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聽全收者도 亦有四句니라
설청전수자 역유사구 (探玄記, 大正藏 35. p. 118 下)
'설(說)'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한다는 말이고, '청(聽)'이라 하는 것은 설법을 듣는다는 말이므로 이것은 바로 설법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설은능(能)이고 청은 소(所)이며, 능은 체(體)이고, 소는 용(用)이므로 설은 바로 체(體)이고, 청은 용(用)입니다. 설과 청이 '전체를 거둔다[說聽全收]'함은 설과 청, 능과 소, 체와 용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는 부처님의 마음을 떠난 밖에 교화할 중생이 없거니와 하물며 설하는
가르침에서리오. 그러므로 오로지 부처님 마음이 나타난 바이다.
一은 離佛心外에 無所化衆生이어니와 況所說敎리요
일 이불심외 무소화중생 황소설교
是故로 唯是 佛心所現이라.
시고 유시 불심소현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설법하는 부처님 따로 있고 교화받는 중생이 따로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 마음 그대로이지, 부처님의 마음을 떠나서 중생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체즉용(體卽用)으로서 체(體) 가운데 용(用)이 전부 구비돼 있다는 말입니다. 불심을 체로 잡고, 교화할 중생을 용으로 삼으면 체즉용으로서 중생 다르고 부처님 마음 다르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 이대로가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 이대로가 중생인데, 하물며 설하신 가르침은 그것을 능과 소로 나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것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으니, 중생의 마음을 여의고
따로 부처님의 덕(德)이 없기 때문이다.
二는 總在衆生心中하니 以離衆生心하고 無別佛德故니라.
이 총재중생심중 이리중생심 무별불덕고
앞에서는 부처님 마음 가운데 모든 것이 다 구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다 중생심 가운데 내재되어 있어 이 중생심을 여의고 부처님 마음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용즉체(用卽體)를 표현한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모두가 오로지 두 마음이니,
앞의 두 가지 설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중생의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니, 부처님의 마음 중에 있는 중생이 중생 마음 안에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이와 같이 전부 거두어서 설법하는 것과 듣는 것이 걸림이 없느니라.
三은 隨一聖敎全唯二心이니 二前二說이 不相離故니라
삼 수일성교전유이심 이전이설 불상리고
謂衆生心內佛이 謂佛心中衆生說法하니 佛心中衆生은 聽衆生心佛說法하여
위중생심내불 위불심중중생설법 불심중중생 청중생심불설법
如是全收하여 說聽이 無碍니라.
여시전수 설청 무애
중생이 즉 부처이고 부처가 즉 중생으로서 부처를 떠나서 중생이 없고 중생을 떠나서 부처가 없습니다.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이 부처님 마음 가운데 있는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니, 부처님 마음 가운데의 중생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것'은, 체(體)와 용(用)이 쌍존(雙存)으로서 중생이 부처고 부처가 중생으로서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됩니다. 즉 부처와 중생이 서로 듣고 설법을 하지마는 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설하고 부처가 듣는다든지, 부처가 설하고 중생이 듣는다고 하든지 간에 함께 존재하는 것에 장애가 없어 쌍존(雙存)하는 것입니다. (계속)
출처 : <백일법문 하(百日法門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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