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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동산 JESUS - KOREA 원문보기 글쓴이: 임마.누엘
1907년의 대부흥 백주년을 맞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높다. 부흥에 대한 여러 모임이 진행되고 있고, 여러 학술 단체가 부흥과 관련한 주제를 논구하기도 한다. 이런 여러 논의들을 보면서 이 글에서는 부흥의 기원, 성격, 특징 등에 고려하면서 부흥은 어떤 상태에서 일어나는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연구는 평양대부흥 또 다른 부흥을 기대하는 한국교회에 여러 시사점을 주리라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부흥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한 후 1903-7년에 이르는 한국교회 부흥의 시원에 대해 검토한 후 이런 역사적 경험을 외국에서의 부흥과 관련지으면서 부흥은 어떤 상태에서 발생했는가를 검토하고 부흥 논의의 이론화가 가능한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부흥논의의 이론화란 부흥을 불가피하게 하는 어떤 원칙이나 법칙이 있는지, 혹은 부흥론이 하나의 보편타당한 이론으로 체계화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하나의 시론(試論)에 불과하고, 이런 기회를 통해 부흥논의가 진지하게 전개되어 일회성 행사 위주의 한국교회 부흥 100주년 기념에 작은 저항이 되기를 기대한다.
1. 부흥이란 무엇인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으로써 근본적으로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 곧 살아나고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겔37:5, 6, 14, 욥33:4, 왕상17:22, 눅15:24, 32). 일반적으로 부흥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간섭” 혹은 “죄인들과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혹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오시는 행위”로 정의되어 왔다.1)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일” 그리고 “주의 임재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영적 변화” 등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아더 윌리스(Arthur Willis)는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장엄하신 능력으로 자신을 죄인들에게 계시하시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 1912-87)는 부흥이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또 그와 관련된 신앙공동체에서 신약 기독교에서 보는 성령의 역사”로 설명하기도 했다.2) 이런 점들을 포괄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정의는 보다 종합적이다. 그는 부흥이란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3)
이 점을 속죄의 역사에 적용하여 로버트 콜만(Robert Coleman)은 부흥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찾으시고 소생시키시고 기운을 북돋으시고 그들을 풍성하신 축복 속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부흥의 현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침체되고 퇴락한 상태에서 영적 변화와 활력이 나타났다면 그것을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부흥은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와 그 공동체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관계된 것이며,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새로운 활력 혹은 영적 각성이라는 점에서 외적 변화를 동반한다. 그래서 부흥은 2가지 특징을 지니는데, 첫째는 교회 지체들의 영적 심화를 경험하게 되고, 둘째는 그 결과로서 교회 밖에 있던 이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부흥은 전도나 수적 성장과는 구별된다.
한국교회 일각에서 ‘부흥’을 단순히 수적인 성장이나 외적인 확장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것은 부흥의 외적 결과일 뿐이다. 부흥은 한국교회가 경험했던 바처럼 단순히 수적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영적인 변화와 각성이었다. ‘성장’(growth)이 점진적이며 진화론적이라면 부흥(revival)은 돌연함이 있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다. 성장은 인간의 계획과 프로그램에 의해 어느 정도 성취될 수 있지만,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혹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부흥은 일차적으로 한 개인의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 변화와 각성이며, 수적인 성장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아더 윌리스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을 소생시키는 것은 뿌리요, 죄인을 구속하는 것은 열매이다.” 부흥의 돌연함과 비 규칙성은 인간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교회부흥’ 혹은 ‘신앙부흥’이란 말은 여자적으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2. 한국에서의 부흥
한국교회는 최초의 거주선교사가 입국한지 10년이 지난 1894년 이후 최초의 수적 성장을 경험했다. 이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03년부터 1907년 6월까지 일련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 부흥의 결과로 1909년에는 100만인 구령운동이 전개되었다. 1903년 시원하여 1904년과 1906년에 간헐적인 부흥을 거쳐 1097년 대부흥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1. 1903년
1903년 원산에서의 부흥이 1907년의 평양대부흥의 시원이 된다. 중국에서 사역하던 중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4)으로 휴양 차 원산에 오게 된 남감리회의 화이트( Mary Cutler White)와 캐나다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한국인 가운데 부흥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오던 중 8월 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는 화이트와 매컬리, 그리고 케롤(A. Carrol), 노을즈(Knowles), 하운셀(J. Hounshell) 등이 참석하였고,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3차례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요한복음 14장, 15장, 그리고 16장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기도의 3가지 본질, 곧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함,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뢰, 그리고 성령의 체험에 대해 강연하면서 자신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었던 점과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디는 선교사 모임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다.5) 이 때 함께 참석했던 이들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이 기도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기원이 된다.6)
하디의 회개는 자신에게도 변화를 가져왔고,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청중들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기도회가 끝난 후 첫 주일 하디는 창천감리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하디가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었음과 특히 성령충만 하지 못함을 회개했다. 하디의 고백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회개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캐나다 출신 롭(A. F. Robb, 鄴亞力)선교사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하디는 이때로부터 사경회의 강사가 되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회개와 영적 각성, 그리고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스웨덴에서 온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창립자인 프란손목사(Rev F. Franson, 1852-1908)가 원산을 방문하고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 다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7)
2.2. 1904년
1904년 봄에도 원산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초교파적인 사경회가 열렸다.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목사도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원산에 이어 개성 송도도 부흥의 중심지가 되었다. 감리교 선교구역이었던 이곳에서 1904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도 참석자들은 각자의 죄를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곳에서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개성 집회에서는 전도운동으로 발전하여 감방, 삽다리, 술은리 등에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하디가 떠난 후 이 지역 선교사인 크램(W. G. Cram)에 의해 집회가 계속되면서 계속적인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해 3월에는 서울에서도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1904년 6월부터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디는 안식년으로 한국을 떠나기 전인 1904년 10월에 서울, 제물포,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이곳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렇게 한국에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년 9월 한국에서 활동하던 4개 장로교선교부와 2개의 감리교 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는 매년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을 만들고 한국의 오순절을 위해 기도했다. 특히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진력하기로 하고, 1906년 신년에 전국적인 부흥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새로운 신자의 영입보다 기 신자들의 영적 각성이 우선적이고, 그것이 긴요하다고 믿었다.
2.3. 1906년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 송도(松都)에서는 큰 부흥을 경험했는데, 선교사 크램(W. G. Cram)은 이때에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평양주제 선교사들은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 집회에서 하디는 요한 1서를 본문으로 설교하였고, 하디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였으며, 서구인으로서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인을 폄하하였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진솔하게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고 평양장대현교회의 이길함(Graham Lee)을 비롯하여 참석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
평양 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는 선교사들의 연례대회가 9월 2일부터 9일까지 개최되었다. 이 때 미국에서 존스톤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내한하여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하여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다른 곳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식은 한국인들에게도 부흥을 열망하게 되었고, 부흥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서울 사경회 후 존스톤은 평양으로 가 장대현교회에서 다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이곳에서도 존스톤은 그가 목도했던 인도와 웨일즈에서의 부흥에 대해 보고했다.8)
서울과 평양에서만이 아니라 그해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프레스톤(J. F. Preston)이 관할하고 있는 이곳에서 남감리회 선교사인 저다인(J. L. Jerdine)이 집회를 인도했을 때 이곳에서도 성령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저다인은 하디와 함께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원산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로서 하디와 상벽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906년 1월 함흥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한 바 있는데, 그는 조용하게 설교하였으며 성경을 많이 인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집회를 통해 목포지역에서 회개와 자복이 일어났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평양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영적 뜨거움이 없음을 보고 새벽마다 기도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 두 달 동안 새벽 4시경에 교회로 가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알려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게 됨으로 1907년부터는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어 갔다. 1907년의 대 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2.4. 1907년 대부흥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평양을 중심한 서울 등 이북지역과 목포 등 전라도 지역, 그리고 전국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07년 1월에는 평양에서 대 부흥으로 발전하였다. 수많은 셋 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1907년의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 동안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22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9)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 때의 집회에는 약 1,500여명이 회집한 가운데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illiam L. Swallen),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한위렴(William Hunt), 방위량(William N. Blair) 등이 강사였다. 김찬성(金燦星)과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였고, 이 때의 부흥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낮에는 주로 성경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대중 집회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이길함, 방위량 등의 설교와 함께 매일 밤 길선주의 설교가 있었다. 길선주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등의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 특히 1월 14일 낮에는 정오기도회가 열렸고, 한위렴 선교사의 설교 후 이길함선교사가 통성기도를 요청했다. 여기서 회중가운데서 뜨거운 기도가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가 평양 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14일 저녁에 일어났다. 이날 길선주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을 때 큰 부흥이 일어났고, 이것이 1907년의 대 부흥의 시작이었다. 이 때 집회에 참석했던 이들도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이날의 회개운동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다.10) 이 당시의 집단적 회개에 대해 김양선을 이렇게 기록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드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어린 애기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워서 빨리 갈 수 없어 아기를 나무에 부딪쳐 죽게 하고 혼자서 달아났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다.11)
이날 이길함 선교사의 짧은 설교 후 두 세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했는데, 그 기도는 계속적인 통회로 이어졌고, ...... 회중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길함은 1월 15일자로 기록한 글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보고했고,12) 1월 15일자로 조지 맥쿤이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에게 보낸 편지도 동일한 보고였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13)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겨울의 세찬 바람도 아랑곳없이 기도의 물결은 “마치 폭포와 대양의 물결 소리같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었다. 온 교인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서 기도하기를 새벽 2시까지 계속하였다.”14) 이 때의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한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 제친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불결과 음색, 도적, 거짓, 질투, ..... 부그러움도 없이! 사람의 힘이 무엇이든 이런 고백을 강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 교인들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지고 그리고 마루에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15)
방위량의 보고에 의하면 이 당시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기도 했다. “대 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그것은 비단 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이 보여주는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나타난 부흥의 역사는 순식간에 평양 전역으로 알려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에로 확산되었다. 또 평양시내의 선교학교에로 번져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김찬성(金燦星)의 인도로 숭덕학교에서는 약 300여명의 학생이 통회 자복하였고, 숭실전문학교 학생들도 부흥을 체험하였다.16) 평양신학교 개학 사경회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다. 부흥의 불길에는 교파의 벽이 없었다. 감리교학교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1월 22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는 평양사경회는 끝났으나 평양 집회는 길선주의 인도로 1개월 더 계속되었고,『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는 “수천 명 교인이 다 중생의 성신 세례를 받았다”고 보고하고 있지만17) 이것은 수학적인 수라기 보다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이제 길선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부흥의 인물로 인식되었다.
종합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 때의 부흥은 교파적으로 보면 감리교적 배경에서 일어나 점차 장로교회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하리영, 이길함, 방위량 등 선교사 중심으로 전개된 부흥의 역사가 한국인 중심으로 이동하고, 원산, 평양에서 시원 된 부흥의 역사가 타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8) 흥미로운 사실은 화이트, 메컬리, 하디 등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부흥의 발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이 불길은 이길함에 의해 선천으로, 소안론에 의해 광주로, 한위렴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고,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길선주가 서울의 승동, 연동, 상동교회, 그리고 수구문(水口門)교회에 와서 성령의 도를 가르쳤을 때 이곳에서도 부흥이 일어났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1907년 1월에 시작된 부흥의 역사는 약 6개월간 계속된 것으로 보지만, 장로교의 경우 청주집회(1907년 3월), 감리교의 경우 공주집회(1907년 4월)를 고비로 현저히 약화되었다.19) 부흥의 불길은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당시 부흥은 전국적인 사건으로 발전해 갔다고 말하지만 전 지역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부산 경남 지역에서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20)
이 때의 부흥은, 여러 논자들에 의해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신앙의 내적인 성숙, 선교사들과 한국인 간의 상호 이해와 일체감 형성, 전도 및 선교운동, 교파 간의 연합, 사회변화에의 영향, 그리고 한국기독교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2.5. 한국에서의 부흥의 기원
그렇다면 1903에서 1907년에 이르는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부흥의 시원에 영향을 준 요인은 무엇일가? 어떤 조건이 부흥 역사에 영향을 주었을까? 일반적으로 1903-7년에 이르는 한국교회 부흥은 다음의 4가지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말해 왔다.21)
첫째, 부흥은 사경회(査經會)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22) 이것은 미국에서의 경우를 포함한 부흥의 역사에서 가장 현저한 특징이었다.23) 말씀이 읽혀지고 가르쳐지고 해석될 때에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고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부흥의 출발점이었다. 박용규는,
.... 사경회는 한국교회에 부흥 운동의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사경회는 체계적인 성경공부, 기도, 전도, 그리고 사경회 기간동안 열리는 전도집회를 통해 기성신자들에게는 영적인 재충전의 기회를,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기도와 말씀연구, 전도에 대한 관심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사경회는 부흥을 촉발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24)
말씀의 신실한 전파 없이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성경에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요시아왕 때의 ‘그 율법책’의 발견은 부흥의 기초였다(왕하 23:1-3, 24-25). 신약에서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제자들이 부흥을 경험했다(눅24:13-32). 부흥은 말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성령은 말씀을 통해(per Verbum),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일하신다’는 신학원리에도 부합된다.
부흥은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부흥의 원리와 선포는 성경중심이었다.25) 부흥운동사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곳에는 부흥의 역사가 없었다.26) 18세기 영적 부흥운동을 이끌어 간 인물들은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둘째, 부흥을 위한 ‘간구’가 부흥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대하7:14). 부흥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한국교회 부흥의 동기였다. 선교사들은 부흥은 “그 발단에 있어서 기도의 능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며, 그 전개과정 동안 나타난 성령 역사의 비상한 현시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27)고 했다. 평양에서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직 후 한국을 방문했던 요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는 평양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지속적인 기도와 기도의 영이 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28) 부흥사가인 에드윈 오르는 “연합된 기도(united prayer) 없이는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영적 부흥이 일어난 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1903년 원산에서 한국에도 부흥이 일어나기를 간구했던 두 여선교사인 와이트와 매컬리의 기도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은 1907년의 대 부흥의 시원이 된다. 1907년 1월 14일의 정오기도회는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가능케 했다.
셋째, 부흥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죄의 고백이었다. 즉 통회와 자복은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통로였다는 점이다(행2:37ff, 삼상7). 이 점은 18-19세기 부흥운동사에서 가장 현저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으로서의 회개는 칼빈에 의하면 ‘재생’(reparatio), ‘회복’(instanratio). ‘갱신’(removatio), ‘복귀’(restitutio). ‘개혁’(reformatio), 그리고 ‘중생’(regeneratio) 등의 의미를 함의하는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는 성화의 과정이었다.29) 이 회개라는 성화의 과정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요나단 고포드는 진정으로 회개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한다.30)
우리나라의 경우 1903년 8월 하디가 요한복음 14:12-14, 15:7, 16:23을 본문으로 행한 3차례의 연속 강연에서 자신의 죄와 교만을 회개했을 때 선교사들 사이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고, 그것이 한국인들에게로 전파되었다. 이것이 1903년 부흥의 시원이었다. 1907년 대 부흥에서도 길선주의 공개적인 회개는 부흥의 역사를 불러왔다. 1월 16일 수요일 장대현교회 수요예배에서도 죄의 고백은 부흥을 가져왔다. 1859년의 웨일즈의 부흥도 한 여인의 회개에서 비롯되었고, 웨일즈 부흥 1백주년이 되는 1959년 웨일즈를 방문했던 캄펠 몰간(Campbell Morgan)의 증거 속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31) 1904-5년에 웨일즈에 부흥의 역사가 동일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틴 로이드 존스, 캄펠 몰간(Campbell Morgan), 마이어(F. B. Meyer)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다.
넷째, 부흥에 대한 소식들이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다. 부흥운동의 역사에서 다른 지역의 부흥에 관한 소식과 전언이 상호 영향을 주고 새로운 부흥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토마스(George Thomas)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그는 19세기 부흥의 역사에는 놀라울 정도의 통신과 상호 교류(networking)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32) Edwin Orr는 1970년 저술한『인도에서의 복음주의 각성운동』(Evangelical Awakenings in India)에서 인도의 부흥운동은 웨일즈의 부흥운동과 모종의 깊은 관계 하에서 진행되었다고 하여 이 점을 뒷받침 했다. 이점은 한국에서도 동일했다. 1903년 원산에서의 부흥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프란손(Rev. F. Franson)의 외국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개가 한국교회에 도전을 주었고, 1906년 8월의 경우 미국의 존스톤목사(Rev Hoard A. Johnston)가 인도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을 소개한 것이 한국인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33) 이 때 존스톤은 한국에서 일어날 부흥을 예견했다고 한다. 그해 10월 목포에서 있었던 부흥에 대한 소식은 평양과 다른 지방에도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1907년 평양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소식은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다른 이들을 통해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이런 소식이 청주, 광주, 선천, 재령, 의주, 대구 등지로 확산되고 그 지역에서의 부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특히 1907년 2월 17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연합 사경회 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의 역사가 소개되었고, 결과적으로는 평양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그 대로 재현되었다. 그 결과로 부흥의 물결은 곧 송도, 강화, 재물포 등지로 확산되었다.
요나단 에드워드도 이와 같은 부흥 역사의 상호 의존성과 넷워킹을 인정했다. 즉 “외부에서 방문한 이들이 거룩한 축복의 내림을 경험하고 난 후” 기쁨으로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서 그 소식을 전하게 되자 그곳에서도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다.34) 또 그는 “경험에 의하면 어떤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현저하게 역사하였다는 소식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사로잡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지적했다.35)
1908년 중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부흥에 대한 목격자들에 의한 전언과 보고가 가져온 결실이었다. 평양에서의 부흥에 대한 조나단 고포드(J. Goforth)의 보고는 만주, 특히 산시성(山西), 푸켄성(福建省)에서의 부흥에 영향을 주었다.
이상의 점들을 종합하다면 사경회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 영적인 갈망(기도), 진솔한 자기 성찰과 회개, 그리고 부흥에 대한 소식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부흥의 요인이자 부흥 역사의 배경이 된다.
그렇다면 이와 동일한 환경이 이루어진다면 동일한 부흥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부흥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 외의 또 다른 그 무엇이 요구되는가? 위에서 제시한 4가지 상황은 부흥의 기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상과 같은 점들은 왜 부흥이 1903년에서 1907년 어간에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부흥이 원산에서 시발하였는지, 그리고 왜 1907년 4월경 평양 대 부흥의 역사가 현저하게 약화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결국 부흥의 기원이나 전개, 발전이나 쇠퇴를 법칙화 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흥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인과적인 원리를 정법화(定法化)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을 한국교회 부흥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차 항에서 몇 가지 점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3. 부흥에 대한 몇 가지 검토: 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3.1 민족 현실이 부흥의 배경이었는가?
그간의 한국교회 부흥의 배경에 관한 논의에서 정치환경적 요인이 강조되어 왔다. 1907년 부흥은 일제하의 민족의 현실, 정치적 좌절과 불안, 주권상실에서 오는 반일감정의 표출 등을 강조하고 그것이 1907년 부흥의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8세기 이후의 부흥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교회 부흥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점은 한국에서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1900년대는 점증하는 일본의 세력과 조선침략의 야욕이 구체화되어 갔고 민족적 절망감이 심화된 시기였다. 청일전쟁(189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한일합병(1910)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변기는 조선인들의 가슴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말이었다고 말하면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 때야 말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라고 복음의 수용성이 심화된 정황을 묘사한 바 있다.1) 윌리엄 베어드는 이런 현실에서 조선인들은 “수치감, 분노, 그리고 증오에 내몰려 그들은 무언가 영웅적인 일을 해 내고야 만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라고 해석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신자의 책임의식이 고조되었고,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암울한 현실로부터 탈출 욕구가 심화되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문제에 책임을 느끼고 이것이 마치 믿는 자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책임의식이 표출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00년대 초의 정치 사회적 환경이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고 해석한다.
일견 유의한 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외국의 부흥의 기원과 비교해 볼 때 이런 정치적 상황 혹은 민족적 현실이 부흥의 배경이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희박하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갈망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광의적 의미에서 부흥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개인적이고 집단적 회개인데, 민족의 현실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집단적 회개를 유발할 수 있는 내적 연대감(in -group solidarity)의 근거가 될 여지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힘의 논리에 의한 일제에 강점 시도라는 민족현실은 민족적 적대감정을 고취할 수 있고, 그것이 다음 시기에 선명하게 나타나듯이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라는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였고, 또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상황이 회개 혹은 회개운동이라고까지 말하는 종교적 각성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1903년 이후 한국교회 부흥에서 표출된 회개나 통회에서 조국의 현실이나 민족의 문제가 거론된 일이 없다는 점이다. 이 당시 부흥과 관련된 문서에 보고된 회개는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축첩, 노름, 상해, 거짓말, 서로원수 지내고 산일, 아내를 구타하거나 폄하한 일, 위선, 교만, 탐욕, 성수주일 미 이행 등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도덕, 윤리적인 항목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목록 속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오는 문제의식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회개란 근본적으로 종교적 각성이고, 그 성격상 하나님과 이웃과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상황이 종교적 각성을 재촉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18-19세기 영국이나 미국에서 발현한 부흥에서 국가가 처한 정치적 현실이 부흥의 동기가 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도리어 그 시대의 종교적 상황이 부흥의 주효한 동기였음이 주장되어 왔다.3) 일반적으로 부흥의 외적 요인으로는 종교적 상태, 곧 영적, 도덕적 퇴보가 있을 때 일어났다는 점이 강하게 주장되어 왔다.4)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서도 동일한 암시를 주고 있지만5) 18세기 잉글랜드나 웨일즈, 그리고 미국에서의 부흥의 배경이었다. 헨리 존슨(Henry Johnson)은 1730년대 잉글랜드에서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배경을 말하면서 당대의 종교적 도덕적 퇴보를 강조한바 있다.6)
스코틀랜드의 경우도 동일했다. 에벤에설 얼스킨(Ebenezel Erskine)에 의하면 18세기 초부터 40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생명이 없고 미지근하고 또한 무관심한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상황에서 부흥이 일어났음을 지적했다.7) “목사들은 정확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설교했으나 성령의 능력은 없었다. ..... 외적인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참된 신앙은 거의 없었으며 ....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자랑했고 에딘버러에서는 지옥불클럼, 유황불 협회, 매춘부집단이라는 조직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8) 웨일즈의 경우에도 도덕적 상황이 부흥의 배경으로 강조되고 있다. “18세기 초반에 있었던 웨일즈의 도덕적 종교적 상황은 아마도 잉글랜드 보다 더 나빴을 것이다. 술 취함과 모든 종류의 방탕이 평신도와 성직자들 가운데 만연되어 있었으며 반면에 더 가난한 무리들은 질이 낮은 무지와 악행가운데서 살아갔다.....”9)
부흥운동사에 관한 논자들에게 산업혁명 전후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국에서 동일했다.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반 신앙클럽의 범람 등 불신적 세속주의가 팽배하였다. 에드윈 오르에 의하면 미국에서 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예일대학에는 크리스천 학생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윌리암스대학(Williams College)에서는 성찬식을 조롱하는 축제를 거행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성경을 불태우는 일까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제2차 각성운동 이전의 상황도 이와 같았다.10) 라토렛은 1750년과 1815년 사이를 ‘거절과 부흥의 시대’라고 부르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대가 계몽사상에 의해 일어났다고 분석하고 합리주의 및 이와 관련된 이신론이 젊은 계층사이에 열렬한 동조자를 얻게 되었다고 지적했다.11) 합리주의 사상이 만연하던 시기의 영적, 도덕적 타락, 안일주의 등 신앙적 퇴보상태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부흥의 도덕적, 영적 배경을 중시하는 찰스 피니(Charles Finny)는 부흥이란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전재로 하여 교회를 그 타락으로 돌이키게 하고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 가운데 있다.”고 하여12) 종교적 상황이 부흥의 배경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정치적 상황을 포함한 역사·환경적 요인이 종교적 영역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간 한국교회는 1900년대의 정치적 환경이 종교적 갈망에 어떤 영향을 주었던 가에 대해 간과하거나 소홀하게 취급해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흥의 역사에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강조하여 왔으나 도덕적, 영적 상태, 곧 1900년대 당시 우리 사회의 우상숭배, 축첩, 간음, 살인, 사기, 도박 등이 만연하였고, 도덕적 퇴보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간과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정치적 혹은 민족적 상황이 1907년 전후 한국교회 부흥을 가져온 주도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3.2. ‘부흥 역사’인가 ‘부흥 운동’인가?
한국에서 1907년 전후의 부흥을 흔히 ‘부흥운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등과 같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의도된 조직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903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는가 아니면 인간의 조직적인 활동에 의해 발의, 의도, 유지된 ‘운동’이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서 인간에 의해 의도되고 준비되는 운동성은 무의미한 것인가? 이 점에 대한 논의는 부흥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해묵은 논쟁이기는 하지만 이 ‘부흥’(revival)과 ‘부흥주의’(revivalism)의 문제는 제1차 각성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와 제2차 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인 찰스 피니로 대표되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1734년부터 1736년까지 예상치 못한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으나 1737년 부흥의 갑작스런 중단을 경험하고, 부흥의 인간 의지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기록한 1737년의『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충실한 서술』(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red Souls in Northampton)에서 노스햄톤에서 일어난 부흥은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요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하였다. 요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의 돌연함과 비 규칙성은 인간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보아 부흥은 인간 의지에 의해 기원하거나 쇠해지지 않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해했다. 그는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이지 ‘운동’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부흥주의를 반대했다.
부흥이 인간 의지와 무관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웨일즈에서의 부흥이었다. 웨일즈에서는 1800년부터 1859년 사이에 실제로 매 10년마다 신앙부흥을 체험했다. 1859년에는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1859년의 부흥은 에이피온 에반스(Eifion Evans)의 지적처럼 “새로운 것도 아니고 기이한 현상도 아니었다.”13) 많은 이들은 매 10년마다 부흥이 있었음을 고려하여 1869년에도 상당한 부흥이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부흥은 오지 않았다. 이런 부흥역사의 발생이나 장소, 지속기간 등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다는 점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인간은 부흥을 가져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였지 인간의 의지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었다.
반면에 찰스 피니(Charles Finny, 1792-1875)는 “부흥은 이적이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는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 부흥이 인간에 의해 기계적으로 준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선거유세에서 전략은 군중회집과 관계가 있듯이, 인간의 노력과 부흥은 유관하다고 이해했다. 그는 “부흥을 위한 방법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과 부흥의 관계는 곡식을 얻기 위한 올바른 방법과 농장물의 수확과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했다.14) 그는 신앙부흥은 인간의 의지나 운동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더 많은 결실을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새로운 방법들(new measures)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15)
요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의 차이점을 조지 토마스는 1차 각성운동과 제2차 각성운동의 근원적 차이로 설명한다. 즉 일차 각성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의해 흘러온 것이지만 19세기의 ‘새로운’ 부흥주의는 교회와 전도자들의 의도된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16)
이들의 차이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의 차이라고 할 수 있고, 부흥과 전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는 전도의 방법, 도구, 전도자 개인의 차이 등이 있으므로 인적 요소가 강하나, 신앙부흥에는 인간적 요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인 영적 각성과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 전략과 방법론이 다소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의 지속기간, 발생장소, 가속력 그리고 영향력 등을 고려해 본다면 부흥의 주체 혹은 주도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부흥을 예측하거나 부흥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법칙화 할 수 없을 것이다.
3.3 한국교회 부흥은 ‘비정치화’의 실현인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비정치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1907년 전후의 부흥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주장되어 왔고,17) 이런 주장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왔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하는데, 첫째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독립이나 민족의 현실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신앙내적인 것으로 전환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부흥이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현실의 문제에 대해 냉담하게 만드는 ‘비정치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역사 현실에 대해 냉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8) 이 점에 대해 많은 젊은 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19)
학문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원로학자들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조심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성(事實性)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사실성(史實性)을 필요로 한다. 즉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민족현실에 대한 관심을 신앙 내적인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 부흥을 의도했고 그런 결과로 부흥이 일어났는가를 검토해야 하고, 한국교회가 민족 현실이나 역사현실에 대해 실제로 냉담했는가를 증명해야 하고, 그 원인이 부흥의 결과였는가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논리적 지원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제한된 글에서 이 점에 대해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점들에 대해서 재론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위의 ‘비정치화론’은 일종의 가설로서 이 가설은 두 가지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기보다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 둘째, 민족현실에 대한 관심과 신앙내적인 심화는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하다.
우선 한국교회의 부흥과 유관된 선교사들에게 ‘비정치화’를 모색하는 의도성이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또 그런 인위적 의도가 집단적 회개운동이라는 전대미문의 성령의 역사를 가져올 수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의 연원으로 인정되는 첫 인물 하디는 한국에서의 부흥의 연원이 되는 1903년의 원산 부흥을 회고하면서 그것은 어떤 의도에서 발의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이라는 점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20) 무엇보다도 부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다른 선교사들은 예상치 못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간섭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21) 이 점은 부흥이 어떤 목적을 가진 의도성의 결과라는 계연성을 부인한다. 또 이들의 문서 속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민족현실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거나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도 않고 있다. 선교사들의 멧세지 속에서도 그런 점을 보여주는 단서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회개의 목록 속에서도 민족에의 관여나 무관심, 그 양자에 대한 회오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다른 한 가지는, 1900년 대 이후의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한국교회가 민족 현실에 대해 냉담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설사 냉담했다하더라도 그것이 1907년 전후의 부흥이 가져온 결과라는 점은 입증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부흥이 한국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는 해석은 독립에 대한 관심과 영적 심화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가능한데, 그런 전제 자체가 1900년대의 길선주의 경우에서 적용될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 부흥을 선교사들에 의한 ‘비정치화’로 해석하는 첫 단초로 제시되는 문헌이 1901년 장로교선교공의회의 문서인데,22) ‘정교분리’라는 일반적 원칙을 제시하는 이 문서가 소위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교회 비정치화를 위해 의도된 문서로 원용하는 것이 타당한 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정교 분리 원칙은 18-19세기 아아제국에서 시행된 선교 단체들의 공통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3.4. 방언은 성령역사의 현저한 특징인가?
한국교회 부흥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03-7년에 이르는 부흥에서 방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방언이 없었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방언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 역사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방안이라고 말하지만 한국교회 부흥에서 방언이 보고된 바 없다. 이언 머레이(Ian Murrey)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의 역사가 항상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불변의 보습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역사하신다. 방언은 불가피한 요소가 아니다. 이 당시 부흥은 감정에 도취된 편향된 감정주의나 자기발산적인 광신적인 요소가 없었다.
맺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무엇이 부흥을 가져왔는가의 문제와 유관된 몇 가지 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사람이 부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한국과 18-19세기 부흥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부흥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부흥의 배경들, 곧 사경회를 통한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간구, 진정한 통회와 자복, 그리고 외국이 부흥에 대한 정보를 통한 도전과 자극이 1907년 전후의 부흥을 가져왔을까? 우리는 명백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그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도 부흥은 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례는 부흥운동사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부흥에는 인간을 포함하는 요소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이중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점은 추수의 경우를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농부는 땅을 경작하고 파종하고 김을 맨다.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그것으로 추수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추수란 햇빛, 바람, 비와 같은 다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는 추수를 준비할 수 있어도 그 준비가 추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농부가 추수를 위해 경작하고 파종하고 김매는 노력 없이는 추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23)
부흥은 인간의 준비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라는 점에서 농부와 추수와의 관계는 부흥에 대한 적절한 유비가 된다. 사람이 부흥역사가 현시해 주는 부흥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도 부흥을 경험하지 못할 수가 있지만, 반대로 부흥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부흥을 체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부흥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이런 점에서 부흥은, 서두의 부흥에 대한 정의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인간에 의해 의도되거나 기획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흥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어떤 자동적인 원리나 법칙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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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흥에 대한 다양한 정의는, 이상규,『교회개혁과 부흥운동』(SFC, 2004), 277-8을 참고할 것.
2) Edwin Orr, The Eager Feet, vii
3) 마틴 로이드 존스,『청교도 신앙』(생명의말씀사, 2002), 18.
4) 의화단((義和團)사건이란 1900년 중국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반제애국(反帝愛國) 운동으로서 산동(山東)에서 시작하여 하북(河北) 북경(北京) 천진(天津) 산서(山西) 하남(河南) 내몽고(內蒙古) 동북(東北)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 곧 청나라를 도와 서양세력을 물리친다는 구호 아래 반외세를 주창하며 교회를 공격하고 서양 선교사들을 처단하였다. 이 때 189명의 선교사와 그 자녀들이 피살되었고, 수천명의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다. 이 일로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8개국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연합군은 북경과 천진을 함락시키고 의화단은 진압되었다. 자희태후는 광서황제와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북경에서 서안(西安)으로 탈출하였다. 1901년 9월 청 정부는 연합군에 투항하고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했다.
5) Methodist Church, South, Report for 1905, 39-40.
6) George Paik,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Korea Mission Field (이하 KMF) 4:7(July 1908), 105.
7) 하디는 프란손을 통해 어떻게 부흥회를 인도해야 하는 지를 배웠다고 한다. 프란손의 방법은 인간적인 어떤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었고, 성령의 인도하심 순종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하디에게 인상 깊었던 프란손의 집회는 집회 마지막에 “아버지,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할 것입니다. 당신은 해야 합니다.”(Father! Thou canst do it, Thou wilt do it, Thou shalt do it)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8) 이 집회에서 존스톤은 웨일즈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처럼 부흥의 인물로 쓰임받기 원하는 이는 손을 들라 했을 대 길선주장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길선주는 1906년 12월 12일부터 22일까지 재령에서 열린 황해도 도사경회를 인도했는데, 이 때의 집회는 자신의 사경(부흥)회 인도의 중요한 분깃점이 된다. 이 때의 길선주의 말씀을 통해 “장로 이재선(李在善)의 통회를 비롯하야 조사 김익두(金益斗)와 이원민(李元敏) 외 만흔 교인이 크게 영화의 은혜를 밧었는데”(김인서, “靈溪 先生小傳,”『신학지남』1932. 3, 33쪽) 김익두는 길선주에 이어 1920년대 이후 저명한 부흥사로 활동하게 된다.
9) 장대현교회는 사무엘 마펫에 의해 1893년 7명의 교인으로 ‘널다리 교회’로 출발하였다. 1896년에는 300여명의 교인으로 증가되었고, 1900년 6월에는 새예배당을 신축하고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 65). 이 때 세례교인은 386명, 학습교인은 392명, 총 교인은 1,200명에 달했다. 교인수가 크게 증가되자 1903년 가을에는 일부의 교인을 분리하여 남문밖교회로 독립하였고, 1905년 겨울에는 사창동(후일 창동)교회를, 1906년 1월에는 산정현교회를, 1909년에는 서문밖교회를, 1911년에는 외성교회를 각각 설립하였다. 1906년 당시 세례교인은 914명, 학습교인은 334명, 총 교인수는 2,984명에 달했다. 1907년 당시는 세례교인 1,076명, 학습교인 385명, 총 교인수는 약 3천명에 달했다. 백종구, “선교사 마펫의 지도력과 평양 장대현교회의 개척과 성장,”『교회,민족,역사』(솔내 민경배박사고희기념논문집, 2004), 401참고.
10) 이날의 회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요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1907년 한국을 휩쓴 성령의 불길』(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SPAN style="FONT-SIZE: 8.55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
11) 김양선,『한국기독교사 연구』, 87; 이영헌,『한국기독교사』, 111
12)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ongyang,” KMF, Vol. 3. No. 3 (Mar 1907), 33-37. 이 글은 길진경의『영계 길선주』(종로서적, 1980), 362-367에 부록으로 재수록 되었다.
13) George M. McCune, Letter to Dr. Brown dated Jan. 15, 1907.
14) Graham Lee, 33-37.
15) W. Baird, “The Spirit Among Pyung Yang Students,” KMF, Vol. 3, No. 4 (May, 1907), 66.
16) 이영헌, 111.
17)『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 180-181.
18) 이덕주, 113,122.
19) 이덕주, 139.
20)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상규, “1907년 전후 부산, 경남에도 부흥이 있었을까?,”「부경교회사연구」6호(2007. 1), 29-44.
21) 박용규는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은 성경공부(사경회), 기도, 그리고 철저한 회개와 통회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박용규,『평양대부흥』(생명의말씀사, 2000), 16ff. 필자는 이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식이 한국에서의 부흥에 자극과 도전을 주었음을 지적하였다.
22) 박용규는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은 성경공부(사경회), 기도, 그리고 철저한 회개와 통회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박용규,『평양대부흥』(생명의말씀사, 2000), 16ff. 필자는 이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식이 한국에서의 부흥에 자극과 도전을 주었음을 지적하였다.
23)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sm, 1870-1925 (Oxford Univ. Press, 1980).
24) 박용규, 17. 19.
25) W. B. 스프레이그,『참된 영적 부흥』(엠마오,1984), 133ff.
26) 토마스, 7, 56. 마틴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 신학은 부흥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점에 근거하여 현대교회의 부흥에 대한 무관심을 개혁신학의 퇴조와 현대주의 신학의 대두를 그 한 가지 요인으로 지적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22-23.
27)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KMF, vol. 4, no. 7 (July, 1908), 105.
28) W. Duewel(안보헌역),『부흥의 불길』(생명의 말씀사, 1996), 307.
29) D. S. Wallace,『칼빈의 기독교 생활 원리』(CLC, 1996), 41; J. Leith,『칼빈의 삶의 신학』(한국장로교출판사, 1989), 72, 78.
30) J. Goforth, By My Spirit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n.d.), 181, 189.
31) I. D. E. 토마스,「신앙부흥운동」(여수룬, 1986), 10.
32) George Thomas, Revivalism and Cultural Chang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참고.
33) 박용규, 182, 187.
34) R. E. Coleman, Dry Bones Can Live Again, 16.
35) I. D. E. 토마스, 12.
36) J. R. Moose, “A Great Awakening,” KMF Vol. 2 No. 3 (Jan., 1906), 51. “There is indeed a golden opportunity for the Christian worker in this land. The general unrest and lack of something to which they may cling is causing the people to turn to the Missionary and the message he has; and they are trying to find out if we have something which they can trust.”
37) W. Baird, “Pyung Yang Academy,” KMF, vol. II, No. 9 (Oct. 1906), 221.
38) Fischer, Reviving Revivals, 63, 64.
39) Edwin Orr,
40) 히스기아왕 때 일어난 부흥운동의 경우, 그 이전 시대의 아하스왕 시대(735-716 BC)에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영적 침체가 있었다. 즉 저들은 16년간 우상숭배와 악행, 음란과 방탕이 있었다. 역대하 28:19에서는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다”고 했는데, NIV에서 이 본문을 아하스가 “유다에서 악한 일을 증가시켰고, 여호와께 가장 불충했다”고 번역했다. 영적 퇴보는 다음 시대 부흥 혹은 각성의 주된 동기였다.
41) “..... 그들은 광범위하게 타락과 쾌락주의에 빠져들었다. 1735년 영국 알코올의 소비는 약 600만명의 인구 가운데 거의 550만 갈론이었다. 1751년에는 거의 1,100갈론에 달했고,... 도시와 마을은 범죄로 들끓었다.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