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 생활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는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33세)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은 허준이 어느 정도 내의(內醫)로서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오르지는 못했던 시기이다. 둘째는 1592년 임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 때까지이다. 1592년 왜군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오자 허준이 임금을 좇아 의주까지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한 것을 계기로 허준은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 16년 동안 허준은 어의로서 최고의 생애를 누렸고 그의 권세는 결코 다른 문무관보다 낮지 않았다. 셋째 시기는 1608년부터 그가 죽던 1615년까지이다. 이 7년은 그의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향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어의로 지내면서 자신의 책들이 잇달아 출간되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삶을 마쳤다.
허준은 나이 33살 때 비로소 관직에 나아갔다. 그가 받은 벼슬은 종4품 내의원 첨정(僉正)이었다. 유희춘 같은 고관의 추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허준이 내의원의 첨정이란 벼슬을 걸게 된 것은 그가 의원으로서 매우 크게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중앙의 여러 의료 기구와 지방의 기구를 모두 망라해서 내의원은 으뜸의 기관이었고, 이 내의원에 자리잡는 것은 여간 출중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종4품 첨정이란 벼슬은 또 어떤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당시 의과(醫科)의 초시, 복시를 다 합격해서 얻는 관직이 1등인 경우가 종8품, 2등이 종9품, 3등이 종9품에 지나지 않았다. 첨정(僉正, 종4품, 1명)은 정(正, 정3품, 1명)에 이어 고위 행정직의 제2위 자리이다. 규정상 서자 출신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실직(實職, 행정직)이 정3품 내의원 정(正)이었음을 감안할 때, 젊은 허준은 단박에 거의 최고위직 근처까지 올라갔다. 이는 대단한 파격이었다.
1571년 이후 십여 년 동안 학술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두각을 보이고 간헐적으로 왕의 진료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내의(內醫)로서 허준의 위상은 아직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1590년(선조 23년) 허준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이해에 그는 나중에 광해군이 된 왕자의 두창을 스스로 나서서 고쳤다. 그 사정을 허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해 왕자가 두창에 걸려 증세가 좋지 않았으나 세속 금기에 얽매어 감의 약을 쓰려 하지 않고 의관들이 팔짱을 끼고 그저 그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임금께서는 비명(非命)에 간 것을 가슴아파하시고 약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경인년(1590년) 겨울 왕자가 또 이 병에 걸렸는데, 임금께서는 지난 일을 떠올리시고 신(臣)에게 특명을 내려 약을 써서 치료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 ...... 그 증상이 매우 위험하였으
나 모두들 약을 써서 허물을 얻을까봐 가만히 있었고 병세는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 신이 성지를 받들어 영약 여러 개를 힘써 찾아 문득 세 번 약을 쓰니 세 번 효과가 있어서 금새 악증이 없어지고 정신이 되돌아와 여러 날 지나지 않아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 인용문 내용을 보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기회를 개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허준은 구속(舊俗)에 집착하는 다른 어의와 분명히 구별되는 태도를 보였고, 또 처방을 내어 병을 고쳐냄으로써 다른 어의, 명의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렀던 것이다.
다른 어의의 수수방관과 허준의 힘쓰는 모습에 보이는 대조! 이 감동스러운 장면이 가상의 드라마가 아닌, 실제 허준의 삶에서 나타난 것이다. 만일 실패했다면, 엄청난 비난이 그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험을 강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2세 때. 왕자를 고쳐낸 댓가로 파격적인 보상이 뒤따랐다. 선조는 그에게 당상관의 품계를 내렸다.
이전까지 그는 정3품이면서도 당하관인 통훈대부에 머물러 있었지만, 광해군의 두창을 완치함으로써 그것을 뛰어 넘어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올라선 것이다. 허준에게 이 당상관의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이는 허준이 당시의 신분구조상 의관 등 기술관인 서얼 출신이 정상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지위인 당하관 정3품 통훈대부라는 한계를 큰 공으로 돌파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고에 불과했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은 어의로서 허준의 신임이 더욱 도타워진 계기가 되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허준이 선조를 따라서 의주 피난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허준으로서도 임금의 피난길을 좇아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 누구도 왕을 좇는 어려움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편안함과 목숨을 중히 여겼던 것이다. 선조를 끝까지 따라간 문.무관은 겨우 1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의원 가운데에서도 임금을 좇은 사람은 겨우 2인이었으며, 그 중 1명이 허준이었다. "사대부가 너희보다 못하구나"는 선조의 말은 내시와 노비들에게 한 것이지만, 의관인 허준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피난이라는 위중한 상황은 늘 충효를 부르짖던 사대부들의 허위의식이 발가벗겨진 반면에 일부 내시와 종들, 허준 같은 의관의 충심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돋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허준은 다시 한 번 선조의 확고한 신임을 사게되었다. 그것은 나중에 공훈의 수여로 이어진다.
허준이 다시 한 차례 승진하는 것은 또 동궁(광해군)의 병을 고친 덕택이었다. 1596년 허준은 다른 의관과 함께 동궁의 병을 고쳤다. 그 공으로 선조는 허준을 동반(東班)에 올리는 한편, 품계와 가자의 승진이라는 상을 내렸다. 승진도 승진이지만, 허준에게는 "동반(同班)에 오르게 된 사실"이 더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조치는 그가 서얼 출신의 기술관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반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한다.
이제 그와 그의 자손은 그 어떤 신분상의 굴레가 적용되지 않는 떳떳한 양반의 일원이 된 것이다. 허준의 나이 58세 때, 내의원 들어온 지 17년. 이제 다시 승진했으니, 1등급 승진했다면 허준의 품계는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2품 가의대부에 해당한다. 가의대부는 문관의 경우 6조 참판, 홍문관.규장각의 제학, 8도 관찰사 등의 관직에 내려주던 작위이다. 그런데, 2등급 승진했는지도 모르겠다. 1601년 8월에 허준이 쓴 {언해두창집요} 발문을 보면, 그의 작위가 "정헌대부(정2품)"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1604년 6월, 왜란 때 공훈을 세운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공신 책봉이 있었다. 이 때 서울서부터 의주까지 임금이 탄 가마를 모신 사람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책봉하였는데, 허준은 호성공신 3등에 책봉되어 양평군이라는 읍호를 받았다. 그의 나이 66세. 나라와 임금을 지킨 훈공(勳功)의 대가는 봉호의 책정이외에, 품계의 1등급 승진이 주어졌다. 당시 허준이 정2품 가의대부에 있었으니까, 그보다 1등급 위인 종1품 숭록대부가 된 것이다. 품계로만 따진다면, 좌찬성.우찬성과 같은 급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허준이 종1품에 오른 것은 그로서는 대단한 경사였지만, 서얼 출신의 의관이 1품에 오른 것에 대한 문관의 질시와 견제가 더욱 심해졌다. 종1품직 제수 이후에 {실록}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사관(史官)의 악평이 보이기 시작한다. "허준은 성은을 믿고 교만을 부리므로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1606년 1월, 오랫동안 차도가 없던 선조의 병세가 호전되자, 선조는 수의(首醫)였던 허준에게 관직의 최고의 단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내렸다. 이런 조치는 의원의 신분으로서는 조선 왕조의 개국이래 처음 있는 경천동지할만한 사건이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그것이 신분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히 들고 나왔으며, 결국 선조가 손을 들었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허준은 의관으로서는 최초로 생전에 보국숭록대부의 문턱에까지 도달했다. 의관으로서 그가 이룩한 성취는 진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 때 허준의 나이 68세. 영광은 잠시 뿐. 1608년 2월 1일, 허준에게 "하늘이 무너졌다." 임진왜란 때 입은 엄청난 심리적 상처 때문에 이후 늘 병에 시달렸던 선조의 병환이 1606년 1월 잠깐 좋아졌다가 봄 이후에 많이 안 좋아졌다. {선조실록}에는 이 시기 선조의 병환에 대한 기사를 매우 많이 싣고 있다. 1607년 10월, 왕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수의(首醫) 허준이 제대로 약을 쓰지 못해 그렇다"는 탄핵의 주장이 정가 일각에서 강하게 제기되었다. 임금이 사경에서 헤매고 있는데, 어의를 벌주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하여 그런 주장이 당장 받아들여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조의 병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1608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선조의 병환 악화와 죽음은 소박한 의학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소북파와 대북파의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 투쟁이 묻어 있었다. 1608년 2월 이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계속 그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광해군은 단지 처음에는 삭직의 조치만 내렸고, 이어서 3월 17일, 마지못해 문밖으로 쫓아내는 조치를 취했다. 그래도 계속 먼 곳으로 귀양보낼 것을 요구하자, 1608년 3월 22일, 먼 곳 유배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곳으로 그를 귀양보내도록 조치했다. 허준의 나이 69세. 바로 이런 조치로 해서 허준은 함경도 끝이나 남해 바다의 섬으로 유배당하지 않고, 중간 정도인 의주에서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허준의 귀양 이후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그를 "주거지인 집에 대나무로 울을 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圍 安置)" 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이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허준은 귀양을 산 지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 11월 22일에서야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허준의 나이 71세. 1609년 11월 이후 허준은 귀양에서 풀려나 내의원에 복귀하여 광해군의 병을 돌보았다. 만년에 그는 {동의보감}을 지어 바쳤고(1610년), 역병에 관한 두 책(모두 1613년 출간)을 편찬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의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1615년 11월 무렵 세상을 떴다. 향년 77세. 그에게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의 작위가 추증 되었다.
33세 때 내의원에 들어온 이후 40여 년 동안 선조와 광해군 두 임금의 병을 정성스럽게 돌본 공을 인정하여, 나라에서는 그에게 '의관의 역사상 최고의 지위'를 그에게 안겨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