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삼매
제1차는 불사법회
제2차 1029일 천도법회
제21회 49재 중 세 번째 불기2550년 2006년 7월 31일
팔만대장경 동판간행사업 천도법회 49재를 21번 함
우리 이런 인연으로 살면 안 될까요?
움켜 진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의심하는 인연보다
믿어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눈치 주는 인연보다
감싸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슬픔 주는 인연보다
기쁨 주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시기하는 인연보다
박수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무시하는 인연보다
존중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변덕스런 인연보다
한결같은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속이는 인연보다
솔직한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부끄러운 인연보다
떳떳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해가 되는 인연보다
복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짐이 되는 인연보다
힘이 되는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인연법
인연 따라 사는 중생
인연(因緣)은 인·연·업·과(因緣業果)의 줄인 말입니다. 인은 ‘나’요. 연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며, 업은 인인 내가 연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과 입과 몸으로 짓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며, 과는 지은 업에 따른 과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인 인연. 이 인연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쓰신 불교용어이며, 불교에서는 우리들 삶의 전 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인연'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받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태어난 것도 인연이요. 현재와 같은 부모를 만나고 부부가 되고 자식을 두는 것도 인연이며, 괴로움을 받는 것도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모두가 인연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의 인연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숙명론이나 운명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곧 사주팔자대로 살거나, 전생의 업보대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삶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 자가 몇이나 되겠으며, 남을 위해 노력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성선설(性善說)`성악설(性惡說) 등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부터 착하다'. 본래부터 나쁘다' 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불교에서는 인연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본래부터 선하게 또는 악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좋은 인과 좋은 연이 화합하면 삶이 착하게 발현되고, 그릇된 인과 어긋난 연이 만나면 삶이 그릇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숙명론도 운명론도 성선설도 성악설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오로지 인연설을 내세워, 모든 것이 나하기에 달렸음을 일깨우고 있으며, '나'의 마음가짐과 행위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삶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괴롭고 힘들게 사는 것 모두는, 과거에 심어 놓았던 씨(인因)가 바로 이 시간 전까지의 여러 가지 주변 환경(연緣)과 노력(업業)에 의해 맺어진 결실(과果)일 뿐, 절대자나 운명에 의해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단순히 금생의 마음가짐이나 행위만으로 이생의 과보가 있게 된 것이 아니라고 설합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고 능히 기억할 수 있는 금생보다는, 감지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전생의 인연과 업이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금생에 특별히 불교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는데도 훌륭히 법사 노릇을 하는 사람은 과거생에 불교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이요. 전생에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은 현생에서 어려움 없이 도를 닦아 이룬다고 합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평생을 편안하고 풍족하게 사는 사람은 과거 생에 복을 많이 지었기 때문이요. 현생에서 특별히 예능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초인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종종 있는 것은 전생에 익힌 예술적인 재능 덕분입니다.
또 과거 생에 장원급제를 하겠다고 원을 세운 사람은 사법고시나 대학시험 등에서 수석합격을 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고, '꼭 한번 부자가 되어 보리라'고 원을 세운 사람은 일생에 한번은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산중의 절에 잠깐 머물면서 ‘참 좋다’는 감정을 일으키고는, ‘나도 다음 생에는 승려가 되리라’고 원을 세우게 되면 내세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因인)을 세우기만 하고 충분히 복(緣業연업)을 쌓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평생 스님으로 지내기가 용이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부자로 그치거나, 잠깐 수석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자리에서 물러난 후 비난을 받으며 명예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죽도록 사랑하던 연인이나 부부가 나중에는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서로에게 남기고 갈라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가? 모두가 인·연·업·과, 곧 인연의 법칙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좋은 일이거나 궂은일이거나 내가 짓고 내가 받을 뿐입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남을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비관하고 회의에 빠져들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나’ 또는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기쁘고 슬픈 일들 모두가 나로 말미암아(因인) 생겨난 일이요. 내가 관련되어(緣연) 이루는 일들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인연법으로 비추어 보면서, ‘나’를 가꾸고 다스려야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연의 법칙은 틀림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인연법을 달리 ‘의타기(衣他起)’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을 무시하고 ‘나의 것’ 만을 추구 해 보십시오. 남을 무시하고 나만 홀로 우뚝 서려고 해 보십시오. 나만 행복하면 남은 불행해져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아보십시오.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도, 높이 올라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남이 나를 받쳐주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밑바닥에서 살 수밖에 없고, 고독과 불행만을 되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법칙입니다. 인연 속에서 나쁜 업을 지으면 꼭 나쁜 과보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연·업·과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선인(善因)을 심었으면 선과(善果)가 돌아오고 악인을 심으면 악과가 돌아옵니다. 내가 남을 해하였는데 어떻게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연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을!
내가 나의 이익과 나의 사랑에 빠져 남을 무시하고 해치고 손해를 입히면 악연을 만들게 되고, 내가 '나와 남을 함께 살리는 생각을 하고 서로를 살리는 행동을 이루어 내면'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나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인연도 다른 모습을 띄게 됩니다. 선연이냐? 악연이냐? 이것은 오직 '나' 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주위를 두러보십시오. 눈길을 옮기고 귀를 기울이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게 됩니다. 선연도 만나고 악연도 만납니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인연들 중에는 절대적인 선연도 절대적인 악연도 없습니다. 절대적인 불행도 절대적인 행복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과 연이 잠시 합하여 모습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작 오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를 잘 가꾸면 전생의 업으로 인한 과보를 가벼이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이 더욱 좋아지게 됩니다.
곧 전생 업의 폭우가 몰아칠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업을 푸는 쪽으로 마음을 잘 다스리고 바르게 실천하면, 폭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비바람을 잘 견딘 초목이 푸르름을 더하듯이···.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인연과 업보를 바로 보아라. 모든 것은 인과 연의 화합으로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자연히 소멸 된다. 인 하나만으로 존립하는 것도, 연 하나만으로 생겨나는 것도 없으며, 전생의 업보만으로 현생을 사는 것도 아니다. 인연의 법칙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언제나 근본인(根本因)이 되는 ‘나의 마음가짐’이다”.
이제 우리는 전생의 업보를 참회하면서 바른 마음가짐으로 현세의 업을 잘 닦아가는 조화로운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업보는 인과 연이 모여서 생겨나는 것! 지금 이 자리에서의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과거의 업을 어떤 식으로 싹 틔울 것인가를 결정짓는 연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미래의 씨가 됩니다.
실로 '지금 이 자리'는 과거의 맺힌 업을 푸는 과의 자리이면서 새로운 업을 짓는 인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맺힌 업을 풀고 업을 더욱 원만하게 가꿀 수도 있으며, 새로운 악업을 맺어 더 나쁜 상태로 자신을 몰고 갈 수도 있습니다.
맺느냐? 푸느냐? 잘사느냐? 못사느냐? 이는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것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연법의 진정한 까닭입니다.
인생을 바꾸고자 한다면 부디 인연법부터 믿으십시오. 나의 마음가짐과 나의 실천이 나의 '지금 이 자리'를 바꾸고 주변을 바꿉니다. 인연의 도리를 알고 인연법을 믿으면 능히 지난날의 업을 가벼이 만들고 향상의 길로 나아가게끔 합니다.
그럼 인연의 법칙 속에서 행복과 불행의 삶을 맺고 푸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나'의 마음씨와 나의 마음가짐(因인), 나의 실천(業업)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부터 차근차근 합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디 큰마음으로 인연법을 믿고 인연을 잘 살펴 평화롭고 복된 삶을 성취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법공양 2011.11호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