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극장가 앞마당은 이런 모양새의 구도를 그릴 것이다.
1번. “어! <가문의 부활>! 대따 재밌겠다. 난 무조건 저거!” 2번. “<라디오 스타>? 아~ <왕의 남자> 감독이 만든! 나 왕남 진짜 좋아하잖아. 작품성 있어서. 준기옵빠!” 3번. “<타짜> 저거 허영만 만화 아냐? 백윤식도 나오네? 볼래?” 4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보자~ 응? 강동원이랑 이나영 나오는데 엄청 슬프대.”
사람의 눈은 가지가지라서 임자없는 옷은 없다고 했다. 쇼윈도에 걸린 옷이 내 눈엔 천하에 못 입을 옷처럼 보여도 누군가는 그 옷이 예쁘다며 사간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에든 임자가 있다. 그런 ‘싼마이’ 코미디를 왜 보나, 뻔한 연애놀음이 뭐가 좋나 싶어도 누군가는 거기서 모종의 즐거움을 느낀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4번 유형에 속한 이들이 그 ‘엄청 슬프다’는 영화를 보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이 청명하고 상쾌한 가을에, 왜 우리는 돈 내고 토끼눈 되기를 자청하는가. |
멜로, 울려주는 애정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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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 |
멜로스(Melos: 노래)와 드라마(Drama: 극)가 결합된 말인 멜로드라마는 원래 노래가 있는 극 형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멜로’라는 기표는 노래라는 원래의 뜻을 잃고 ‘줄거리가 복잡하고 통속적인 극’, 특히 ‘감상적인 애정극’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애인한테 차였다고 술 먹고 공중전화 부수고, 자해할 마음으로 소주병을 깨어 드는 촌티+소심+과격 대학생이 있다. 친구처럼 그의 곁에 있던 여자는 전부터 그를 좋아했으면서 말 한마디 못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다시 만난 두 남녀는 서로 끌리는데 그놈의 성격 때문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미루기만 한다. 큰맘 먹고 밤을 보냈더니 외려 어색해져버렸다. 그 와중에 여자의 엄마가 사고로 죽고, 사랑은 또 어긋나고, 못 잡고 못 잡히고, 관객은 마음을 태운다(<사랑을 놓치다>). 이런 여자도 있다. 고등학교 때 이수라는 남자애를 좋아했는데 그가 사고로 죽는다. 알고 봤더니 그는 쌍둥이라 똑같이 생긴 동생 이석이 있었다. 여자가 이석과 잔 뒤 이석은 소식없이 떠나버린다. 커서 학원 선생이 된 그녀는 이석과 이름도 같고 얼굴도 닮은 고등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남학생을 찾아 그녀와 이름이 똑같은 여학생이 등장하자 이석은 “네가 사랑한 건 형이지 내가 아니잖아”라며 울고, 여자는 그들을 질투한다. 그 와중에 진짜 이석이 어른이 되어 그녀를 찾아온다.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 있었던 정우라는 남자가 데려온 것이다. 어린 이석, 어른 이석, 복병 정우, 그리고 그녀. 네 사람은 모호한 전선을 형성한다(<사랑니>).
복잡한 줄거리에 감상적인 애정극. 말 그대로 멜로영화다. 그러나 위의 사례로 뭔가 충분치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멜로의 이미지가 ‘연애극’ 이상의 무언가, 즉 ‘눈물’로 대변되는 ‘신파’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뜻에서 좁혀지고 좁혀져 ‘감상적인 애정극’을 뜻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슬프고 울려주는 감상적인 애정극’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지시어로도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 슬픈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 연인들은 죽거나, 병에 걸리거나, 실종됐다 돌아오거나, 사회적 벽에 부딪히면서, 신음하고 실음하고 실연하는 시련을 겪는다.
이렇게 범위를 좁혀놓아도, 멜로는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 유형에 따라 관객이 얻는 효용도 각각 다르다.
제 1장, 이루어질 수 없어 슬픈 연인이여
맺어질 수 없는 연인의 이야기는 비극의 레퍼토리로서 고릿적부터 초강세를 두어왔다. 셰익스피어 할아버지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모범을 보이신 뒤 세계 각지의 자손들이 활약을 펼쳤다. 적국의 국민으로 태어났거나 신분이 달라서, 혹은 한쪽은 지독하게 부유한데 한쪽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들은 가약을 맺을 수 없다. 사랑할 수 있어야 병에 걸려 죽든지 말든지 하지. 이들의 비극은 사랑을 강탈당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가능성을 원천봉쇄당한 데서 온다. 일년 전 방송된 드라마 <환생>은 현생의 네 남녀를 주인공으로 이들이 전생에 나눈 사랑을 그렸다. 주인공들이 사각관계를 이룬 현재는 밋밋했으나, 이들이 몽골 장군과 고려 여인으로 화해 안타까운 사랑에 불타자 사람들은 “아이고, 저걸 어떡해!”라며 콧물을 흘려댔다. 금지된 사랑은 그 자체로 드라마. 이성간의 연애에 장벽이 없어 그를 취하기 어려운 지금, 사람들은 마지노선인 불륜과 동성애를 가져다 쓴다. 여동생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진 유부녀(<정사>), ‘배우자 불륜 상대의 배우자’를 사랑하게 된 남녀(<화양연화>), 무딘 생활을 하고 있는 주부를 인간이자 여자로 일깨운 남자(<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주변의 눈을 피해 평생 숨어 사랑한 두 남자(<브로크백 마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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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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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 |
관객은 이 불운한 사랑의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권태로운 결혼 생활에 지루해진 기혼자들은 물론이고, 처녀 총각들도 낭만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 ‘꿈에 그리던 사랑이 찾아왔는데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은 누구의 가슴속에나 자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옆집의 일이라면 ‘불륜’이란 말로 대상화될 사건도,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로맨스’로서, 그들이 진심이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누군들 우아하고 고상한 차우와 리첸이 되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말이다.
제2장, 완벽한 그들은 죽음과 키스했네
그 다음엔 강탈당한 사랑이 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게 그랬듯, 신은 완벽한 연인을 시샘하여 그들을 죽음의 세계로 내몬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철수와 수진은 누가 봐도 잘살아줬으면 하고 바랄 만큼 아름다운 연인이다. 둘이 어깨와 허리를 감고 걷는 모습, 주고받는 대화, 위로하고 힘이 되는 방식,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아 보이는 데가 없다(물론 그들이 초인간적으로 예쁘고 잘생겼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완벽한 사랑이 불가항력에 의해 깨진다. 수진의 머리 속엔 ‘치매’라는 지우개가 있고, 죽음보다 더 무서운 망각의 강이 둘의 사랑을 지우려 한다. <국화꽃향기> 인하의 상황도 가히 좋지 않다. 온갖 아픈 척은 다 하는 첫사랑의 여인과 겨우 결혼에 골인, 아기까지 생겼건만 행복도 잠시, 예전에 악전고투하는 동안 그녀는 암을 얻었다. 희재는 아기라도 살리겠다고 혼자 앓고, 인하는 알고도 모른 척하느라 눈물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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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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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의 지우개> | |
관객이 얻는 것은 관음증에 의한 일종의 패티시. 아이로니컬하지만 로맨틱코미디를 보는 이유와 비슷하다. 로맨틱코미디의 영역은 ‘라면 먹고 갈래요?’와 그 뒤를 잇는 키스까지. 그 다음에 오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알 바 아니다. 사랑의 몸통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설레는 감정과 밀고 당기기’. 로맨틱코미디는 거기까지만 소비한다. 주인공을 죽이는 멜로는 동일한 원리로 ‘이별의 비극’을 소구한다. 사랑이 식은 뒤에 오는 이별은 구질구질하다. 그러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익었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은, 이별을 사랑의 몸통에서 떼어내 곱게 승화시킨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래서 정확하다. 한편, 그 시선이 관음증적이라 하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즐길 생각은 있어도 그 주체가 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죽음 앞의 하릴없는 저항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실제로 죽거나 치매 환자가 되어 세상과 이별하고 싶은 이가 있을 리 없다. 언제까지나 아름답고 슬픈 ‘남의 일’로서, 나는 그냥 잠시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제3장, 죽음 이후에 찾아온 사랑
눈물의 바다를 건너 죽음으로 끝나는 멜로가 있는가 하면, 다짜고짜 죽음으로 시작하는 멜로도 있다. 연인이 예고없이 죽어버린 경우 대개 그렇다. 남은 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뭐가 있으랴. 먼 산에 대고 “오겡키데스카~? 와타시와 겡티데스~!”를 외칠 수밖에 없는 신세다(<러브레터>).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를 찾아오기도 한다. 아내와 딸이 사고를 당했는데 딸은 몸이 살고 아내는 혼이 살았다. 아내의 혼은 딸의 몸에 빙의하여 남편을 찾아온다(<비밀>). 일년 전 죽은 아내가 문득 돌아왔다. 그러나 장마 한철 만이다(<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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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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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나러 갑니다> | |
죽음은 과거의 사랑을 거름 삼아 새로운 사랑을 싹틔운다. 죽은 이츠키와 히로코의 사랑이 발단이 되어, 이츠키와 또 다른 이츠키간의 첫사랑이 되살아나고(<러브레터>), <비밀>의 헤이스케는 ‘아내도 딸도 아닌 여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꾸리게 된다. 멜로를 싫어하는 이들도 이 계통의 영화는 좋아할 수 있다. 망자에 대한 추억은 관객을 아련한 옛사랑(특히 첫사랑)의 노스탤지어로 인도하고, 그 아름다운 땅엔 눈물 대신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남은 자들은 추억을 추스르고 새로운 삶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를 지켜본 관객도 2시간 동안의 그리움을 마음에 품고 현실의 삶으로 걸음을 옮긴다.
제4장, 진보하는 멜로. 사랑보다 더 슬픈 무언가
그리고 요즘, 부쩍 수상쩍은 무리들이 출몰하고 있다. 이들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구닥다리 멜로다. 삼류 건달과 중국인 불법체류자의 플라토닉 러브(<파이란>). 시골 노총각과 다방 레지의 사랑, 그리고 에이즈(<너는 내 운명>).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여교수와 곧 죽을 사형수의 행복한 시간(<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7년 만에 나온 장기수가 더듬는 죽어버린 연인의 자취(<오래된 정원>). 내용은 진부한 통속극인데,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남들 다 사는 평범한 삶조차 살지 못하는 이들 주인공은 ‘철수와 영희가 있었습니다. 둘은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영희가 병에 걸렸습니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선남선녀가 될 수 없다. 멜로의 형식을 빌렸을 뿐, 눈물의 코드는 <인간극장>의 그것과 차라리 비슷하다. 삼류 인생에 대한 차가운 시선, 장기수 문제, 사형제도 등의 사회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까놓고 보니 예쁜 이야기가 아니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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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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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란> | |
어쨌든 울긴 엄청 울었다. 그것도 뭔가 묵직한 게 꾹꾹 차올라 숨이 막힐 지경으로 울었다. 그런데 왜 울었나? 그들의 사랑이 슬퍼서? <파이란>의 강재와 백란은 ‘서로 사랑’한 적도 없는데? 인사 한번,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이 ‘송장으로 나타난’ 여자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슬픈 것은, 일생 동안 자신을 방치한 채 살아온 강재와 혈혈단신으로 남의 나라에 들어와 서류 속 남편을 사랑하는 파이란의 인생이 서글퍼서다. 그 비루함과 고독이 안타깝고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관객은 북받친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일찍 만났다면’ 바라는 덧없는 소망은 남은 강재마저 가차없이 저승길로 보내는 감독의 강퍅함에 다시 한번 스러진다. 인생이 그렇게 잔인한 것이라고, 쓸쓸하고 서러운 기분이 된다. 그렇더라도 한바탕 굵게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기막히게 우울하고 피곤한 날, 이런 종류의 멜로가 코미디영화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의 피곤함에는 빗댈 여지도 없을 만큼 고달픈 그들의 인생. 그에 대한 뜨거운 눈물은 살아갈 힘을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