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정치학 : 조선의 명판결
1684년 조선 숙종 때의 일이다. 8월 2일자 실록에는 정제선이라는 관료가 평안도에서 사람을 죽인 일 때문에 사간원이 사형을 청하는 상소가 수록되어 있다.
“전 지평(持平) 정제선이 작년 중국으로 사신행차시 평안도에 이르렀는데 이곳으로 도망친 자신의 사노비를 찾는다면서 가는 곳마다 술에 취하여 혹독한 매질을 하다가 제멋대로 죽인 자가 무려 5명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주소서.”
관료가 백성을 죽이다
당시 숙종은 정제선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지만 많은 신하들이 그리할 수 없다며 만류하여 결정이 보류되었다. 이에 숙종은 한 차례 더 조사하는 동시에 대신들의 견해를 구하였다. 그리고 12월 13일 드디어 최종 결정을 하교하였다. “정제선 사건을 관찰사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이제 보고서를 보니 비부(婢夫) 2인과 양민 1인을 반노(도망한 노비)와 함께 함부로 죽였으니, 진실로 살인의 율을 면하기 어렵다.” 숙종은 최종적으로 사형 집행을 명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대신들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임금의 명을 받은 관료가 살인한 경우 사형 대신에 감형하여 귀양 보낸 사실을 거론하며 정제선 역시 유배형이 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본 사안의 판결을 이듬해 1685년 1월 말로 미루었다. 그 사이에 의금부 대신들은 관리가 사람을 죽인 경우 사죄에 처하지 않았다는 의논을 반복하였고, 때문에 이를 참작하여 유배형을 결정하는 게 좋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정제선이 비록 왕명을 받든 관료라 하지만 공무도 아니고 한때의 혈기를 참지 못하여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죽였으니 왕법에 용서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대신들이 이번 옥사를 참작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니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감형하여 3천리 유배형을 처하라”고 명하였다. 정제선은 마침내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
물론 모든 신하들이 정제선의 감형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예조판서 이민서는 정제선을 사죄에 처하도록 극력 상언하였다. 그는 후일 왕명을 받았다면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자들이 속출하고 또 이번 사건을 끌어다가 살아날 방도를 찾는 폐단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숙종은 일단 정제선은 감형하여 유배형에 처했지만 이후 사사로이 사람을 죽인 관료는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모든 범죄자를 엄벌해야 한다
1668년 추쇄 노비에 대한 입지 요청 소지
1685년 4월 15일 우의정 남구만은 정제선을 사죄에 처하지 않은 숙종의 판결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신이 의주에서 순안까지 열 고을을 지나오다가 정제선의 사건을 탐문하니 참혹함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옥사를 의논하고 감형하는 것은 임금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나 사람을 죽인 자를 용서해 준다는 법조문은 없습니다. 노쇠한 자에게 형벌을 면제함은 주나라의 아름다운 제도이나 사람을 죽인 경우라면 비록 나이가 칠팔십이 되었다 해도 사면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고의 유무를 잘 따지는 게 중요하지만 사람을 죽인 경우라면 과실이나 장난 중의 사고라 해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목숨으로 갚지 않고서는 죽은 자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의금부의 논의에 이른바 ‘왕명을 받든 신하는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고금의 경전과 법률에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고대 법전에 다만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갚는다고 했을 뿐이고 신분의 귀천과 존비의 구별이 없었으며 고금에 이를 중요한 원칙으로 지켜왔는데, 관료와 일반인을 차등한다는 의론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왕명을 받든 신하라면서 대신들의 의견을 구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천하의 공평한 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신들의 논의 중에 ‘정제선이 공무도 아닌 일로 더욱이 관청 내의 부리는 사람도 아닌 일반 양민을 죽였는데 이를 가볍게 처벌한다면 법을 만든 뜻이 진실로 무언지 모르겠다.’고 주장한 이도 있었으니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전하께서는 전례를 들어 사형을 감하여 유배의 명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위엄을 내리고 복을 내리는 권세가 본래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형벌하고 죽이는 것을 임금이 결정하셔야 할 터인데, 어찌 대신들의 말을 기다려 이처럼 처리한단 말입니까. 또한 전하께서 정제선을 용서해 주신 뒤에 또 새로운 법령을 세우시어 ‘지금 이후로는 왕명을 받든 관료라도 사사로이 사람을 죽인 경우 상명하라.’ 하셨다 하니 신은 이에 더욱 개탄스럽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지금 왕명을 받든 관료가 사람을 죽인 경우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여기신다면 정제선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으며, 정제선의 죽음을 만약 감면해도 된다고 여기신다면 후일 어찌 관료를 반드시 사형에 처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법을 운용한다면 국민들로 하여금 더욱 전하의 마음이 얕고 깊음을 엿보아 경시하고 함부로 대하려는 마음을 열어 놓게 할 것이니, 새로 정한 법령이 반드시 행해지지 못하리란 것을 누구인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기왕의 잘못은 이제 어쩔 수가 없으나 법대로 처리하자는 청원이 아직 사헌부에 남아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윤허하여 국법이 바로잡히고 국가의 기강이 다시 진작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형벌 집행의 예외
후일 다산은 강진에 유배되었던 정제선 사건의 내막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다산은 남구만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남구만이 모든 죄인들을 나이와 상관없이 처벌하거나 혹은 과실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경전을 잘못 알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다산은 “노인이 살인한 경우 사형에 처한 것은 오직 한의 법률일 뿐 고대에는 사면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오나 장난 중에 사람을 죽인 이른바 과실에 대해 고대에는 모두 사죄에 처하지 않았는데 어찌 용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주례’에는 ‘의귀’라 하여 왕명을 받든 신하를 특별히 사면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으니 관리들과 보통사람이 다르다는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고 언급한 후, 정제선을 엄형하려 든다면 공평치 못한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다산은 남구만이 고대의 법전에 진실로 임금의 명을 받든 자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조문이 없다면서 관료와 일반인을 다르게 취급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임금의 명을 받은 자가 보통사람과 동일하다는 조문은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산은 관리와 일반인의 처벌이 같을 수 없다고 극구 주장하였다. 심지어 다산은 모든 이를 공평하게 엄벌함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남구만이 유학자가 아니라 엄형을 좋아하는 군인 같다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다산은 입법의 취지가 ‘살인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령 정제선처럼 왕명을 받든 관리들은 ‘감형’하는 것이야말로 고대 경전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산은 형벌을 모든 이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보고 이른바 ‘예외’ 집단을 인정하였다. 다산의 예외 규정은 노약자나 정신병자 등도 있었지만 대부(大夫) 이상의 관리를 포함시킴으로써 매우 특별해졌다. 다산은 관리들이야말로 국가의 동량으로 일반 백성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혹 이들을 보통사람과 똑같이 대우한다면 이들의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이거니와 상민들이 분수를 모르게 된다고 우려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선시대가 신분제 사회였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