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사도행전의 성취, 곧 성령의 부어주심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는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꾼다. 그러므로 예언과 환상과 꿈은 성령의 선물이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아보면 늘 논란과 시비가 뒤따랐던 것이 이들 주제이기도 하다. 신학의 눈으로 예언과 꿈과 환상을 조명한다.<편집자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은 요엘 2장 28절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이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로 나와 있다. “장래 일을 말할 것”으로 번역됐지만 원문에 의하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요엘을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예언할 것"은 뜻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먼저 위에서 언급한 요엘과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예언의 어의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예언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는 길이라고 본다. 요엘 2:28에 “예언할 것이요”의 동사 ‘나바’의 니필형(Niphil)은 예언자적인 황홀경 안에 말한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의 의지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이끌려서 영의 의지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한다는 것은 말하는 자의 의지나 생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게 하는 분의 의지와 생각에 좌우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2:17은 요엘 2:28에 나온 동사 ‘나바’를 ‘프로페튜오’라는 동사로 번역하였다. ‘프로페튜오’는 ‘예언하다’는 뜻이다. 70인 역에도 ‘프로페튜오’로 번역하였다(70인 역은 장절의 배열에 차이가 있어 요엘 3:1에 나옴). 이 ‘예언하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가 ‘예언’이라는 ‘프로페테이아’이다. ‘예언하다’의 동사에서 또 하나 파생된 명사가 ‘예언자’인 ‘프로페테스’이다. ‘프로페테스’는 ‘알리는 사람’, ‘대변자’의 뜻을 지니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프로페테스’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자기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 어떤 사람 또는 영감받은 사람의 해석자로서 직무를 행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언’은 알리는 행위 그리고 내용을 의미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누가 이후(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 행 2:14 이하) 예언이 성령의 카리스마로서 ‘마지막 날’의 징표에 속한 것으로 인식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예언에서 무엇보다도 성령이 주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 행위에 있어서 성령이 아닌 인간이 주체되면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교회사에서 볼 때 예언은 주로 천년왕국 사상을 지닌 종말론과 연관을 맺고 있다. 고대 교회에 이 예언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몬타니즘이다. 156년 프리기아 지방에서 몬타누스는 자신을 거룩한 영의 화신,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의 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환상의 체험을 하고, 그 환상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으로 확신했으며, 그 체험을 ‘제3의 성서’(the Third Testament)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이 본 환상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였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프리기아 지방에 임할 것이며, 이 도시는 성도들이 사는 집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몬타누스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프리기아로 모이게 했으며 그곳에서 금식과 뼈를 깎는 참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 그러나 재림이 지체되자 이 운동은 곧 종막을 고했다.
헬라 교부인 이레네우스(Irenaeus)는 리용의 주교이자 탁월한 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이단 반박」의 결론부에 해당되는 여러 장에서 구약과 신약에서 발췌한 메시아와 천년왕국에 관한 예언을 집대성했다. 이레네우스는 장차 부활할 의로운 죽은 자들과 의로운 산 자들을 위하여 이러한 일들이 이 땅에서 진정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의로운 자들이 애써 수고하고 번민하고 시험받았던 바로 이 피조 세계 안에서 고통에 상응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그는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살해당한 바로 이 세계에서 마땅히 소생되어야 하며, 고역을 당했던 이 세계에서 이제는 다스리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예언 체계를 창시한 사람은 피오레의 요아힘(Joachim von Fiore, 1145-1202)이다. 요아힘은 칼라브리엔(Calabrien)에 있는 피오레 시토 수도원의 창설자요 수도원장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성서 연구에 몰두한 끝에 1190-1195년 사이에 성서 속에서 특별한 예언적 가치를 지닌 비의를 계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론을 도덕적 또는 교리적 목적뿐만 아니라 역사의 발전을 이해하고 예언하는 수단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구약과 신약, 특히 요한계시록의 여러 사건과 인물들에 이것을 적용할 때 역사에서 어떤 유형과 의미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미래 역사의 제 단계들을 예언할 수 있는 성서 해석의 중요한 열쇠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성서 해석에서 역사를 세 개의 연속적인 단계를 거쳐 상승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며, 그 세 단계는 하나님의 삼위 중의 각 위격이 통치하는 시대라고 보았다. 첫 번째 시대는 성부시대, 또는 율법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결혼한 사람들과 평신도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두 번째 시대는 성자 시대이다. 웃시아 때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때에 완성됐으며 제사장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세 번째 시대는 성령 시대로 수도사들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앞의 두 시대가 여명이라면 성령의 시대는 밝은 대낮의 햇빛이요, 앞의 두 시대가 각각 겨울이나 봄이라면 성령의 시대는 한 여름이다.
요아힘은 각 시대는 그 보다 앞서는 부란기(a period of incubation)를 거친다고 보았다. 성부 시대의 부란기는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이고, 성자 시대의 부란기는 엘리야에서 그리스도까지였다. 성령 시대의 부란기는 성 베네딕트에서 시작하여 요아힘이 자신의 저작을 쓸 당시에 끝나간다는 것이다. 마태가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42세대로 계산한 것을 근거로 요아힘은 구약을 후세의 모든 일의 원형으로 볼 때에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성령 시대를 성취하는 기간은 마찬가지로 42세대 동안 지속돼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고 1200년에서 1260년에 인류 역사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요아힘은 이 완성을 위해 길을 평탄하게 할 자가 나타나는데, 이 일을 이룰 자는 새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할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였다. 1260년에 성령 시대가 열린다고 하자 1260년 이탈리아에서 편타 고행자들의 순례가 일어나게 됐다.
요아힘은 의식적으로 정통교리를 반박하거나 교회를 전복할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가 받은 계시를 문서로 옮겼을 때 세 명 이상의 교황이 그를 격려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령 시대에 관한 사상은 어거스틴의 견해와 상반됐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만일 지상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교회가 탄생한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며, 교회 시대가 바로 천년왕국 시대가 되는 것이다. 요아힘은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주장, 이해에 매우 조심스럽게 대처했으나 결국 새로운 유형의 천년왕국론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적인 개신교단 안에서는 예언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예언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예언이 다 참된 것이 아니라 거짓 예언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예언자)들을 삼가라’(마 7:15)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예언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예언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21)고 했다.
그렇다면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분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사도 베드로가 요엘을 인용한 오순절 설교에서 예언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의 진위 여부에서 영 분별은 매우 필요하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요 16:8)고 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것은 참된 예언이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예언은 죄를 드러내며 심판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거짓 예언은 죄와 심판을 숨기며 위로라는 명목으로 죄에 대한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한다. 죄와 죄로 인한 재앙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는 자, 정의와 불법에 관한 물음에서 침묵하면서 인간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이다.
둘째, 성경 말씀이 예언의 진위를 가늠하게 한다. 즉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예언에 예속시키기 때문에, 이 예언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계시된 말씀을 성경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거기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된다. 이 결과는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혼란을 초래한다. 이러한 예는 1521년에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 등장한 ‘츠빅카우의 예언자’였던 스토르흐(Nikolaus Storch)와 드렉셀(Thomas Drexel)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령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비텐베르크 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셋째, 예언은 이것을 듣는 사람의 의지나 소원에 좌우되지 않는다. 예언이 듣는 사람들의 의지와 소원에 좌우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언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 예언은 악한 뜻을 성취하는 내용을 갖게 될 것이다. 넷째, 예언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예언이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내재되어 있다. 특히 이단 종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느니, 예언이니 하면서 신도들을 기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예언은 분명 신앙 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 예언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령의 역사가 그 어느 때 보다 강한 시대적인 표징이 되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성령의 ‘제3의 물결’이라는 말로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와그너 박사는 20세기에 명확해진 성령의 권능에 대하여 ‘물결’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 번째 물결은 20세기 접어들면서 시작된 오순절 운동이다. 두 번째 물결은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은사 운동이다. 세 번째 물결은 오순절 운동, 또는 은사 운동으로 여겨지기를 원치 않는 교회들과 기구들에서 성령의 동일한 권능이 나타나는 운동이다.
예언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예언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21)고 했다.
피터 와그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순절 신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게 됐다. 강퍅한 죄인들의 변화, 기적적인 치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증가, 깨어진 가정들의 재결합,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난하고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
피터 와그너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사람에서 벗어나 1982년 성령의 ‘제3의 물결’에 참여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즉 자신의 과거의 신앙 생활과 비교할 때 현격하게 달라진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즉 구원의 믿음이나 성화의 믿음이 아닌 초자연적인 기적의 믿음을 소유하고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개신교에서 무시하거나 반대했던 것이다. 이적들은 예수와 사도들에 의하여 일어났지만 사도 시대의 종결 및 정경의 완성과 함께 중단됐기 때문에 오늘날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와그너는 오순절파 신자들에게서만 일어날 줄 알았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과 같은 비오순절파 신자에게도 일어남을 체험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자유롭기 때문에 어느 교파, 지역, 인종에 제한되지 않음을 우리는 지구상 도처에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하나인 예언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예언을 무당이나 점성가들이 점치는 정도로 격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점은 매우 개인 중심적이고 탈 공동체적이며 사회성이 약하다. 그러나 성령의 예언은 개인은 물론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는 자유와 평화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출처: Copyright(c) CharisWorld co., Ltd. all right reserved. 저자: 김문기 교수 평택대학교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