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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추억 더듬기
뜻이 있으면 길도 있다.(There's will, there's way)
고속, 지방 가릴 것 없이 어지럽게 깔려 있는 도로에 마구 파헤쳐
가는 개간, 개발과 광범하게 자리잡은 부대로 인해 미로를 헤매듯
시행 착오를 반복했을 망정 이름처럼 빼어난 봉, 수암봉(秀岩)이
노고를 말끔히 씻어주는 듯 했다.
400m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전망만은 이름대로니까.
다만, 수암봉 ~ 슬기봉 안부의 응달은 난동(煖冬)이라고는 하나
아직 2월 중순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곳곳에서 위험을 느낄
만큼 겨울 그대로였다.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가 여유를 부리게 했나.
갈 길 놔두고 수리산 추억 더듬기에 들어갔다.
내가 처음 수리산에 오른 것은 1971년 초 이맘 때.
당시 나는 산행할 때에 지금과 달리 내 차를 애용했다.
미군 케네디 찦을 불하받아 개조했는데 4륜 구동에 힘이 장사인
건 물론이고 야전세단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승차감이 뛰어났다.
교통편이 사통팔달되어 등산과 차량 운행을 완벽하게 분리해도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차량이 애물단지인 지금과 달리
접근과 탈출의 애로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안양을 들머리로 하여 수리사로 하산했는데 등산이 일상화되지
않은 그 때엔 눈 덮인 산길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수리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고찰이다.
그러나 임난과 6.25 동란으로 전소가 거듭된 수난사가 읽혀졌다.
수리사(修理)는 불심을 닦는 성스러운 절이라는 뜻의 이름이며
어느 왕손이 기도중 부처님을 친견했다 하여 견불산(見佛)이라
부른 이 산 또한 수리사의 이름을 따르게 되었단다.
독수리가 치솟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나
수리사에 대한 설명이 곤란하다.
이름이야 어떠하던 주변의 어느 산보다도 오르는데 부담이 적고
편하면서도 산맛을 다 보게 하는 산임에 틀림 없다.
또한 요리 조리 돌고 돌아야 했지만 정취를 느끼게 했던 전답을
덮어버린 고층 아파트들에 늙은 이는 심란해 졌으나 안양, 군포,
안산의 사랑을 받고 있음도 확실하다.
오르는 이가 사방에서 부지 기수니까.
당시에는 이름도 몰랐던 슬기봉, 태을봉, 관모봉 수암봉 등이
으젓한 문패(標石)를 차고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정맥은 475m 슬기봉으로 올랐다가 남하하게 되어 있으나 군의
점유로 슬기봉 이정표지목 안부에서 우회를 강요당한 터라 북북
동으로 상당히 비켜 있는 정상으로 추억찾기에 나선 것이다.
육체적 고달픔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정상인 태을봉을 돌아오다가 안부에서 막걸리 두 잔을 사마셨다.
잠시 나오려던 땀이 질겁하고 숨어버리도록 시원했다.
그러나 수리산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 했다.
깎이고 잘리고 뚫리느라 얼마나 아프겠는가.
500m 미만이라고 얕잡아 보았다가 암릉들을 통과하느라 진 땀
빼고 된 고생했던 당시가 마냥 그리울 뿐이었다.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 이즈음과 달리 호젓했던 그 때 그 산이.
수리산을 뒤로 한 후로는 감투봉을 지나 속도감 있게 동진했으나
골프장(안양베네스트컨트리클럽)이 다시 제동을 걸었다.
47번 국도 양편으로는 개발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부절하게 오가는 경부선 철로를 무단 횡단하는 위험한 억지까지
부렸으나 산자락의 난개발로 정맥 잇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오봉산을 겨냥하고 무작정 오른 것이 주효했다.
곧 고고리고개 도로에 내려섰으니까.
버스 정류장에 안양행 버스가 도착했다.
하마터면 무심코 이 버스를 탈 뻔 했다.
조금 전에도 배낭 깔고 앉아 잠시 쉬며 부지런히 오가는 열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깜박 조는 새에 열차타고 고향가는 꿈을
꾸지 않았던가.
대간, 정맥이 심증적 고향이라 해도, 그래서 고향 땅에서 노니는
느낌이라 해도 육체적 고달픔을 부인할 수는 없음이 아니겠는가.
해 안에 지지대고개에 도착하려면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고 판단
되어 다리에 날개를 달고 있는 참에 교행하게 된, 산책중이라는
의왕의 한 중년이 말을 건넸다.
"어르신 한남정맥 종주중이십니까?"
그 역시 왕왕 듣는 말을 했다.
존경스럽다거나 그 연세가 되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등등.
그리고 서둘지 않아도 되고 길 잃을 염려도 없다는 그의 고마운
조언대로 일사천리의 진행이 지지대고개까지 이어졌다.
다만, 축 늘어진 고압 송전선과 줄기차게 동행하는 것이 왠지
꺼림했지만 석양 노을에 물들어 가는 동북의 백운산과 광교산이
마음 설레게 했다.
왜냐 하면 한남정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면하게 될 500m
대의 고산이니까.
더디고 더딘 지지대(遲遲臺)고개
교통편이 경인선에서 경수선 전철로 이미 바뀌었고 정맥 거리상
으로도 중간점이라서 인지 지지대고개의 아침이 산뜻했다.
계속되는 난동 덕이기도.
의왕시(왕곡동, 옛 이름은 沙斤峴)와 수원시((파장동)의 경계로
1번 국도상인 이 고개에는 경기도 유형 문화재 24호로 지정된
지지대비가 서있다.
1807년에 건립하였다니까 200년 역사가 서려 있다.
'지지대'라는 이름에는 이조 22대 정조대왕의 효심이 담겨 있다.
아버지(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전배(展拜)차 원행시에는
이 고개에 오르면 현륭원이 보이는데도 더디 가는 듯한 느낌에
답답함을 토로했고 환궁때도 잠시 쉬면서 자꾸만 묘소쪽을 돌아
보며 신하들에게 차마 발을 빨리 뗄 수 없는 심정임을 말했다.
그래서 행차가 지연되어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단다.
지금의 왕복 8차선 직선 대로가 되면서 이전의 편도1차선이었던
꼬불길이 노송지대로 잘 다듬어졌다.
이 노송들은 정조대왕의 행차 당시에 심었다니까 수령 200년이
넘는 소나무들이다.
효행기념관과 효행동산도 들어섰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아들 정조의 효도가 바로 지금의 수원을
있게 했으며 효행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도 이에서 비롯되었단다.
그런데 지지대고개에는 이름에 걸맞는 또 하나의 현대사가 있다.
고개 마루턱의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가 말해주는.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남침한 북쪽 공산군의 파죽지세에 속수
무책으로 쫓겨가던 국군이었다.
유엔군이 이 동란에 참전하여 처음 전투를 벌인 곳이 공교롭게도
지지대고개였단다.
소위 남진 속도를 지연시켰다니까.
한남정맥의 맛을 만끽한 하루였으나....
백운산과 광교산의 흡인력에 빨려 가듯 고개를 떠났다.
의왕과 수원의 산, 백운산이 목전에서 나를 흥분케 했다.
드디어 늙은 이가 한남정맥의 맛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하루가 너무 짧은 시간으로 끝나고 만 것이 유감이지만.
지루한 계단도 개의되지 않았으며 정상의 통신시설을 우회하여
의왕시가 세운 정상석 앞에 섰다.
564m 라면 우리나라의 가장 흔한 이름인 수많은 백운산중에서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으나 고도란 상대적이다.
고산 거봉들과 겨루기에 벅찬 1000m 대 보다 더욱 우뚝하니까.
그림과 싸움은 멀리서 구경해야 한다던가.
마음 아팠던 정맥이 서쪽 수리산까지 수려하게 보이니 말이다.
수암봉에서 목감 시가지를 건너 운흥산으로 이어지는 지나온
길도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보였다.
광란의 한 복판인 수지 신갈 일대만 가린다면 광교산 ~ 형제봉
으로 이어지는 정맥 또한 나무랄 데 없건만.
안부의 창성사지(彰聖寺址)와 노루목을 지나 오른 광교산 정상
시루봉의 정상석은 이채롭다.
석두에 미니(mini) 수원성을 올려 놓은 것은 수원의 진산임을
보는 이에게 각인시키려 함일까.
582m광교산은 한남정맥의 최고봉이며 수원의 산답게 등산로가
사방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찾는 이 또한 평일에도 주말에 버금가도록 많단다.
장쾌한 청계 ~ 광교 능선의 만만찮은 유혹에 기회를 엿보기로
동의하고 비켜있는 비로봉 정자에도 들렀다.
광교산 정상인 시루봉
양지재에서 형제봉 오르는 급경사 계단이 만원사례인 것 처럼
완만한 형제봉 두 바위에도 앉을 자리가 없도록 많은 인파였다.
등산로 미화작업의 일환인가.
형제봉 바로 아래 입간판에 담겨 있는 박재삼의 시 '산에서'가
등.하산객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듯 했다.
<전략>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 속에 / 아련히 어린 우리 한평생 /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로 /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후략>
지금부터 내려가야 할 저 아래 광란의 현장이 싫어 이 자리에
붙박이가 되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그리고 400 여m의 고도를 줄기차게 내려가야 했다.
버들치고개 ~ 망가리에 이르는 동안 아침의 상쾌함과 백운산,
광교산의 행복감은 모두 다 시들어버렸고 신갈 일대에서 다시
마음 아파할 수 밖에 없는 다음 날이 지레 겁이 났다. <계속>
첫댓글 스캔하지 않은 사진이 일부 남아 있어 약간은 다행이라 생각하고 뒤늦게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