과는 또 다른 풍취를 자아낸다.
금강이라한들 이보다 더하진 않으리라 싶게 빼어난 절경이다. 어느새 속진 번뇌 말끔이 지워지고 간밤의 취기도한 사라진 듯 싶다. 이 땅의 어느 산천인들 비경 아닌 곳 있으랴만 불과 한 시간 남짓이면 도달하는 이곳을 찾는 데 지천명이 넘어서야 찾았으니 안타까운 회상에 젖는다.
산 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레 갈레 깊은 산속 헤맸나.
밤벌레의 울음계곡 별빛 곱게 내려앉는데
그리운 맘 임에게로 어서 달려 가보세
금강에 살으리랏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데리고 금강에 살으리랏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요
이 몸이 싀어진 뒤에 혼이 정녕 있을 진대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랏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고저
어느새 산정에 오르니 갓바위가 웅혼한 자태를 드러낸다
바위 모습이 선비가 갓을 쓰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 싶어 지어진 이름이란다.
남도 선비들이 과거보러 한양갈 제 이 재를 넘었다하니 낭군님의 장원급제를 기원하며
아낙들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미리 오른 일행이 반가이 맞아준다. 더불어 한 컷 찍는다. 발 아래엔 천촌만락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고창 선운사 방장산과 내변산 자락이 꿈결인양 아득히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엔 가린 서해바다 아스라이 보이고 하늘엔 솔개가 높이 날아 오른다.
유석이 권하는 복분자 한잔에 천하 근심사라지고 산위에서 부는 바람에 땀방울은 간데없다.
무등댁에게 한잔 권하니 잠시 사양하다 이내 들이키며 짓는 미소가 해맑다.
무엇에 쫓기는지 우리 일행은 하산길을 서두른다.
천하태평 바람만이 들꽃 여인들과 느릿 느릿 걷는 데 영욱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우리와 보조를 맞춘다. 하행길 또한 완만한데 도처가 절경이고 이름 모를 야생화 향기 진동한다.
꾀꼬리 한마리 날개짓하더니 모처럼 청아한 노랫가락 들려준다
우린 풍광 좋고 솔바람 소리 그윽한 곳에 잠시 휴식을 취한다
문득 유리왕의 황조가가 떠오른다
황조가(黃鳥歌)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나는 저 꾀꼬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 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유리왕조에 가사와 창작배경이 실려 전한다.
BC 17년(유리왕 3)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어 2명의 여자를 계실(繼室)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는 화희(禾姬)로 골천(川) 사람이고 한 여자는 치희(稚姬)로 한인(漢人)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질투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지어 각각 살게 했다.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간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는 또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으며 "너는 한 나라 비첩(婢妾)이면서 어찌 그리 무례한가"라고 말하자 치희는 이에 마음이 상해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말을 달려 쫓아갔지만 화가 난 치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쉴 때 황조가 날아와 노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짐시 걷다 보니 오디나무 즐비하고 아주 오래전에 민간이 살았음직한 곳에 다다른다.
옛 모습 간곳없고 흔적만 남았는데 녹음방초만 우거졌거니 무상감에 젖어 노천명과 두보의 시 한수를 읊조려본다. 피고지는 꽃잎처럼 인간사 영고성쇠 도한 부질없거니 오직 적막함만이 나그네의 수수로움을 달래준다..
춘망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感時花淺淚(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하여 산과 물은 그대로인데
성에 봄이 드니 초목만 무성하도다
시절을 느끼니 꽃을 보아도 눈물 흐르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놀라는구나
봉홧불은 석 달이나 이어지는데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 이상의 가치로다
긁자니 또다시 빠지는 흰머리에
이제는 비녀조차 꽂아지지 않는구나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늧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들풀처럼 살다간 산중의 민초들을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나비 나풀거리며 분주히 오간다.
묵상에 젖어 내려가는 데 살결이 뽀오얀 나무에 비목이란 푯말이 걸려있다.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엔 왕건과 견훤이 자웅을 겨뤘고, 몽고군과 고려군이 접전을 치룬곳이며 임진란대 소서행장에 윤진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근세에 녹두장군이 머물다 갓으며 6.25때도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 하니 이 땅을 수호하려 산화한 무명용사들의 못다한 한이 넋이 되어 비목으로 자라났음인가.
유월이면 더욱 애틋하고 안타까운 선열에게 잠시 묵념하며 그들의 넋을 달래본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계곡 깊은계곡 양지녘에
비바람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머어언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옛날 천진수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호국의 달, 6월 / 윤인환 ♣
이제야 알것다!
6월의 온 산하가 푸르러도
서있는 이땅이 붉은 것은
어둠속에서,
골짜기에서,
금수강산 지키려 장렬히 산화한
내 동포의 핏빛인것을
이제야 알것다!
6월의 맑던 하늘에 태풍 몰려와
우르릉 쾅쾅 울부 짖으며
외솔나무,
느티나무,
곁가지 흔드는것은
내 동포의 서러움이 허공에 아직도 남아 있슴을
이제야 알것다!
담장너머 줄장미가
하나,둘,
6월에 피는것은
" 조국아 일어나라! 태양처럼 붉게 붉게 세계 속에 빛나라 "는
내 선조,
선조 영령들의,
조국애에 피끓는 염원이
한반도 골목마다 환생한 것을.*
아름다운 것은 너무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난다.
아마도 아름다움을 탐하는 인간의 본성이 서로 충돌한 탓이리라
오천년 역사에 전쟁이 끊이지 않음도 이토록 아름다운 산하를 빼앗고 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의 발로라면 지나칠 것인가? 그래서 모든 미학에는 아지 못할 슬픔이 깃들어 있나보다.
꽃잎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찿아와서 음 어데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있나
비야 네가 알고있나
무엇이 이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돼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함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있나
비야 네가 알고있나
무엇이 이숲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있나
비야 네가 알고있나
무엇이 이 숲속에서 음 이들 데려갈까
음 이들을 데려갈까
이렇듯 아름다운 입암산을 탐방하고 모두 합류하니 벌써 두시를 향해간다.
백양사 입구에 위치한 정읍집에서 특선요리를 시키니 금새 산해진미가 차려진다.
모두 시장하여 허위 허위 허기를 채우고 동동주 몇순배 도니 비로소 화기애애하게 즐거웠던 산행길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넉살 좋은 주인이 흐뭇했던지 동동주를 3병이나 써비스한다.
들꽃 여인들도 시종 즐거운 표정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정이 들었음인가?
아직도 한낮의 더위가 느껴지는 오후 3시 30경, 서둘러 떠나는 우릴 보며 손을 흔든다.
무자년 유월 열나흩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